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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ㅣ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평점 :
야쿠마루 가쿠, 박춘상 역, [악당], 황금가지, 2016.
Yakumaru Gaku, [AKUTOU], 2009.
국내에 소개된 일본소설, 특히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 순서는 다르더라도 대부분은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으로부터 미야베 미유키라는 이름을 거치게 된다. 그러면서 본격과 사회파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는데... 말 그대로 추리의 과정에서 누가? 어떻게? 에 초점을 맞추어 진실을 찾아가는 것을 본격이라고 하고, 왜? 의 문제에 중점을 두어 사회문제나 현상을 다루는 것을 사회파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나는 본격보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더 좋아한다.
프롤로그, 악당, 복수, 유품, 맹목, 통곡, 귀향, 임종, 에필로그
우리에게 [천사의 나이프](황금가지, 2009.)로 잘 알려진 야쿠마루 가쿠의 신작 [악당]을 읽었다. 전작은 일본에서 미성년자의 범죄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는데... 아직 인생을 제대로 펼치지 않았기에 언론의 보도를 자제하고 처벌의 수위를 낮춰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보호파의 견해와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해도 갈수록 흉악해지는 사건에서 파렴치한 행위는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엄벌파의 주장... 이 둘의 날카로운 의견 대립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악당]도 비슷한 맥락인데, 이번에는 7개의 단편으로 다각적인 관점에서 성인이 되기 이전의 범죄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그 남자를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면 그 근거를 찾아봐 줬으면 합니다."(p.22)
'범죄 피해를 당한 분께. 가해자의 근황을 알아봐 드립니다.'(p.50)
일인칭 화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사에키 슈이치는 전직 경찰로 지금은 호프 탐정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창 시절에 누나가 살해당한 범죄 피해자 가족으로 그때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태이다. 당시의 범인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고 처벌의 수위도 낮았다. 그래서 그는 틈틈이 가해자의 뒤를 밟고 있다.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품고...
예순을 바라보는 초로의 부부는 11년 전에 외동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의 근황을 알고 싶어 한다. 젊은 청년은 16년 전에 영아인 남동생을 방치하여 살해한 생모를 찾고 있고, 임종을 앞둔 어머니는 강도 살인을 저지르고 떠난 아들을 만나기 원한다. 돈을 가지고 사라진 남동생의 예전 남자친구를 찾는 오빠가 있고, 12년 전의 사건에서 변호를 맡은 피고인이 현재 갱생의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변호사가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범죄로 희생된 피해자의 가족이 법률적으로 죗값을 치렀다고 하지만, 단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가벼운 형을 살고 나온 가해자의 삶을 조사 의뢰하고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일을 이렇게 만든 이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를 용서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갱생하고 속죄의 삶을 살고 있으면 다행이나 여전히 범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반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 의뢰인들은 나름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증오의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범죄자를 향한 증오. 사람을 망가뜨리고서 태연한 얼굴로 살아가는 인간을 향한 증오.
증오는 이윽고 격렬한 불꽃이 되어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누군가가 어느 지점에서 이 연쇄를 끊어내지 못하는 한, 걷잡을 수 없는 화염으로 번져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린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증오의 불꽃을 끌 수 있을까?(p.57-58)
"사건을 벌인 장본인은 담장 안에 들어가 보호를 받아요. 튼튼한 벽이 피해자 유족의 증오와 세상의 규탄을 막아 줘요. 하지만 우리는 그 증오와 규탄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어요. 그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무일푼이 됐고, 남들의 이목을 피하듯 도망쳐 다녔어요. 전 대학을 그만뒀고, 동생이 살인자라는 이유 때문에 연애하는 것조차 두려워요. 모든 가능성이 닫혀 버렸단 말이에요. 그런 동생을 위해서 제가 더 무얼 희생하라는 건가요?"(p.105)
"하지만 딸을 잃은 뒤 그 신념도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난 그동안 올바른 일을 해왔다......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그 사건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그 신념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변호인은 피고인의 죄를 최대한 덜고자 온갖 주장을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저도 당연히 그리 해왔으니까요. 다만 피해자의 입장에 서니 그 모든 주장이 불합리하게 여겨지더군요. 왜 그런 인간의 손을 잡는 거냐. 어째서 살해된 딸의 입장을 더 고려해주지 않는 거냐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는 도저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재판을 방청하면서 머릿속으로 과거의 재판과 대조해 가며 범인한테 어떤 형이 내려질지 상상하고 있더군요. 아무 무거운 벌은 내려지지 않겠지요. 몇 년 뒤에는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전 지금까지 피고인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 줄 생각만 해왔습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하나...... 외동딸을 죽인 죗값이 이렇게 가볍다니, 소중한 사람의 목숨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라니...... 당사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합리함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p.172)
"그놈들이 형무소에서 나와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과거의 죄를 용서할 수 있나? 누님의 무덤이나 네 앞에서 울며불며 용서를 구한다면 넌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악당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용서라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걸 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아. 악당은 자신이 빼앗은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기어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마는 인간, 그게 바로 악당이라는 거다."(p.242-243)
희생자의 유가족은 오늘도 증오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걸어서라도 가해자의 삶을 파괴하기 원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또 다른 증오를 가져오지만... 이 고리를 끊기란 쉽지 않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에 나오는 가해자는 모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형을 살고 나와서 착실하게 살았다면, 피해자는 더 쉽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직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살고 있다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희생자의 유가족과 함께 가해자의 남은 가족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범죄를 저지르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법의 보호를 받는다면, 남은 가족이 표적이 되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피해자 보상을 해주어야 하고, 세상의 이목을 피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의 악인으로 인하여 주변의 모두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자신이 빼앗은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악당! 가해자의 나이를 기준으로 우리의 사회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