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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델핀 드 비강, 이세진 역, [길 위의 소녀], 비채, 2016.
Delphine De Vigan, [NO ET MOI], 2007.
프랑스 서점대상
며칠 전, 2016년 노벨문학상으로 미국의 밥 딜런(Bob Dylan)이 선정되었다. 세계의 저명한 작가를 뒤로하고 이례적으로 대중가수가 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부른 노래의 노랫말을 작시로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고정관념을 깼다는 평가와 가사가 문학이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나는 유수의 문학상보다 서점대상을 더 좋아한다. 권위 있는 작가나 평론가, 대학교수가 아닌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의 투표로 이루어지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서점 직원이 직접 읽어보고 고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내가 서점 주인이라면 팔고 싶은 책... 을 대상으로 하기에 대부분 재미를 보장한다. 주로 문학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품이 선정되고, 이런저런 논란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일본의 서점대상은 익숙하지만, 프랑스의 서점대상은 델핀 드 비강의 소설 [길 위의 소녀]가 처음이다.
"저는 노숙하는 여자아이의 여정을 따라가보려고 해요. 그 아이의 삶...... 결국, 그 아이의 이야기를요. 저는...... 그 여자아이가 어떻게 해서 거리에 나앉게 되었는지 말하고 싶어요."(p.9)
그렇지만 어제 나는 그곳에 그 애와 함께 있었다. 확신하건대, 하나의 원이 우리 둘을 한데 둘러쌌다. 나는 바깥으로 내치지 않는 원, 그 애와 나를 하나로 감싸는 원, 고작 몇 분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원.(p.17)
십삼 세 소녀 루 베르티냐크는 IQ 160의 천재이다.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무엇이든 기억하여 또래보다 두 학년을 월반, 고1의 교실 수업에 들어간다. 왼손잡이이고... 이러한 조건은, 누구나 장밋빛 미래를 연상하며 그녀의 재능을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성적은 일등이지만, 남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앞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린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생각을 멈추지 못해서 머릿속은 복잡하고 불면증에 시달린다. 마랭 선생님이 발표 주제를 물었을 때, 그냥 입으로 내뱉은 말이 '노숙자'이다.
오스테를리츠 역에서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는데, 노가 다가왔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누가 봐도 길에서 사는 여자이다. 짧은 대화였지만, 루는 거부감보다 다른 감정을 느낀다. 하나의 원 안에 있는 느낌, 동떨어지고 어긋나지 않은 기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이상하게 다 할 수 있었다. 루는 노를 인터뷰하기로 한다.
"통계적으로 추산되는 바로는, 고정 거주지가 없는 이삼십만 명 가운데 여성이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이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답니다. 16~18세 노숙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70퍼센트에 달하고요."(p.34)
여자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애는 분명히 못 박는다. 그 여자들은 거지가 아니야, 머리가 돈 것도 아니고. 노는 말한다. 루, 발표할 때 그 점을 확실히 해줘. 평범한 보통 여자들이었지만 직장을 잃거나 집에서 도망쳐나온 거야. 집에서 쫓겨났거나 맞고 사는 여자들 있잖아. 그런 여자들은 쉼터에서 지내거나 자기 차를 집 삼아 살지. 사람들이 보지도 않고 지나치니 그런 사정을 알 리도 없지만, 정말 형편없는 데서 자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사랑의 식당'이 문을 열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가족에게 밥 한 술이라도 먹이겠다고 매일같이 줄 서는 여자들.(p.71)
한때, 일본은 장기간의 불황과 치솟는 물가로 일하고 있어도 집세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캡슐 호텔이나 24시간 PC 카페를 전전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공원에서 노숙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로 대량실업과 신용불량을 양산하여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다. 실직과 빈곤의 이면에는 개인의 성장 배경, 저학력, 저임금, 불안정한 가정, 부동산 가격 상승,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의 문제가 맞물려 있다.
화장하고, 쇼핑하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파티하고, 내일은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여자애들의 평범한 일상은 그들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루는 지적조숙아로 특별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고, 노는 하룻밤 잠자리를 위해 떠돌며 무기력한 생활을 한다. 평범하다고 여기는 것이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순간이다. 한쪽은 과한 것이 말썽이고, 다른 한쪽은 결핍된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를 그토록 필요로 했나 보다. 소설은 이러한 대비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프랑스 사회의 여자 노숙자 문제는 극명해진다.
맞은편 카페 아줌마가 물루 아저씨의 개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개는 거두어도 노숙자는 자기 집에 들이지 않는다. 나는 우리 모두가 한 집에 한 사람씩만 노숙자를 맞아들인다면, 한 사람이 한 명만 맡아서 돌보기로 결심한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명만 도와주고 함께해준다면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사정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다. '사물은 존재하는 바로 그대로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그렇다, 어른이 되려면 분명히 그런 걸 받아들여야 한다.(p.92-93)
시도도 못 해볼 이유가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겁내고, 왜 더 싸워보지도 않는가?(p.126)
우리 속담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라는 게 있고, 흔히 "네 발 달린 짐승은 거둬도 두 발 달린 짐승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노숙자가 키우던 개는 거둬도 노숙자는 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프랑스의 현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듯싶다. 세상에서 제일 머리가 좋은 축에 속하는 루에게도 이것은 답 없는 문제이다.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고,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녀는 단순하면서 명쾌한 답을 시도한다. 노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자!
누군가는, 머리는 좋아도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의 순진한 결정이라고 조롱할지 모르지만, 문득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열린책들, 2015.)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 어쩌면 어린이는 이미 인생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은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을 십 대 초반의 소녀는 겁내지 않는다. 작가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해야 한다!
그 애를 보고 있으면 꼭 아주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 같다. 사막을 가로질러, 대양을 건너, 벗은 발로 산길을 걷고, 국도를 따라 수십 킬로미터를 지나온 사람 같다. 그 애는 머나먼 곳에서 돌아온 것이다.
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토에서, 하지만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돌아왔다.(p.140)
"하지만 너 역시 네 삶을 살고 있잖아. 너도 알잖아, 내가 널 필요로 한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너는...... 너도 내 가족이란 말이야......"
"루, 나는 네 가족이 아니야. 바로 그걸 네가 이해해야 해. 난 절대로 너와 가족이 될 수 없어."(p.207)
노는 지난주까지 먹기 위해, 빨래하기 위해, 하룻밤 잠자리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를 다녀야 했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아무런 계획이나 미래의 전망 없이 거리를 헤매고 방황했다. 이제는 루와 함께 있을 수 있고, 깨끗한 잠자리가 있고, 영양 있는 식사가 있다. 마치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에 일상으로 적응하는 것처럼 조금씩 회복된다. 결국, 누군가를 돕는 일은 나를 돕는 것이고, 누군가를 살리는 일은 내 영혼을 살리는 것일까? 어느 현자의 말처럼 우울증과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있었던 루의 가정도 그녀와 동거를 하며 서서히 회복된다. 개인적으로 밝은 이야기를 읽고 싶었나 보다. 이대로 모든 것이 술술 풀리기를 기대했지만, 갈등 없는 소설은 없다.
혈혈단신으로 세상에 버려진 아이, 길 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던 소녀에게는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삶... 집과 먹을 것이 해결되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풀릴 줄 알았던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좀처럼 단순하지 않다.
노는 쉼터에 가기 싫어해요. 쉼터는 지저분하고, 오전 8시면 모두 밖으로 내쫓는단 말이에요. 개인 물건을 털리지 않기 위해 한쪽 눈만 감고 자야 할 지경이라고요. 노도 자기 물건을 둘 곳, 자기가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쉼터에는 자기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노는 자신을 돌보려 하지 않아요. 쉼터에서 나가면 그 애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노는 이제 아무것도 안 믿으니까요. 그 애는 완전히 혼자니까요. 나는 울면서 계속 말한다. 아무 말이나 막 한다. 어차피 아빠 엄마는 상관 안 하잖아요. 나에 대해서 그렇듯이 노에 대해서도요, 우린 내놓은 애들이잖아요, 아빠 엄마가 포기했잖아요, 아빠 엄마는 그냥 바탕을 유지하는 선에서 균열만 때워보려고 애쓰죠, 하지만 난 아니에요, 나는요, 포기하지 않아요, 난 싸울 거예요.(p.275)
"베르티냐크 양?"
"네?"
"포기하지 마요."(p.299)
누군가 버팀목이 필요한 세상이다. 루가 사는 집은 마음의 병을 앓는 엄마와 고약한 사춘기를 보내는 딸로 인해 위기였다. 이때 아빠는 낮에는 일하고 돌아와 저녁에는 성실히 아내와 딸을 돌본다. 짜증 내는 법 없이, 희망을 잃지 않고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특별한 감정을 가진 친구 뤼카의 집은 아버지는 외국으로 떠나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산다. 아버지는 수시로 편지와 수표를 보내고, 어머니는 가끔 들려 필요한 것을 챙기고 가정부를 보내준다. 가족이 해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살 집과 충분한 돈이 있다. 부모는 나름의 버팀목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노에게는 이러한 버팀목이 없었다. 사랑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나고 자라 버려졌다. 가족의 울타리와 사회의 안전망은 그녀에게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루는 노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녀들 숨기고, 돌보는... 하지만 어린 소녀가 버티기에는 만만치 않은 세상이다.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같이 집을 나갔을 때, 루는 여전히 되돌아갈 집과 버팀목이 있지만, 노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그녀가 혼자 떠나야 할 이유였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도무지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위험의 순간에 버팀목이 있는 이들은 일상을 유지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일상으로 되돌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누군가가 필요한 세상이다.
프랑스 문학에 관한 기대감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잃지 않고 유지된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인식했던 노숙자의 문제와 우리의 사회 구조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였다. 성장이라는 주제와 수려한 문장은 문학성과 대중성의 경계에서 짜릿한 재미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