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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잠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가노 료이치, 엄정윤 역, [창백한 잠], 황금가지, 2016.
Kano Ryoichi, [AOZAMETA NEMURI], 2012.
[환상의 여자](황금가지, 2015)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만나는 가노 료이치의 소설 [창백한 잠]이다. 하드보일드 풍의 일본 미스터리로 욕망을 좇는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추적하고 있다. 사건 발생부터 해결 이후까지 대략 9일 정도의 시간을 담고 있는데, 담백한 문체와 빠른 전개로 나름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이야기 중심의 글이 매우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성향에 맞지 않아서...;; 가벼운 작품인데도 시간을 들여서 읽어야 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나의 일부분이 약간씩 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음에 가까워진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동이 틀 무렵의 사진을 고집하게 된 후부터 조금은 해답에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그린 세계를 제발 표현할 수 있게 해 달라, 그것을 이 한 장으로, 나의 손끝으로 잡아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아마도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일이 죽음을 끌어당기게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리라.(p.8-9)
다쓰미 쇼이치는 사진작가이다. 전직 탐정이라는 흥미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조작이라는 누명으로 한동안 그 세계에서 퇴출당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호구지책으로 흥신소에서 잠시 일을 했는데, 아마도 증거 수집을 목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한듯싶다. 어쨌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억울함을 풀고 복귀할 수 있었지만, 한동안 후유증이 있었다. 그는 폐허가 된 곳을 찾아가 동이 틀 무렵의 빛을 필름에 담는 작업을 하는데, 시작은 새벽 미명에 문 닫은 다카하마 호텔을 촬영하다가 건물 안에서 한 여자의 죽임을 발견한다.
"여긴 조그만 마을입니다. 신문사든 경찰이든 모두가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셈이지요. 무언가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 조사하려면 아무래도 저희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점에서 다쓰미 씨라면 얽힌 관계도 없고 게다가 몇 년간 여러 사건의 조사를 전문적으로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p.71)
지방의 작은 마을은 아버지 대에서부터 이어져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인간관계로 구성원을 이루고 있다. 한 가족처럼 지내던 이들에게 개발이라는 바람은 환경 보존과 도시 발전이라는 서로 상충한 충돌을 일으키는데, 다카하마 역시 공항 건설을 두고 찬성하는 이와 반대하는 이로 나뉘어 있다. 죽은 여자는 지역 사회에서 유명한 저술가로 활동하며 자연 보호 운동을 펼치던 인물이다. 살인 사건은 5년 전의 화재를 계기로 호텔을 폐업하게 된 사연과 맞물려 여러 가지 의혹을 증폭시키는데,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음모가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는 제가 일본인과 한국인 혼혈이라는 점을 스스로 그다지 인식하고 있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마 좀 더 훨씬 근본적인 이유는 이종원이 저에게 계속 먼 존재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제가 열 살이 되자마자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서 저희를 남겨 두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그전에도 수없이 많은 여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여자들 사이를 전전하고 다니면서 집에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집에 있는 부친의 모습은 거의 기억이 안 납니다. 저에게는 항상 어딘가에 있다가 갑자기 훌쩍 돌아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다쓰미 씨, 어머니로부터 그가 집을 나갔다고 들었을 때 제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까? 조금도 쓸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긴커녕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기뻤습니다.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죠."(p.119)
"안비루 씨, 저는 가정의 맛을 거의 모릅니다. 아버지는 제가 철들었을 무렵에는 안 계셨고, 어머니는 저에게는 정말로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후지코와의 관계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
"무엇이 무서웠던 거죠?"
"그렇게 물어보시면 난감합니다만, 뭐든지 다요. 누군가와 함께 살고 이윽고 아이가 생기겠죠. 그렇지만 그때 난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있을까. ......상상이 안 되더군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제가요."
"본인도 아버지처럼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p.270)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계속 언급되는 재일 한국인 이종원은 파렴치한 인물로 죄의 원흉이다. 그로부터 시작한 돈과 이성을 향한 욕망은 마침내 살인이라는 범죄로 이어지고, 여기에 얽히고설킨 인물 사이의 관계는 또 다른 욕망으로 진화한다. 불행한 가정환경으로 누군가를 만나서 가족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주인공에 관한 심리는 사건을 풀어가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지만, 결과는 안타까움만 남는다. 욕심으로 직업적 가치를 잃은 사람, 사라지는 안개처럼 꿈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 사막의 신기루를 찾아 내달리는 사람,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는 사람... 현실에서는 모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뿐, 모두 창백한 잠을 자는 것 같다.
"흙의 공기를 빼는 거야. 힘과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 세 시간은 걸려. 그리고 제대로 공기를 뺄 수 있게 되기까지 3년이나 4년은 걸리지. 그렇지만 도자기를 하고 싶다면 이건 기본이야. 일단은 흙을 주무르고, 흙이 숨 쉬게 만들어야 해, 그런 점을 그 애는 바보 같다고 생각한 거겠지. 고등학교를 나오자마자 바로 이 마을을 떠났어. 내 슬하를 떠나서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겠다고 한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었어."(p.345)
왜곡되고 뒤틀린 소유욕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망친다. 주변 사람을 끌어들여 상처를 떠안기고 범죄라는 더는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진다. 힘과 끈기로 공기를 빼낸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듯이 인내와 절제로 부적절한 탐욕을 제거한 후에야 드디어 참된 인생이라는 교훈을 말하는 것 같다.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으나 가끔 뜬금없는 전개와 작위적인 진행으로 논리성에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