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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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마루 가쿠, 박춘상 역, [악당], 황금가지, 2016.

Yakumaru Gaku, [AKUTOU], 2009.

  국내에 소개된 일본소설, 특히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 순서는 다르더라도 대부분은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으로부터 미야베 미유키라는 이름을 거치게 된다. 그러면서 본격과 사회파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는데... 말 그대로 추리의 과정에서 누가? 어떻게? 에 초점을 맞추어 진실을 찾아가는 것을 본격이라고 하고, 왜? 의 문제에 중점을 두어 사회문제나 현상을 다루는 것을 사회파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나는 본격보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더 좋아한다.

  프롤로그, 악당, 복수, 유품, 맹목, 통곡, 귀향, 임종, 에필로그

  우리에게 [천사의 나이프](황금가지, 2009.)로 잘 알려진 야쿠마루 가쿠의 신작 [악당]을 읽었다. 전작은 일본에서 미성년자의 범죄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는데... 아직 인생을 제대로 펼치지 않았기에 언론의 보도를 자제하고 처벌의 수위를 낮춰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보호파의 견해와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해도 갈수록 흉악해지는 사건에서 파렴치한 행위는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엄벌파의 주장... 이 둘의 날카로운 의견 대립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악당]도 비슷한 맥락인데, 이번에는 7개의 단편으로 다각적인 관점에서 성인이 되기 이전의 범죄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그 남자를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면 그 근거를 찾아봐 줬으면 합니다."(p.22)

  '범죄 피해를 당한 분께. 가해자의 근황을 알아봐 드립니다.'(p.50)

  일인칭 화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사에키 슈이치는 전직 경찰로 지금은 호프 탐정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창 시절에 누나가 살해당한 범죄 피해자 가족으로 그때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태이다. 당시의 범인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고 처벌의 수위도 낮았다. 그래서 그는 틈틈이 가해자의 뒤를 밟고 있다.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품고...

  예순을 바라보는 초로의 부부는 11년 전에 외동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의 근황을 알고 싶어 한다. 젊은 청년은 16년 전에 영아인 남동생을 방치하여 살해한 생모를 찾고 있고, 임종을 앞둔 어머니는 강도 살인을 저지르고 떠난 아들을 만나기 원한다. 돈을 가지고 사라진 남동생의 예전 남자친구를 찾는 오빠가 있고, 12년 전의 사건에서 변호를 맡은 피고인이 현재 갱생의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변호사가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범죄로 희생된 피해자의 가족이 법률적으로 죗값을 치렀다고 하지만, 단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가벼운 형을 살고 나온 가해자의 삶을 조사 의뢰하고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일을 이렇게 만든 이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를 용서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갱생하고 속죄의 삶을 살고 있으면 다행이나 여전히 범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반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 의뢰인들은 나름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증오의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범죄자를 향한 증오. 사람을 망가뜨리고서 태연한 얼굴로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증오.

  증오는 이윽고 격렬한 불꽃이 되어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누군가가 어느 지점에서 이 연쇄를 끊어내지 못하는 한, 걷잡을 수 없는 화염으로 번져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린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증오의 불꽃을 끌 수 있을까?(p.57-58)

  "사건을 벌인 장본인은 담장 안에 들어가 보호를 받아요. 튼튼한 벽이 피해자 유족의 증오와 세상의 규탄을 막아 줘요. 하지만 우리는 그 증오와 규탄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어요. 그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무일푼이 됐고, 남들의 이목을 피하듯 도망쳐 다녔어요. 전 대학을 그만뒀고, 동생이 살인자라는 이유 때문에 연애하는 것조차 두려워요. 모든 가능성이 닫혀 버렸단 말이에요. 그런 동생을 위해서 제가 더 무얼 희생하라는 건가요?"(p.105)

  "하지만 딸을 잃은 뒤 그 신념도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난 그동안 올바른 일을 해왔다......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그 사건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그 신념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변호인은 피고인의 죄를 최대한 덜고자 온갖 주장을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저도 당연히 그리 해왔으니까요. 다만 피해자의 입장에 서니 그 모든 주장이 불합리하게 여겨지더군요. 왜 그런 인간의 손을 잡는 거냐. 어째서 살해된 딸의 입장을 더 고려해주지 않는 거냐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는 도저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재판을 방청하면서 머릿속으로 과거의 재판과 대조해 가며 범인한테 어떤 형이 내려질지 상상하고 있더군요. 아무 무거운 벌은 내려지지 않겠지요. 몇 년 뒤에는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전 지금까지 피고인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 줄 생각만 해왔습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하나...... 외동딸을 죽인 죗값이 이렇게 가볍다니, 소중한 사람의 목숨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라니...... 당사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합리함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p.172)

  "그놈들이 형무소에서 나와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과거의 죄를 용서할 수 있나? 누님의 무덤이나 네 앞에서 울며불며 용서를 구한다면 넌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악당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용서라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걸 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아. 악당은 자신이 빼앗은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기어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마는 인간, 그게 바로 악당이라는 거다."(p.242-243)

  희생자의 유가족은 오늘도 증오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걸어서라도 가해자의 삶을 파괴하기 원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또 다른 증오를 가져오지만... 이 고리를 끊기란 쉽지 않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에 나오는 가해자는 모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형을 살고 나와서 착실하게 살았다면, 피해자는 더 쉽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직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살고 있다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희생자의 유가족과 함께 가해자의 남은 가족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범죄를 저지르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법의 보호를 받는다면, 남은 가족이 표적이 되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피해자 보상을 해주어야 하고, 세상의 이목을 피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의 악인으로 인하여 주변의 모두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신이 빼앗은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악당! 가해자의 나이를 기준으로 우리의 사회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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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야의 여름
트리베니언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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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트리베니언, 최필원 역, [카티야의 여름], 펄스, 2016.

Trevanian, [THE SUMMER OF KATYA], 1983.

  대중의 시선은... 드라마는 익숙한 것을, 영화는 예측하기 어려운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유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느냐의 차이인데, 굳이 시간하고 돈을 들여 찾아가 익숙한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심리이다. 천편일률적인 TV 애정극이 꾸준히 인기인 것을 보면 그럴듯한 얘기인듯싶다. 그렇다면 소설은...? 개인적인 견해로 예전의 글이 연극의 느낌이라면, 최근에는 영화를 보는듯한 기분이다. 어떤 소설가는 머릿속의 영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는데, 익숙함과 예측 불가함 사이의 적절한 타협이 필요한 것 같다.

  여름 별장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과 사고는 스릴러의 단골 소재이다. 특별히 영웅적이지 않더라도 나름의 매력을 지닌 주인공에게 낯선 여인이 다가와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여기에 어떤 심리적인 변화가 주어진다면... 익숙하면서도, 또 빠져드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대전(大戰) 발발 직전의 마지막 여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 꿈같았던 완벽한 날씨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구름이 유유히 떠다니는 새파란 하늘, 산들바람 부는 연보라빛 저녁, 새소리와 노란 햇살이 열어주는 아침. 이탈리아에서부터 스코틀랜드까지, 베를린에서부터 내 고향 바쓰 피레네 산맥까지, 유럽 전역이 한동안 그런 이례적인 화사한 날씨를 누렸다.(p.4)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여름, 1914년 8월은 누가 보더라도 완벽했다. 마치 태풍이 오기 전의 고요한 바다처럼, 아니 포르테로 강한 소리를 내지르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는 오케스트라처럼, 대자연은 고지를 사이에 두고 진창에서 벌이는 4년간의 끔찍한 전쟁을 화창함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아름답고 우아하고 쓸쓸하다.

  트리베니언은 로드니 윌리엄 휘태커의 필명이다. 1938년 살리 레방, 저자는 우리에게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돌아와 고향에서 의사로 살다가 24년 전을 회상하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는 치열한 인생의 여정에서 뒤늦게 사반세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 살리에서의 첫 여름을 기록하는데, 거기에는 카티야가 있다.

  내가 카티야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아주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이곳 강변 공원의 한 고목 아래 앉아 노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명상을 가장한 백일몽에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길게 자란 잔디를 헤치고 다가오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밀짚모자 밑에서 내 눈이 가늘어졌다. 백일몽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지만 내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에게서 무언가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황당한 말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당당한 걸음걸이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p.16)

  장 마르크 몽장은 바스크 지방의 출신으로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잠시 파시의 정신병원에 몸담았지만, 이런저런 사유로 이제는 살리에 있는 그로 박사의 여름 진료소에서 일한다. 같이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 쌍둥이 남동생을 치료해 달라고 찾아온 여인은 걸음걸이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한눈에 반한 사랑이라고 할까? 그날 이후 둘은 아주 가까워지는데, 몽장은 치료를 핑계로 찾아가 카티야와 차를 마시고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온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애틋하고 낭만적이다.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였다. 얼굴의 모든 부분이 쏙 닮아 있었다. 도톰한 입술, 도드라진 이마와 광대뼈, 단단해 보이는 턱, 숱 많은 밤색 머리. 거의 판박이였지만 성별의 차이 때문인지 그 느낌은 매우 달랐다. 같은 이목구비였지만 그녀에게는 당당한 아름다움을, 그에게는 연약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주었다. 그녀는 우아했지만 그는 가식적으로 보였다. 박정한 비평가라면 그녀는 조금 지나치고, 그는 조금 아쉽다는 평가를 내렸을지도 몰랐다. 그 닮음 안의 차이는 그들의 눈을 통해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길고 검은 속눈썹과 옅은 회색을 띠는 아몬드 모양의 눈, 모든 게 똑같았지만 묘하게도 정반대의 인상을 주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차갑고 불가해한 느낌만이 풍겨 나올 뿐이었다. 그녀의 눈은 빛을 흡수했고, 그의 눈은 반사시켰다. 그녀의 눈은 다리였고, 그의 눈은 장벽이었다.(p.26-27)

  "카티야? 캐서린을 러시아어로 한 거죠? 하지만 당신은 러시아인 같아 보이지 않아요."

  "러시아인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름도 캐서린이 아니에요. 아버지는 소녀의 섬세한 감정을 무시하고 내게 오르탕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너무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카티야로 바꿔버렸죠."

  "이름을 바꿨다고요? 법적 절차를 밟았나요?"

  "아뇨,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걸요. 오르탕스라고 부르면 반응을 안 했어요. 카티야라고 부를 때까지 아무것도 안 했죠."(p.40)

  카티야와 폴은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이다. 하지만 몽장의 눈에 비친 그들의 인상은 그의 감정과 함께 매우 상반되어 보이는데, 성별이 다른 것처럼 우아함과 불쾌함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며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는데, 역경 없는 사랑이 어디 있겠냐마는... 폴은 몽장과 카티야의 친밀한 만남을 반대하고 나선다. 그녀 또한 뭔가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이고...

  파리 사교계의 명망 있는 집안이 모든 걸 팽개치고 시골 마을로 내려오게 된 사연, 마을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 쉽게 열리지 않는 연인의 마음, 방해자... 누구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맞아요." 그녀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폴의 주장을 믿어주는 척하면서 나도 거짓말을 해온 것이죠. 우리 세 식구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진실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p.241)

  가족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인! 그녀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고 진실을 찾아갈수록... 상처는 드러나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시작은 낭만적이고 대화는 재기발랄했지만, 결국 과거의 상흔은 발목을 잡는데... 하지만 프랑스를 배경으로 이처럼 우아한 스릴러가 또 있을까? 마지막 장면의 심리적 전이는 정말 강렬하고 압권이다.

  결론은 정해져 있다고 해도... 한여름에 그곳에서 카티야를 만난다면, 남자라면 누구나 몽장하고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 같다. 그것이 남자의 욕심이고 어리석음일지라도... 올해 만난 최고의 심리 스릴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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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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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문희경 역, [바퀴벌레], 비채, 2016.

Jo Nesbo, [KAKERLAKKENE](COCKROACHES), 1998.

  노르웨이의 작가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에서(지금까지 열 권이 쓰였다고 한다) 두 번째인 [바퀴벌레]이다. 서늘한 기운의 북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스릴러라서 여름보다는 겨울이 먼저 연상되는데... 이번에는 1월의 시간이지만, 오슬로가 아닌 태국의 방콕에서 저위도의 무더위를 묘사하고 있어 현재의 계절하고 잘 어울린다. 특히 먼저 출간한 시리즈에서 보았던 주인공의 원숙함과는 다르게 초반부의 파릇파릇한 모습을 보는 색다른 재미가 있다.

  매번 시리즈가 새로 나올 때마다 책의 제목을 유심히 살핀다. 그동안의 경험으로는, 제목이 소설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레드브레스트](비채, 2013.)에서는 진홍가슴새의 겨울나기 속성을, [박쥐](비채, 2014.)에서는 생태계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박쥐의 속성을, [레오파드](비채, 2012.)에서는... 그래서 이 시리즈를 잘 아는 사람하고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눌 때면, [스노우맨](비채, 2012.)은 바다표범의 생물학적 속성을 언급하고 있어서 제목을 '바다표범'으로 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말을 한다. 어쨌든, [바퀴벌레]는 까맣고 동그란 벌레의 어떤 속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갈지 처음부터 기대가 된다.

  통신과에서 온 봉투를 열어보니 암호화된 팩스를 해독한 서류에 '일급기밀' 인장이 찍혀 있고, 그 안의 내용은 책상에 흩어진 문서에 커피를 쏟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짧은 메시지에는 상상의 여지가 많았지만 기본적인 요지는 이랬다. 주태국 노르웨이 대사 아틀레 몰네스가 방콕의 사창가에서 등에 칼이 꽂힌 채 발견되었다.(p.22)

  "물론이오. 이번 작전은 외무부를 대표해서 내가 책임집니다. 잘 아시겠지만 다소 민감한 사건이라 태국 경찰과 긴밀히 공조해야 합니다. 대사관이 연루된 사건이오. 우리 쪽에 약간의 재량권이, 외교관 면책 특권 같은 것이 있기는 해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국제 사건과 관련해서 수사 능력도 있고 경험도 있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을 파견하고 싶군요."(p.27)

  주태국 노르웨이 대사가 방콕의 사창가에서 등에 칼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된다. 그는 현 총리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맹 관계로 외무부에서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언론 보도와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기 원한다. 사건 해결을 위한 태국 경찰과의 공조 수사를 위해 국제 사건의 경험이 있는 수사관을 파견하기로 하는데, 이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온 해리 홀레를 지명한다. 서른셋에서 서른넷 정도의 나이, 192cm의 장신에 짧은 금발 머리 형사는 근무가 없으면 온종일 술독에 빠져있다. 알코올 중독자로 위태한 생활을 하는 그는 2년 전에 있었던 여동생 쇠스의 성폭행 사건 재수사를 조건으로 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해리는 어스름 속에서 무언가 싱크대에서 움직이면서 더듬이 두 개를 이리저리 흔드는 것을 보았다. 바퀴벌레 한 마리. 엄지만 한 크기이고 등에는 주황색 줄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생긴 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바퀴벌레는 종류가 3천 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바퀴벌레는 누가 다가오는 진동을 듣고 숨어버려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띄면 적어도 열 마리가 숨어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었다. 바퀴벌레는 무게가 얼마나 될까? 10그램? 금 간 곳이나 테이블 뒤에 백 마리 넘게 숨어 있다면 방 안에 있는 바퀴벌레가 적어도 1킬로그램은 된다는 뜻이다. 해리는 몸을 떨었다. 자기보다는 바퀴벌레들이 더 두려워할 거라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때로는 술이 해롭기보다는 '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p.113)

  "흠, 소아성애자들은 대체로 자존감이 낮고 성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자신에게 확신이 없고 성인의 성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실패한 기분에 휩싸이지. 아이들을 대상으로 욕구를 해결할 때만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성폭행범 자신이 어릴 때 성적으로 학대당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지... 수치심은 영리하게도 위장술의 대가를 만들거든. 소아성애자들은 대부분 일생동안 성적 취향을 남에게 숨기는 데 도통한 사람들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경찰이 잡아들이는 성폭행범보다 훨씬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야."

  "한 놈을 잡으면 열이 있다."(p.146)

  해리는 미국계 혼혈 태국 경찰 리즈 크럼리 경위의 팀에 합류한다. 수사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진행하는데... 보존된 현장에서 직접 시신을 살펴보고 모텔 주인을 만나 청취를 한다. 대사관에서 부대사를 면담하고 죽은 대사의 미망인을 찾아간다. 당일 통화 목록을 조사하고 운전기사와 최초 발견자를 심문한다. 아동성애, 동남아 마약조직, 도박, 사채 빚... 서서히 피해자의 행적이 드러나고 하나둘 용의자가 물망에 오른다.

  "네, 그래도 때로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편이 더 쉬운 것 같아요.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을 보살펴야 해요, 해리. 산 사람들요. 어쨌든 그런 책임감이 우리를 이끌어주죠."

  책임감. 작년에 해리가 묻어두려던 것이 있다면 바로 책임감이었다. 산 사람을 위해서든 죽은 사람을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릴 뿐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아니, 책임감이 어떻게 그를 이끌어주는지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 일에 대해서 토르후스가 옳았는지도, 어쩌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은 해리의 동기는 그리 고상하지만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어리석은 야망에 사로잡혀 사건을 미제로 남기지 않고 결정적 증거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건 파일에 '해결' 도장을 찍는 일이, 상대가 누구든 잡아넣는 것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왔을 때 신문 헤드라인과 시끌벅적한 칭찬에 과연, 조금이라도 진심이 담겨 있었을까? 쇠스의 사건을 돌려받기 위해 무엇이든, 누구든 짓밟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단지 핑계였을까? 그에게 '성공'하는 것이 아주, 아주 많이 중요하다는 것도.(p.213)

  "대신 그들은 뭐든 파헤칠 가능성이 가장 적어 보이는 인물을 골랐어요. 닥핀 토르후스가 조사를 마치고 완벽한 후보를 찾았죠. 절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사람. 해리 홀레는 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 완벽한 후보였겠죠. 밤이면 맥주 상자 앞에 쭈그려 앉아 있고 낮에는 숙취로 조느라 여념이 없을 테니까. 만약 누가 의문을 표하면 해리 홀레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사한 사건을 해결하고 추천을 많이 받았다는 구실을 대서 자기네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모자라면 PAS 묄레르가 보증했고, 그야말로 가장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떠넘기면 되니까."(p.315-316)

  이런저런 사연과 이유로 오슬로에서 술에 찌들어 살던 형사는 방콕에서 물만 마실 뿐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이것이 어떤 책임감이든 아니면 사건 해결을 위한 강한 의지이든 그는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하지만 살인사건의 이면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함께 있었으니... 애초에 주정꾼이 선택된 이유로부터... 정치권은 그들 나름의 국가적 안녕을 위해 진실보다는 조용한 해결을 원하고 있다. 심지어 수사를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지는데... 제한된 시간의 압박 속에서 그는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왜 해리 홀레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지? 왜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왜 주변에 친구가 없는지? 왜 악에 대항하면서 점점 악에 물들어가는지? ... 나온 시리즈를 한 권, 한 권 읽어갈 때마다 마치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작은 그림이 모여서 큰 그림을 완성해 가는 느낌이다. 바퀴벌레에 관한 좀 더 명확한 비유와 사건의 연관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살아있는 듯한 캐릭터의 매력과 특유의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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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 매뉴얼
대니얼 월리스 지음, 이규원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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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월리스, 이규원 역, [아이언맨 매뉴얼], 비채, 2016.

Daniel Wallace, [IRON MAN MANUAL], 2013.

  [아이언맨 매뉴얼]은 한 마디로 영화 <아이언맨>(① 존 파브로 감독, 2008. ② 존 파브로 감독, 2010. ③ 셰인 블랙 감독, 2013.) 시리즈의 도록이라고 해야 할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유는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절대로 끊을 수 없는 마력(매력을 넘어선)이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라도 속속들이 나오는 시리즈를 한 권이라도 놓치지 않고 구매해야 한다는 어떤 사명이나 결의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려서...;; 웬만하면 모른 척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피치 못할 인연(?)으로 덕질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어디! 끝장을 보러 가야겠다.

  본 브리핑에서는 하워드 스타크, 토니 스타크를 거쳐 포츠 양에게 리더십이 이어지는 과정을 살피고, 각 리더가 스타크 인더스트리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정리하였습니다. 가장 큰 업적은 단연 아이언맨 아머이겠습니다만, 저는 포츠 씨 또한 과학 기술의 위협이 도처에 도사린 이 불확실한 시대에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훌륭한 선장이 되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p.5)

  책장을 펼치면...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방문 카드, 명함, 시크릿 파일, 개념도, 엑스포 홍보 전단, 메모지와 포스트잇... 등과 함께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다. 예전에는 평면적으로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을 이제는 입체적으로 실물로 제작해서 붙여 놓아 실제로 스타크 인더스트리와 아이언맨에 관한 브리핑을 받는 기분이다. 아무리 사소한 장면이라도 아이언맨과 연관된 것이라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영화에서 놓치거나 잊고 있었던 부분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다. 가령 토니 스타크는 친구라고는 거의 없는 내성적인 소년이었고, 네 살에 전자 회로를, 여섯 살 때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었다. 이러한 천재성을 키워 MIT 재학 시절에는 인공지능 분야의 신기원을 개척하고, 17세의 나이로 수석 졸업을 하는가 하면, 4년 후에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수장에 오르게 된다.

  하워드 제임스 스타크의 천재성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부터 이미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모두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하워드 스타크는 이론물리학에서 보여준 탁월한 재능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입성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했고, 프로젝트 리버스에서 슈퍼솔저 군대를 만드는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는 바로 이 프로젝트 리버스의 연구가 성공을 거둔 유일한 피험자입니다. 로저스가 사용하는 초강력 방패는 하워드 스타크가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스타크는 오늘날 실드(S.H.I.E.L.D.)의 전신이자 국가 비밀정보기관인 전략과학예비국(SSR:Strategic Scientific Reserve)의 핵심 맴버가 되었습니다.(p.16)

  토니 스타크에 관해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혁신의 역사에 관해서... 아이언맨의 탄생에 관해서... 토니 스타크의 저택과 작업실 그리고 새로운 버전의 아이언맨에 관해서... 국제적인 위협과 친구들에 관해서... 매뉴얼이라는 제목의 의미대로 하나하나 체계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책의 가격이 다소 비싼 게 유일한 흠인데, 한편으로는 무광 인쇄로 편집을 해서 가격을 조금 낮추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덕질에 있어서는 한치의 타협이 불가하다는 출판사의 의지와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그 정도로 고퀄의 올 컬러 구성이다.

  마크5 아머... 휴대형 경량 아머 슈트는 긴급 상황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설계한 것입니다. 서류가방 형태이지만, 아머를 작동하면 조종자의 신체를 덮으며 장착됩니다. 스타크 씨는 모나코 자동차 경주장에서 이반 반코와 대결할 때 마크5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마크5 서류가방은 스타크 씨의 경호원인 해럴드 '해피' 호건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p.72)

  경영권을 둘러싼 음모, 이사회와의 갈등, 납치 그리고 탈출은 결론적으로 아이언맨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마크1은 미사일 금속 외피를 뜯어내 만든 최초의 아머, 마크2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만든 기본형 아머, 마크3는 초고고도에서의 결빙 문제를 해결, 마크4는 스타크 엑스포의 개막식에서 발표, 마크5는 긴급 상황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휴대용 서류가방 형태로 보관, 마크6은 삼각형 구조의 아크 원자로 탑재, 아머7은 로켓 발사되어 공중합체가 가능... 마크41까지 이어진다. 과학 기술에 기반을 둔 세계관은 나라마다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아머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설정이고, 아이언맨 아머는 전투뿐만 아니라 수중이나 건설 현장에 특화된 아머도 포함되어 있다.

  제임스 로즈 중령은 스타크 인더스트리 담당 군 연락관이며, 현재는 아이언 패트리어트 아머 조종사입니다. 스타크 씨의 절친한 친구인 그는 '로디'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디'는 스타크 씨 혼자서 재미있어하며 주위 사람에게 붙여준 수많은 애칭들 가운데 하나입니다.(p.134)

  국방부 소속으로 군의 명령 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아이언 패트리어트... 책이 조금만 더 빨리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에 이어서 영화 <어벤져스> 시리즈가 주목받는 시대에 아이언맨 캐릭터 하나만을 다루기에는 다른 영웅 캐릭터가 궁금하다. 그런데도 영화에서 인식하지 못한 부분을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덕질의 진정한 재미는 계속된 시리즈의 출간이 아니겠는가! 후속으로 [어벤져스 매뉴얼]이 나온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가지고만 있어도 기분 좋은 책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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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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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 김선영 역, [리버스], 비채, 2016.

Minato Kanae, [REVERSE], 2015.

  중의적이거나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 글은 확실히 매력이 있지만, 때로는 복잡한 일상을 떠나 머리를 식힌다는 기분으로 하는 독서에서 또 다른 신경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아 오히려 명확한 글을 좋아한다. 문학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열린 결말보다는 짜임새 있는 끝맺음을 좋아하고... 기왕이면 평면적인 사건의 나열보다는 등장하는 인물의 사소한 심리라도 잘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본의 작가를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미나토 가나에를 말한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는데, 마치 깜짝 쇼를 벌인 것처럼 그녀의 방한과 함께 신작 소설 [리버스]의 출간은 열성 있는 팬심을 발휘하게 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p.9)

  지금까지 나온 그녀의 작품은 모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특히 여성의 심리묘사는 단연 최고라는 생각인데, 이번에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일인칭 화자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성에 버금가는 남성의 시기와 질투, 원망과 복수, 숨겨진 사연과 진실... 등은 이전의 작품하고 비슷하면서도 확실히 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중에 여자 친구에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는 3년 전에 있었던 사건의 기억을 되살린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모르는 일인데,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부 상상할 수 있더라고. 좋은 인생이나 나쁜 인생이라는 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해주는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아버지처럼 진정한 교사로, 온 힘을 다해 누군가의 인생의 순간을 함께 하면서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p.20)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랫동안 기억해 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을 마감한 후에도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대학교 시절에 만난 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딱히 특별한 관계라는 것이 없이 단지 커피를 내리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중, 고교 시절에는 따돌림을 당하며, 그 시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빨리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기를 희망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호흡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서서히 낯빛을 잃어가는 자신을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도 있었다. 이것은 아무 예고 없이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처음부터 여기로 갈무리되도록 짜여 있었던 것이다.

  친구, 동창회, 팝송, 비, 커피, 벌꿀...(p.55)

  여자 친구에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로 그는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대학에 들어가 알게 된 단짝 친구 히로사와 요시키는 4학년 여름 세미나 수업을 듣는 친구들과 떠난 마다라오카 고원으로의 여행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직접적인 책임과 무관하다고 여겼지만, 여자친구의 반응은 냉담하다. 그런데 그날 여행을 떠난 다른 세 명의 친구에게도 같은 편지가 배달되었다고 한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편지를 보낸 것일까? 진상을 밝히기 위해 죽은 친구의 삶을 하나하나 되살피며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말도 이해가 가. 하지만 나는...... 투명하다고 생각했어. 투명한 히로사와는 선명한 색도, 어두운 색도 수용해주니까, 나하고 같은 색이라고 착각하는 거라고. 달리 사귀는 사람이 없는 한 고백만 하면 아무한테나 좋다고 말해줄 사람 같았어. 그렇게 상대의 색에 맞춰가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면 나처럼 고집 세고 미움만 사는 사람하고 같은 색이 되면 안 되잖아. 그래서 반이 달라진 뒤로는 문자 메시지도 전화도 끊었어."(p.227)

  고향에서 가져온 벌꿀을 커피에 넣어 마시며 단짝이라고 여겼지만, 솔직히 죽은 친구에 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아니 대학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서는 전혀 모르던 모습을 보았고, 갈수록 그와 정말로 단짝이었을까? 라는 의심이 생긴다. 히로사와 요시키는 누구인가? 고향 집을 찾아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그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 그럴수록 이제까지 알지 못 했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투명한 색의 사람...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과 그를 친구로 여긴 투명한 사람의 이야기는 이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친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나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주인공처럼 그냥 평범했다. 지금도 무슨 패션처럼 투명함을 동경하고 있는데, 갈수록 나의 색은 짙어만 간다. 작가는 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죽은 친구의 삶을 되짚어가는 소설을 썼을까? 무엇이든지 온 힘을 다해 누군가를 대하며 인생의 순간을 함께 하면서 오랫동안 기억되는 증거를 남기라는 메시지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사귀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부담 없이 한 잔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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