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버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평점 :
미나토 가나에, 김선영 역, [리버스], 비채, 2016.
Minato Kanae, [REVERSE], 2015.
중의적이거나 다중적인 의미를 가진 글은 확실히 매력이 있지만, 때로는 복잡한 일상을 떠나 머리를 식힌다는 기분으로 하는 독서에서 또 다른 신경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아 오히려 명확한 글을 좋아한다. 문학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열린 결말보다는 짜임새 있는 끝맺음을 좋아하고... 기왕이면 평면적인 사건의 나열보다는 등장하는 인물의 사소한 심리라도 잘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본의 작가를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미나토 가나에를 말한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는데, 마치 깜짝 쇼를 벌인 것처럼 그녀의 방한과 함께 신작 소설 [리버스]의 출간은 열성 있는 팬심을 발휘하게 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p.9)
지금까지 나온 그녀의 작품은 모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특히 여성의 심리묘사는 단연 최고라는 생각인데, 이번에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일인칭 화자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성에 버금가는 남성의 시기와 질투, 원망과 복수, 숨겨진 사연과 진실... 등은 이전의 작품하고 비슷하면서도 확실히 다른 개성을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중에 여자 친구에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는 3년 전에 있었던 사건의 기억을 되살린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모르는 일인데,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부 상상할 수 있더라고. 좋은 인생이나 나쁜 인생이라는 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해주는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아버지처럼 진정한 교사로, 온 힘을 다해 누군가의 인생의 순간을 함께 하면서 내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p.20)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랫동안 기억해 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을 마감한 후에도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대학교 시절에 만난 한 친구를 제외하고는, 딱히 특별한 관계라는 것이 없이 단지 커피를 내리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중, 고교 시절에는 따돌림을 당하며, 그 시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빨리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기를 희망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호흡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서서히 낯빛을 잃어가는 자신을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도 있었다. 이것은 아무 예고 없이 튀어나온 말이 아니다. 처음부터 여기로 갈무리되도록 짜여 있었던 것이다.
친구, 동창회, 팝송, 비, 커피, 벌꿀...(p.55)
여자 친구에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로 그는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대학에 들어가 알게 된 단짝 친구 히로사와 요시키는 4학년 여름 세미나 수업을 듣는 친구들과 떠난 마다라오카 고원으로의 여행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직접적인 책임과 무관하다고 여겼지만, 여자친구의 반응은 냉담하다. 그런데 그날 여행을 떠난 다른 세 명의 친구에게도 같은 편지가 배달되었다고 한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편지를 보낸 것일까? 진상을 밝히기 위해 죽은 친구의 삶을 하나하나 되살피며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말도 이해가 가. 하지만 나는...... 투명하다고 생각했어. 투명한 히로사와는 선명한 색도, 어두운 색도 수용해주니까, 나하고 같은 색이라고 착각하는 거라고. 달리 사귀는 사람이 없는 한 고백만 하면 아무한테나 좋다고 말해줄 사람 같았어. 그렇게 상대의 색에 맞춰가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면 나처럼 고집 세고 미움만 사는 사람하고 같은 색이 되면 안 되잖아. 그래서 반이 달라진 뒤로는 문자 메시지도 전화도 끊었어."(p.227)
고향에서 가져온 벌꿀을 커피에 넣어 마시며 단짝이라고 여겼지만, 솔직히 죽은 친구에 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아니 대학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서는 전혀 모르던 모습을 보았고, 갈수록 그와 정말로 단짝이었을까? 라는 의심이 생긴다. 히로사와 요시키는 누구인가? 고향 집을 찾아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그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 그럴수록 이제까지 알지 못 했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투명한 색의 사람...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과 그를 친구로 여긴 투명한 사람의 이야기는 이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친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나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주인공처럼 그냥 평범했다. 지금도 무슨 패션처럼 투명함을 동경하고 있는데, 갈수록 나의 색은 짙어만 간다. 작가는 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죽은 친구의 삶을 되짚어가는 소설을 썼을까? 무엇이든지 온 힘을 다해 누군가를 대하며 인생의 순간을 함께 하면서 오랫동안 기억되는 증거를 남기라는 메시지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사귀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부담 없이 한 잔의 커피를 즐길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