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드네의 탄환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가이도 다케루, 권일영 역, [아리아드네의 탄환], 예담, 2016.

Kaidou Takeru, [ARIADNE NO DANKAN], 2010.

  일본소설을 읽다 보면, 남이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분야에서 자기만의 색채로 글을 쓰는 작가가 많다는 생각이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메디컬 엔터테인먼트라는 수식어가 붙은 가이도 다케루이다. 단순히 오락적인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의료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루면서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전의 작품...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예담, 2007.)에서는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수술 시스템의 문제와 현장에 있는 의료인의 고뇌를 말하고,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은행나무, 2008.)에서는 지역 산과 체계의 모순과 출산의 붕괴를 지적하며, [나니와 몬스터[(비채, 2013.)에서는 후생노동성의 의료 정책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외과의였다는 그의 이력이 글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느낌이다.

  뇌혈관이 터진 원인이 혈관이 막히는 경색 때문이라면 사망 원인이 사망자 내부에 있다는 내인사(內因死), 즉 병사(病死)로 처리된다. 만약 외부에서 물리적인 힘이 작용했다면 외인사(外因死)가 된다. 이런 종류의 사인을 '의학 사인'이라고 한다.

  외인사일 때는 더 자세하게 구분한다. 자연스러운 타박상이라면 사고다. 하지만 자연 발생적이지 않을 때, 예를 들어 총탄에 맞아 혈관이 파괴되었다면 그 총을 발사한 인물을 밝혀내야 할 필요가 있다. 방아쇠를 스스로 당겼다면 사고이거나 자살이다. 다른 사람이 쏘았다면 살인. 이런 종류의 사인을 '수사 사인'이라고 부른다.

  사인 규명에는 두 단계가 있으며 단계마다 담당자가 달라진다.

  의학 사인은 의사가 판정하고 수사 사인은 경찰관이 판정한다. 수사 사인일 때는 부검이 필수적인데, 요즘 세상에는 부검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다행이다.(p.14)

  얼마 전, 우리는 하나의 죽임을 두고 내인사와 외인사의 첨예한 의견 대립을 목격했다. 분명히 외부에서 물리적인 힘이 가해졌는데, 이를 무시하고 병사를 주장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펼쳐졌다. 사망의 원인은 의학 사인과 수사 사인으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의사가 판정하고 후자는 경찰관이 판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수사 지식이 부족한 의사와 의학 지식이 부족한 경찰관이다. 부검하지 않는 임상의와 의학을 모르는 말단 수사관이 현장에서 부검 여부를 판단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일본은 연간 사망자가 백만 명이 넘는다. 여기서는 계산하기 편하게 백 명이라고 가정하자. 이 가운데 85명은 병원에서 죽고, 그 시신 가운데 2구가 해부된다. 나머지 15구의 시신은 경찰이 관계하는데 그 가운데 단 1구만 해부한다. 이렇게 부검한 시신 3구를 뺀 나머지 97구는 겉모습만 살핀 뒤 대충 사인을 정한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일본은 의학 발전이 더디고 의료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며 범죄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연간 백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확실하지 않은 사인을 판정받고 황천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인 불명 사회'의 실상이다.(p.15)

  소설 [아리아드네의 탄환]은 '사인 불명 사회'라는 부조리와 어두운 그늘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일인 사회이고, 고령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사와 사고사를 제외하고서라도 고독사와 범죄의 희생 등으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죽임이 예상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고 있다. 저자는 부검 없는 사인 판정으로 의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범죄를 밝히지 못하고 떠나는 불확실성을 우려한다. 대안으로 사후 화상 진단(Ai, Autopsy imaging) 시스템의 도입을 제안하는데, 문제는 사법기관과 의료기관의 주도권 다툼이다.

  Ai 추진파의 선봉에 선 그들은 'Ai는 의료 현장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Ai센터를 지역 단위로 설치하여 의료가 사인 규명 책임을 지고 자율적으로 사인을 공표하는 거점으로 삼자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면 Ai센터라는 존재가 법의 집행을 맡은 경찰을 비롯한 사법기관을 감사하여 폭주를 막을 수 있다. Ai를 수사 영역에 두면 '수사에 대한 감사 기능'이라는 Ai가 지닌 획기적인 특성을 잃고 만다.(p.16)

  Ai라는 말이 나오자 모친은 순간 경계했지만 검사 내용을 설명하고 시신에 손상이 없다는 말을 듣더니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애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요. 하지만 몸에 칼을 대는 건 너무 끔찍해서......"(p33-34)

  "아뇨. 부검한다고 해서 모든 사인을 밝혀낼 수 있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부검으로 사인을 밝혀내는 경우는 네 사람 가운데 세 명. 75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

  "그러면 Ai로는 사인을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죠?"

  "CT로 30퍼센트, MRI가 60퍼센트입니다."

  ...

  "분명히 Ai는 해부보다 사인 판명 확률이 낮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진단 과정을 설명할 수 있고, Ai를 한 뒤에 부검을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인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외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죠. 시신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이만큼은 알아내 유족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겁니다."(p.36)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인 불명으로 자식의 죽임을 맞이한다면, 부모는 원인을 알기 위해 몸에 칼을 대는 해부를 쉽게 결정할 수 있을까? 뚜렷한 범죄의 징후가 없는 한 대부분은 그대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그런데 Ai를 통해서 신체의 훼손 없이 어느 정도의 사인을 밝혀낼 수 있다고 하니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해부보다 판명 확률은 낮지만, 진단 과정을 듣고 다음에 다시 부검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최소한 과로사인 뇌출혈이나 심근경색의 여부는 확실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도조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신경내과 다구치 고헤이는 부정수소외래 주임으로 진료를 한다. 그는 리스크 매니지먼트 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병원장의 꾐에 넘어가 마음이 없는 Ai센터 센터장을 맡게 된다. 병원 내에서 화상진단을 하는 방사선과와 부검을 하는 법의학과 사이에 상충한 충돌로 중립선상에 있는 그가 보직을 얻게 된 것이다. 뜻하지 않게 단숨에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 형국, 조무래기 센터장을 가운데 두고 거물급 부센터장이 모여 회의를 시작한다.

  '화상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해부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사이 교수와 'Ai가 반드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시마즈가 정면으로 충돌해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p.122)

  그렇다. 의료와 사법의 논리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기본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라는 광산에 랜턴 하나만 들고 들어가 부상자를 데리고 돌아와야 하는 의료인과 이미 일어난 사건을 검증하여 논리의 벽돌로 메워야 하는 사법기관은 사물에 대한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르다.

  예를 들어 의료 현장에서는 Ai를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유추하여 사인을 밝힌다. 하지만 해부 현장에서는 어차피 나중에 가장 효과적인 해부를 할 생각으로 화상을 대충 본다. 그리고 재판에서 일반 시민에게 자극이 덜한 화상을 제공할 목적이기 때문에 진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말하자면 Ai를 사바세계의 어둠을 밝힐 한 줄기 빛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경찰이나 사법기관을 위해 시민 극장에 공급하는 영화로 여기느냐에 따라 진단에 대한 성실도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다.(p.124)

  "사인 관련 정보는 수사 정보이기도 합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도 법의학과 관련하여 얻어진 화상이 Ai센터에서 진단 자료로 쓰이는 건 매우 곤란해요."

  법의학교실 사사이 교수가 늘 하는 주장을 다시 내세우자 시마즈가 바로 반박했다.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죠. 애당초 수사 정보를 자꾸 숨기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사람까지 생기는 겁니다. Ai 진단은 의료 현장의 최종 지점에서 실시해야 합니다. 의료 종사자가 진단하면 되죠. 사인은 숨겨야 할 정보가 아닙니다."(p.155)

  "현재 상태로는 수사 현장의 편의주의 때문에 중요한 사인 정보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말죠. 의료 현장의 마지막 지점에 Ai를 두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수사 현장의 기동성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요. Ai는 해부와 달리 결과가 빨리 나오니까요."(p.156)

  "Ai에서 사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책임을 지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공식 답변입니다. Ai 원칙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 적용 원칙을 말씀드리죠. 1. Ai는 의료 현장의 마지막 지점에서 의료 시술자가 진단하고 비용은 의료비 이외의 예산에서 지불한다. 2. Ai의 진단 한계를 인지시켜 사인을 확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해부를 권장한다. 3. Ai는 해부가 아니라 체표검사와 비교한다. 이상이 세 가지 원칙입니다."(p.157)

  "법의학자는 화상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방사선과 의사가 작업하게 됩니다. 하지만 비용이 제대로 지불되지 않기 때문에 방사선과 의사들은 심정적으로 Ai 진단 분야에서 철수하고 말 겁니다. 그래서 결국 진단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겠죠... 애써 새롭고 획기적인 Ai란 시스템을 만들어도 쓰는 사람이 옛날 그대로라면 세상은 변하지 않아요. 발상을 바꾸면 훌륭한 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을 만들면 사인을 유족에게 직접 전달할 새로운 구조를 만들 수 있죠. 일본 방사선학회, 일본 방사선 기사학회도 Ai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니 그 분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죠."(p.158)

  Ai 시스템의 도입 운용을 놓고 사법기관과 의료기관의 대립은 팽팽하다. 먼저 경찰 측과 법의학과에서는 판명 확률이 해부보다 낮아 Ai는 보조수단에 불과하고, 사인 관련 정보는 수사 정보라서 비밀 유지를 해야 하므로 사법기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료기관에서는 어차피 화상을 읽고 판독하는 것은 법의학자가 아니라 방사선과 의사가 하는 일이기에 Ai는 의료 현장에 두어야 한다고 맞받아친다. 검사 비용이라는 실질적인 이권과 양쪽 기관 종사자의 자존심을 건 싸움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과연 이런 화상만 보고 있어도 뒤엉킨 수수께끼가 풀리겠어요?"

  시라토리는 화상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런 약한 소리를 하는 다구치 선생이 문제죠. 잘 들어요. 이런 탄환이야말로 수수께끼의 미궁을 깨뜨릴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이에요. 하지만 그 가느다란 실은 수수께끼를 푼다는 강한 의지가 없으면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 크레타 섬의 미궁에 사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려던 용사 테세우스를 도운 공주 아리아드네. 그녀의 붉은 실이 테세우스를 미궁에서 구해냈다. 드물게 시적으로 들리는 시라토리의 말을 듣고 나는 막판까지 몰렸다는 느낌이 들었다.(p.303)

  세로형 MRI 콜럼버스 달걀 앞에서 들려온 총성, 뇌물수수와 경찰 살해 혐의로 병원장의 신변은 구속되고, 경찰은 72시간 후에 압수수색을 예정한다. 각종 언론과 매스컴의 보도로 치명타를 날릴 음모... 다구치는 다급히 리스크 매니지먼트 위원회를 개최한다. 후생노동성 기술관 시라토리 게이스케의 대활약, 조각을 모아 큰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주 흥미롭다.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사법기관과 의료기관의 대립은 결국 몇몇 경찰관의 음모를 의사와 관련 공무원이 파해처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끝맺는다. Ai 시스템 운용의 당위성, 다구치 고헤이와 시라토리 게이스케의 콤비 활약... 작가는 이번에도 대학병원을 무대로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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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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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발다치, 황소연 역,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북로드, 2016.

David Baldacci, [MEMORY MAN], 2015.

  스릴러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영웅적인 주인공, 특별한 악당, 계산된 플롯, 본성의 탐구, 사회적인 메시지, 눈속임과 반전... 그리고 인간의 성장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이 높아진 것일까? 만족할 만큼 모든 요소를 고루 갖춘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인 성향으로 지나치게 서술 위주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하고, 순문학과의 경계에서 적절한 긴장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데이비드 발다치의 소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그동안의 것을 무색하게 하는 정통 스릴러로, 우리에게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작품하고 다르게 어떤 신화나 서사를 차용하지 않고 오로지 머릿속에 모든 것을 저장하는 남자를 내세워 가족의 살인과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진득하게 그리고 있다.

  에이머스 데커는 그들 세 사람의 처참한 죽음을 언제까지고 아득한 푸른빛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 기억은 푸른 칼날이 되어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를 사정없이 찔러댈 것이다. 그는 그 기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p.5)

  그는 방금 관찰한 거리의 풍경을 몰아내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은 안구 안쪽에 설치된 영화 스크린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그 풍경은 영원히 거기 있을 것이다. 본 것을 잊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가 보는 모든 것은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머릿속에 하나하나 기록되어 필요에 의해 불려나오기도 하고 스스로 툭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전자는 유용하지만 후자는 늘 성가시다.(p.15)

  한번 본 것은 무엇이든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면, 시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누구나 부러워할 능력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기억을 지우지 못해 피로하다. 언제 어디서나 입력한 정보를 손쉽게 꺼내 볼 수 있지만, 좋지 않은 기억도... 가령 아내와 딸이 처참한 죽임으로 발견된 순간은 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40대 초반의 전직 경찰, 195cm의 거구에 과체중인 남자, 20년 전 프로미식축구 선수로 데뷔하던 날의 사고, 두 번의 심정지 후에 생긴 과잉기억증후군과 공감각자... 에이머스 데커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경찰이 되어 뛰어난 기억 능력으로 한때는 벌링턴 경찰서에서 가장 높은 검거율을 경신했지만, 아내와 딸을 잃은 사건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수사는 미궁에 빠진다. 일을 그만두고 공원의 노숙자로 전락했다가 마음을 다잡고 사립탐정이 되어 심부름하며 하루를 산다.

  "어떻게 잡은 거야?"

  "쉬웠어. 오늘 새벽 2시에 놈이 경찰서로 들어와서 자수했거든. 이렇게 쉽게 검거한 건 처음이지 뭐야. 방금 놈을 면담하고 왔어."

  데커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거의 16개월이나 지난 이 시점에 놈이 제 발로 와서 내가 세 명을 죽였소 하고 자백했다고?"(p.34)

  "맨스필드에서 사용된 탄환을 분석했는데."

  "그게 뭐......"

  그녀가 끼어들어 말했다. "일치하는 게 나왔어."

  그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일치? 뭐랑 일치하는데?"

  "네 아내를 죽인 총."(p.151)

  후천적으로 생긴 능력의 후유증은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딸을 낳음으로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지금은 희망도 의욕도 없다. 하지만 16개월이 지난 후에 누군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하면서 자수를 한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고, 유죄를 주장하며 죽기를 자청하는 남자... 이제 인생의 목표와 삶의 의미가 다시 생긴다.

  맨스필드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 9명이 희생된다... 자기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개인적인 감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용의자...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기억이 없다... 소설은 에이머스 데커를 중심으로 두 개의 사건, 그의 가족 살인과 맨스필드 총기 난사 사건을 추적하는데... 탄환 분석 결과 같은 총기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다. 둘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수개월 뒤 시카고 외곽의 연구소에서 오랜 기간 입원하고 나서 그는 과잉기억 장애와 공감각 증상을 가진 후천성 서번트증후군으로 공식 진단을 받았다. 부상은 그의 선수 생활을 끝장낸 대신 그를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두뇌의 소유자 중 하나로 만들어놓았다.(p.182)

  진짜로 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자문해봐, 형제여, 너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이 야기되었는지. 이제 끝내야지. 바로잡으라고. 그때 그랬어야 했어. 용기를 내. 겁쟁이처럼 굴지 마, 형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안 그러면 다음번엔 진짜 피를 보게 될 거야. 마지막 기회야.(p.366)

  뒤를 쫓으며 단서를 찾아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범인은 이것을 조롱하며 그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그의 머릿속 기억의 세계에 펼쳐진 수많은 파편의 조각을 모아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왜 나를 타깃으로 삼았을까? 어떤 원한이 있기에? 내가 모욕을 준 사람은 누구? 결국, 범인이 원하는 것은 나인가? 끝없는 두뇌의 회전으로 사건을 재구성해보지만, 답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면서 주변의 인물이 하나둘 살해되고, 또 다른 메시지가 전해진다.

  수수께끼를 풀고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무엇보다 논리적인 완성도를 보이는데, 작가의 치밀함과 세심함이 글 속에서 묻어난다. 데이터를 저장할 수는 있어도 삭제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의 고뇌, 서서히 조여오는 심리적 압박은 진정한 스릴러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사건의 연속성... 그리고 비만 인구, 지역경제 불황, 학교 총기 난사와 같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사건의 해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암시를 통해서 앞으로 나올 에이머스 데커의 이야기에 더 큰 기대를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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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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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드 비강, 이세진 역, [길 위의 소녀], 비채, 2016.

Delphine De Vigan, [NO ET MOI], 2007.

프랑스 서점대상

  며칠 전, 2016년 노벨문학상으로 미국의 밥 딜런(Bob Dylan)이 선정되었다. 세계의 저명한 작가를 뒤로하고 이례적으로 대중가수가 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부른 노래의 노랫말을 작시로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고정관념을 깼다는 평가와 가사가 문학이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나는 유수의 문학상보다 서점대상을 더 좋아한다. 권위 있는 작가나 평론가, 대학교수가 아닌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의 투표로 이루어지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서점 직원이 직접 읽어보고 고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내가 서점 주인이라면 팔고 싶은 책... 을 대상으로 하기에 대부분 재미를 보장한다. 주로 문학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품이 선정되고,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일본의 서점대상은 익숙하지만, 프랑스의 서점대상은 델핀 드 비강의 소설 [길 위의 소녀]가 처음이다.

  "저는 노숙하는 여자아이의 여정을 따라가보려고 해요. 그 아이의 삶...... 결국, 그 아이의 이야기를요. 저는...... 그 여자아이가 어떻게 해서 거리에 나앉게 되었는지 말하고 싶어요."(p.9)

  그렇지만 어제 나는 그곳에 그 애와 함께 있었다. 확신하건대, 하나의 원이 우리 둘을 한데 둘러쌌다. 나는 바깥으로 내치지 않는 원, 그 애와 나를 하나로 감싸는 원, 고작 몇 분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원.(p.17)

  십삼 세 소녀 루 베르티냐크는 IQ 160의 천재이다.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무엇이든 기억하여 또래보다 두 학년을 월반, 고1의 교실 수업에 들어간다. 왼손잡이이고... 이러한 조건은, 누구나 장밋빛 미래를 연상하며 그녀의 재능을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성적은 일등이지만, 남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앞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린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생각을 멈추지 못해서 머릿속은 복잡하고 불면증에 시달린다. 마랭 선생님이 발표 주제를 물었을 때, 그냥 입으로 내뱉은 말이 '노숙자'이다.

  오스테를리츠 역에서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는데, 노가 다가왔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누가 봐도 길에서 사는 여자이다. 짧은 대화였지만, 루는 거부감보다 다른 감정을 느낀다. 하나의 원 안에 있는 느낌, 동떨어지고 어긋나지 않은 기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이상하게 다 할 수 있었다. 루는 노를 인터뷰하기로 한다.

  "통계적으로 추산되는 바로는, 고정 거주지가 없는 이삼십만 명 가운데 여성이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이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답니다. 16~18세 노숙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70퍼센트에 달하고요."(p.34)

  여자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애는 분명히 못 박는다. 그 여자들은 거지가 아니야, 머리가 돈 것도 아니고. 노는 말한다. 루, 발표할 때 그 점을 확실히 해줘. 평범한 보통 여자들이었지만 직장을 잃거나 집에서 도망쳐나온 거야. 집에서 쫓겨났거나 맞고 사는 여자들 있잖아. 그런 여자들은 쉼터에서 지내거나 자기 차를 집 삼아 살지. 사람들이 보지도 않고 지나치니 그런 사정을 알 리도 없지만, 정말 형편없는 데서 자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사랑의 식당'이 문을 열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가족에게 밥 한 술이라도 먹이겠다고 매일같이 줄 서는 여자들.(p.71)

  한때, 일본은 장기간의 불황과 치솟는 물가로 일하고 있어도 집세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캡슐 호텔이나 24시간 PC 카페를 전전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공원에서 노숙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로 대량실업과 신용불량을 양산하여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다. 실직과 빈곤의 이면에는 개인의 성장 배경, 저학력, 저임금, 불안정한 가정, 부동산 가격 상승,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의 문제가 맞물려 있다.

  화장하고, 쇼핑하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파티하고, 내일은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여자애들의 평범한 일상은 그들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루는 지적조숙아로 특별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고, 노는 하룻밤 잠자리를 위해 떠돌며 무기력한 생활을 한다. 평범하다고 여기는 것이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순간이다. 한쪽은 과한 것이 말썽이고, 다른 한쪽은 결핍된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를 그토록 필요로 했나 보다. 소설은 이러한 대비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프랑스 사회의 여자 노숙자 문제는 극명해진다.

  맞은편 카페 아줌마가 물루 아저씨의 개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개는 거두어도 노숙자는 자기 집에 들이지 않는다. 나는 우리 모두가 한 집에 한 사람씩만 노숙자를 맞아들인다면, 한 사람이 한 명만 맡아서 돌보기로 결심한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명만 도와주고 함께해준다면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사정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다. '사물은 존재하는 바로 그대로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그렇다, 어른이 되려면 분명히 그런 걸 받아들여야 한다.(p.92-93)

  시도도 못 해볼 이유가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겁내고, 왜 더 싸워보지도 않는가?(p.126)

  우리 속담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라는 게 있고, 흔히 "네 발 달린 짐승은 거둬도 두 발 달린 짐승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노숙자가 키우던 개는 거둬도 노숙자는 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프랑스의 현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듯싶다. 세상에서 제일 머리가 좋은 축에 속하는 루에게도 이것은 답 없는 문제이다.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고,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녀는 단순하면서 명쾌한 답을 시도한다. 노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자!

  누군가는, 머리는 좋아도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의 순진한 결정이라고 조롱할지 모르지만, 문득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열린책들, 2015.)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 어쩌면 어린이는 이미 인생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은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을 십 대 초반의 소녀는 겁내지 않는다. 작가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해야 한다!

  그 애를 보고 있으면 꼭 아주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 같다. 사막을 가로질러, 대양을 건너, 벗은 발로 산길을 걷고, 국도를 따라 수십 킬로미터를 지나온 사람 같다. 그 애는 머나먼 곳에서 돌아온 것이다.

  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토에서, 하지만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돌아왔다.(p.140)

  "하지만 너 역시 네 삶을 살고 있잖아. 너도 알잖아, 내가 널 필요로 한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너는...... 너도 내 가족이란 말이야......"

  "루, 나는 네 가족이 아니야. 바로 그걸 네가 이해해야 해. 난 절대로 너와 가족이 될 수 없어."(p.207)

  노는 지난주까지 먹기 위해, 빨래하기 위해, 하룻밤 잠자리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를 다녀야 했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아무런 계획이나 미래의 전망 없이 거리를 헤매고 방황했다. 이제는 루와 함께 있을 수 있고, 깨끗한 잠자리가 있고, 영양 있는 식사가 있다. 마치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에 일상으로 적응하는 것처럼 조금씩 회복된다. 결국, 누군가를 돕는 일은 나를 돕는 것이고, 누군가를 살리는 일은 내 영혼을 살리는 것일까? 어느 현자의 말처럼 우울증과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있었던 루의 가정도 그녀와 동거를 하며 서서히 회복된다. 개인적으로 밝은 이야기를 읽고 싶었나 보다. 이대로 모든 것이 술술 풀리기를 기대했지만, 갈등 없는 소설은 없다.

  혈혈단신으로 세상에 버려진 아이, 길 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던 소녀에게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삶... 집과 먹을 것이 해결되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풀릴 줄 알았던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좀처럼 단순하지 않다.

  노는 쉼터에 가기 싫어해요. 쉼터는 지저분하고, 오전 8시면 모두 밖으로 내쫓는단 말이에요. 개인 물건을 털리지 않기 위해 한쪽 눈만 감고 자야 할 지경이라고요. 노도 자기 물건을 둘 곳, 자기가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쉼터에는 자기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노는 자신을 돌보려 하지 않아요. 쉼터에서 나가면 그 애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노는 이제 아무것도 안 믿으니까요. 그 애는 완전히 혼자니까요. 나는 울면서 계속 말한다. 아무 말이나 막 한다. 어차피 아빠 엄마는 상관 안 하잖아요. 나에 대해서 그렇듯이 노에 대해서도요, 우린 내놓은 애들이잖아요, 아빠 엄마가 포기했잖아요, 아빠 엄마는 그냥 바탕을 유지하는 선에서 균열만 때워보려고 애쓰죠, 하지만 난 아니에요, 나는요, 포기하지 않아요, 난 싸울 거예요.(p.275)

  "베르티냐크 양?"

  "네?"

  "포기하지 마요."(p.299)

  누군가 버팀목이 필요한 세상이다. 루가 사는 집은 마음의 병을 앓는 엄마와 고약한 사춘기를 보내는 딸로 인해 위기였다. 이때 아빠는 낮에는 일하고 돌아와 저녁에는 성실히 아내와 딸을 돌본다. 짜증 내는 법 없이, 희망을 잃지 않고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특별한 감정을 가진 친구 뤼카의 집은 아버지는 외국으로 떠나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산다. 아버지는 수시로 편지와 수표를 보내고, 어머니는 가끔 들려 필요한 것을 챙기고 가정부를 보내준다. 가족이 해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살 집과 충분한 돈이 있다. 부모는 나름의 버팀목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노에게는 이러한 버팀목이 없었다. 사랑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나고 자라 버려졌다. 가족의 울타리와 사회의 안전망은 그녀에게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루는 노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녀들 숨기고, 돌보는... 하지만 어린 소녀가 버티기에는 만만치 않은 세상이다.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같이 집을 나갔을 때, 루는 여전히 되돌아갈 집과 버팀목이 있지만, 노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그녀가 혼자 떠나야 할 이유였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도무지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위험의 순간에 버팀목이 있는 이들은 일상을 유지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일상으로 되돌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누군가가 필요한 세상이다.

  프랑스 문학에 관한 기대감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잃지 않고 유지된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인식했던 노숙자의 문제와 우리의 사회 구조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였다. 성장이라는 주제와 수려한 문장은 문학성과 대중성의 경계에서 짜릿한 재미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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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할아버지 2
네코마키 지음, 오경화 옮김 / 미우(대원씨아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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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마키(ms-work), 오경화 역, [고양이와 할아버지②], 미우, 2016.

  첫 번째 [고양이와 할아버지​①](미우, 2016.)로부터 일 년이 지나고, 두 번째 고양이와 함께 사는 마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일상은 또다시 분홍색 벚꽃으로 물들고, 여기저기에서 고양이는 모습을 드러낸다. 전작하고 비교해서 좀 더 확장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전에는 제목 그대로 나이 든 고양이 타마와 은퇴하고 할머니와 사별한 다이키치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이번에는 생전의 할머니를 포함하여 주변인들이 동참하는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가끔 인터넷 지도에서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곳을 찾아 로드뷰 해본다. 공을 차면서 놀았던 집 앞의 대로는 인제 보니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가는 공간이다. 학교에 다니며 걸었던 거리는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변해 있고... 그런데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반세기 이상을 같이 보냈다면 어떤 기분일까? 집마다 속속들이 숟가락 숫자까지 꿰고 있는 절친한 관계일 것이다. 행복은 이런 게 아닐까? 매년 그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마을의 카페에는 어릴 적 친구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그대로 모여 있다. 전쟁 이후에 그들이 경험한 격동의 세월은 함박웃음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나고, 곁에는 늘 고양이가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양이가 사는 마을이다.

  요시에 할머니(향년 71세)

  다이키치 할아버지의 부인.

  커피와 고양이를 무척 좋아한다.(p.7)

  상자에 들어가기 좋아하고, 이리 뒤뚱 저리 뒤뚱대는 고양이... 밥때가 되어 할아버지 주위를 맴돌고, 여름에는 시원한 곳을 찾아 늘어지는...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찾아 집안 곳곳을 뒤지고, 며칠을 사라졌다가 엉뚱한 것을 물고 나타나는 녀석... 고양이의 습성이 잘 드러나 있다.

 

 

 

 

 

  봄... 오늘도 타마는 다이키치 할아버지를 따라다닌다. 대청마루에 같이 누워 낮잠을 자고, 할머니의 레시피를 찾아 요리하는 할아버지를 가만히 지켜본다. 잔소리하는 아들, 휴대전화를 챙기기보다는 고양이와 노느라 정신없는 할아버지...

  여름... 친구 이와오 할아버지와 열다섯 살 때의 기억, 그 시절 동네 꼬마들은 고양이 아줌마댁에 모여 TV를 보곤 했다. 아줌마가 만들어준 다라야키를 먹으며 왁자지껄했지만, 이제는 집 앞이 고요하다. 마을에 떠도는 귀신의 소문,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비행기가 떨어진 사건은 가물가물하다. 할머니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와 고양이...

  가을... 연례행사로 은행 줍기에 나서고...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리던 해, 떨리는 마음으로 청혼하는 순간에도 고양이는 있었다. 할아버지의 마음하고 다르게 느릿느릿한 고양이... 별일이 아닌 것을 가지고 호들갑이다.

  겨울... 데워진 난로에 네모 떡을 구우며 옛 생각을 하고... 할아버지는 머리숱이 없지만, 습관적으로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다듬는다. 나이 든 고양이와 노인이 한집에 산다는 것은 언젠가 다가올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추운 날인데도 할아버지는 집 나간 고양이를 위해 출입문을 조금 열어둔다.

  이번에도 사계절의 구성으로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고양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고양이와 보내는 유쾌한 오늘과 오래된 친구와 나누는 애잔한 과거의 기억은 재미와 감동을 주고...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고양이와 할아버지의 일상은, 미래적이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와 고양이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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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할아버지 1
네코마키 지음, 오경화 옮김 / 미우(대원씨아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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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마키(ms-work), 오경화 역, [고양이와 할아버지①], 미우, 2016.

  모든 생명이 그렇지만, 고양이는 참 신비롭다. 묘한 표정으로부터 사람하고 밀고 당기는듯한 알 수 없는 성격까지, 한없이 귀엽다가 어느 순간 까칠하게 돌변하기도 하고... 일본의 시골은 고양이가 잘 어울린다. 바닷가 근처에서 떼를 지어 있다가 어선이 들어오면 떨어진 물고기를 받아먹으려고 몰려드는 모습은 우리하고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고양이로부터 간택을 받지 않아 집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고양이 만화를 선물로 받았는데, 책의 제목처럼 나이가 들면 고양이와 동거를 하게 될까?

  네코마키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부부로, 공동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고 한다. 얼마 전 [콩고양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사각사각 연필로 그린 그림은 따뜻하고 정감 어린 느낌이다. 이전의 시리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삼색 털 암고양이 팥알이와 검은색 수고양이 콩알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때에도 고양이를 데려온 주인의 할아버지 내복씨가 등장하는데, 다른 식구들보다 고양이를 향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 그것이 동기가 되었던 것일까? 이번에는 한집에 사는 고양이와 할아버지에 관한 내용이다.

  타마(10세, 수컷)

  다이키치 씨(75세)

  전직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리며 막역하게 지내고 있는 할아버지.

  2년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고양이와 둘이서 생활.

  이와오 씨(75세)

  전직 어부.

  은퇴하긴 했지만 종종 선착장에서 낚시를 하곤 하는 약간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

  다이키치와는 철든 어린 시절부터 소꿉친구.(p.6-7)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에서, 2년 전 할머니를 먼저 떠나보내고 지금은 고양이 타마와 둘이서 지내는 다이키치 할아버지...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은퇴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선생님으로 불린다. 대문을 마주하는 앞집에는 죽마고우로 자란 이와오가 살고 있고... 고양이와 함께하는 일상은 아주 평화롭다.

 

 

 

 

 

  봄... 벚꽃 날리는 계절은 분홍빛으로 예쁘게 칠해져 있다. 고양이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다이키치 할아버지는 1960년에 할머니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도 곁에 고양이가 있었다. 매일 어디론가 사라지는 고양이 타마의 비밀...

  여름... 수국이 피어나는 계절은 마치 미스터리 소설을 읽은 기분이다. 고양이는 정말로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개를 싫어하는 마을에서 고양이를 더 싫어하는 친구 이와오 할아버지. 그런데 그가 잡은 생선은 고양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같은가 보다. 할아버지들에게도 유쾌한 유년 시절과 화려한 젊은 날이 있었고,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 아내와 사별하고... 오늘은 고양이와 산다. 출가한 아들이 찾아왔다.

  가을... 봄에 태어난 고양이는 대부분 살아남으나 가을에 태어난 고양이는 추운 겨울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10년 전 처음으로 타마를 만났을 때... 실연당한 고양이는 생선회로 위로한다.

  겨울... 본능으로 따뜻한 곳을 찾는 계절이다. 할아버지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죽은 후에 홀로 남겨질 타마를 걱정한다. 이번에도 둘이서 새해를 맞이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의 구성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고양이와 할아버지가 사는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아침이면 죽은 아내를 떠올리며 커피를 내려 단 위에 올려놓고 하루를 시작한다.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산책... 아니 다이키치 할아버지가 어딜 가든 고양이 타마는 따라나선다. 콩밥, 문어 숙회, 참새 초밥의 요리법을 소개하고... 만화이지만, 마치 실화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책의 마지막은 기획 노트를 첨부하는데, 작가는 어떤 개념으로 그리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평화로움과 따뜻함, 유유자적한 일상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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