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리아드네의 탄환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가이도 다케루, 권일영 역, [아리아드네의 탄환], 예담, 2016.
Kaidou Takeru, [ARIADNE NO DANKAN], 2010.
일본소설을 읽다 보면, 남이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분야에서 자기만의 색채로 글을 쓰는 작가가 많다는 생각이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메디컬 엔터테인먼트라는 수식어가 붙은 가이도 다케루이다. 단순히 오락적인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의료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루면서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전의 작품...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예담, 2007.)에서는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수술 시스템의 문제와 현장에 있는 의료인의 고뇌를 말하고,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은행나무, 2008.)에서는 지역 산과 체계의 모순과 출산의 붕괴를 지적하며, [나니와 몬스터[(비채, 2013.)에서는 후생노동성의 의료 정책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외과의였다는 그의 이력이 글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느낌이다.
뇌혈관이 터진 원인이 혈관이 막히는 경색 때문이라면 사망 원인이 사망자 내부에 있다는 내인사(內因死), 즉 병사(病死)로 처리된다. 만약 외부에서 물리적인 힘이 작용했다면 외인사(外因死)가 된다. 이런 종류의 사인을 '의학 사인'이라고 한다.
외인사일 때는 더 자세하게 구분한다. 자연스러운 타박상이라면 사고다. 하지만 자연 발생적이지 않을 때, 예를 들어 총탄에 맞아 혈관이 파괴되었다면 그 총을 발사한 인물을 밝혀내야 할 필요가 있다. 방아쇠를 스스로 당겼다면 사고이거나 자살이다. 다른 사람이 쏘았다면 살인. 이런 종류의 사인을 '수사 사인'이라고 부른다.
사인 규명에는 두 단계가 있으며 단계마다 담당자가 달라진다.
의학 사인은 의사가 판정하고 수사 사인은 경찰관이 판정한다. 수사 사인일 때는 부검이 필수적인데, 요즘 세상에는 부검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다행이다.(p.14)
얼마 전, 우리는 하나의 죽임을 두고 내인사와 외인사의 첨예한 의견 대립을 목격했다. 분명히 외부에서 물리적인 힘이 가해졌는데, 이를 무시하고 병사를 주장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펼쳐졌다. 사망의 원인은 의학 사인과 수사 사인으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의사가 판정하고 후자는 경찰관이 판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수사 지식이 부족한 의사와 의학 지식이 부족한 경찰관이다. 부검하지 않는 임상의와 의학을 모르는 말단 수사관이 현장에서 부검 여부를 판단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일본은 연간 사망자가 백만 명이 넘는다. 여기서는 계산하기 편하게 백 명이라고 가정하자. 이 가운데 85명은 병원에서 죽고, 그 시신 가운데 2구가 해부된다. 나머지 15구의 시신은 경찰이 관계하는데 그 가운데 단 1구만 해부한다. 이렇게 부검한 시신 3구를 뺀 나머지 97구는 겉모습만 살핀 뒤 대충 사인을 정한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일본은 의학 발전이 더디고 의료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며 범죄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연간 백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확실하지 않은 사인을 판정받고 황천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인 불명 사회'의 실상이다.(p.15)
소설 [아리아드네의 탄환]은 '사인 불명 사회'라는 부조리와 어두운 그늘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일인 사회이고, 고령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사와 사고사를 제외하고서라도 고독사와 범죄의 희생 등으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죽임이 예상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고 있다. 저자는 부검 없는 사인 판정으로 의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범죄를 밝히지 못하고 떠나는 불확실성을 우려한다. 대안으로 사후 화상 진단(Ai, Autopsy imaging) 시스템의 도입을 제안하는데, 문제는 사법기관과 의료기관의 주도권 다툼이다.
Ai 추진파의 선봉에 선 그들은 'Ai는 의료 현장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Ai센터를 지역 단위로 설치하여 의료가 사인 규명 책임을 지고 자율적으로 사인을 공표하는 거점으로 삼자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면 Ai센터라는 존재가 법의 집행을 맡은 경찰을 비롯한 사법기관을 감사하여 폭주를 막을 수 있다. Ai를 수사 영역에 두면 '수사에 대한 감사 기능'이라는 Ai가 지닌 획기적인 특성을 잃고 만다.(p.16)
Ai라는 말이 나오자 모친은 순간 경계했지만 검사 내용을 설명하고 시신에 손상이 없다는 말을 듣더니 태도가 백팔십도 바뀌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애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요. 하지만 몸에 칼을 대는 건 너무 끔찍해서......"(p33-34)
"아뇨. 부검한다고 해서 모든 사인을 밝혀낼 수 있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부검으로 사인을 밝혀내는 경우는 네 사람 가운데 세 명. 75퍼센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
"그러면 Ai로는 사인을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죠?"
"CT로 30퍼센트, MRI가 60퍼센트입니다."
...
"분명히 Ai는 해부보다 사인 판명 확률이 낮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진단 과정을 설명할 수 있고, Ai를 한 뒤에 부검을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인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외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죠. 시신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이만큼은 알아내 유족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겁니다."(p.36)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인 불명으로 자식의 죽임을 맞이한다면, 부모는 원인을 알기 위해 몸에 칼을 대는 해부를 쉽게 결정할 수 있을까? 뚜렷한 범죄의 징후가 없는 한 대부분은 그대로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그런데 Ai를 통해서 신체의 훼손 없이 어느 정도의 사인을 밝혀낼 수 있다고 하니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해부보다 판명 확률은 낮지만, 진단 과정을 듣고 다음에 다시 부검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최소한 과로사인 뇌출혈이나 심근경색의 여부는 확실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도조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신경내과 다구치 고헤이는 부정수소외래 주임으로 진료를 한다. 그는 리스크 매니지먼트 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병원장의 꾐에 넘어가 마음이 없는 Ai센터 센터장을 맡게 된다. 병원 내에서 화상진단을 하는 방사선과와 부검을 하는 법의학과 사이에 상충한 충돌로 중립선상에 있는 그가 보직을 얻게 된 것이다. 뜻하지 않게 단숨에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 형국, 조무래기 센터장을 가운데 두고 거물급 부센터장이 모여 회의를 시작한다.
'화상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해부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사이 교수와 'Ai가 반드시 해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시마즈가 정면으로 충돌해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p.122)
그렇다. 의료와 사법의 논리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기본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라는 광산에 랜턴 하나만 들고 들어가 부상자를 데리고 돌아와야 하는 의료인과 이미 일어난 사건을 검증하여 논리의 벽돌로 메워야 하는 사법기관은 사물에 대한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르다.
예를 들어 의료 현장에서는 Ai를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유추하여 사인을 밝힌다. 하지만 해부 현장에서는 어차피 나중에 가장 효과적인 해부를 할 생각으로 화상을 대충 본다. 그리고 재판에서 일반 시민에게 자극이 덜한 화상을 제공할 목적이기 때문에 진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말하자면 Ai를 사바세계의 어둠을 밝힐 한 줄기 빛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경찰이나 사법기관을 위해 시민 극장에 공급하는 영화로 여기느냐에 따라 진단에 대한 성실도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다.(p.124)
"사인 관련 정보는 수사 정보이기도 합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도 법의학과 관련하여 얻어진 화상이 Ai센터에서 진단 자료로 쓰이는 건 매우 곤란해요."
법의학교실 사사이 교수가 늘 하는 주장을 다시 내세우자 시마즈가 바로 반박했다.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죠. 애당초 수사 정보를 자꾸 숨기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사람까지 생기는 겁니다. Ai 진단은 의료 현장의 최종 지점에서 실시해야 합니다. 의료 종사자가 진단하면 되죠. 사인은 숨겨야 할 정보가 아닙니다."(p.155)
"현재 상태로는 수사 현장의 편의주의 때문에 중요한 사인 정보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말죠. 의료 현장의 마지막 지점에 Ai를 두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수사 현장의 기동성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요. Ai는 해부와 달리 결과가 빨리 나오니까요."(p.156)
"Ai에서 사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책임을 지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공식 답변입니다. Ai 원칙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 적용 원칙을 말씀드리죠. 1. Ai는 의료 현장의 마지막 지점에서 의료 시술자가 진단하고 비용은 의료비 이외의 예산에서 지불한다. 2. Ai의 진단 한계를 인지시켜 사인을 확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해부를 권장한다. 3. Ai는 해부가 아니라 체표검사와 비교한다. 이상이 세 가지 원칙입니다."(p.157)
"법의학자는 화상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방사선과 의사가 작업하게 됩니다. 하지만 비용이 제대로 지불되지 않기 때문에 방사선과 의사들은 심정적으로 Ai 진단 분야에서 철수하고 말 겁니다. 그래서 결국 진단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겠죠... 애써 새롭고 획기적인 Ai란 시스템을 만들어도 쓰는 사람이 옛날 그대로라면 세상은 변하지 않아요. 발상을 바꾸면 훌륭한 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을 만들면 사인을 유족에게 직접 전달할 새로운 구조를 만들 수 있죠. 일본 방사선학회, 일본 방사선 기사학회도 Ai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니 그 분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죠."(p.158)
Ai 시스템의 도입 운용을 놓고 사법기관과 의료기관의 대립은 팽팽하다. 먼저 경찰 측과 법의학과에서는 판명 확률이 해부보다 낮아 Ai는 보조수단에 불과하고, 사인 관련 정보는 수사 정보라서 비밀 유지를 해야 하므로 사법기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료기관에서는 어차피 화상을 읽고 판독하는 것은 법의학자가 아니라 방사선과 의사가 하는 일이기에 Ai는 의료 현장에 두어야 한다고 맞받아친다. 검사 비용이라는 실질적인 이권과 양쪽 기관 종사자의 자존심을 건 싸움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과연 이런 화상만 보고 있어도 뒤엉킨 수수께끼가 풀리겠어요?"
시라토리는 화상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런 약한 소리를 하는 다구치 선생이 문제죠. 잘 들어요. 이런 탄환이야말로 수수께끼의 미궁을 깨뜨릴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이에요. 하지만 그 가느다란 실은 수수께끼를 푼다는 강한 의지가 없으면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 크레타 섬의 미궁에 사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려던 용사 테세우스를 도운 공주 아리아드네. 그녀의 붉은 실이 테세우스를 미궁에서 구해냈다. 드물게 시적으로 들리는 시라토리의 말을 듣고 나는 막판까지 몰렸다는 느낌이 들었다.(p.303)
세로형 MRI 콜럼버스 달걀 앞에서 들려온 총성, 뇌물수수와 경찰 살해 혐의로 병원장의 신변은 구속되고, 경찰은 72시간 후에 압수수색을 예정한다. 각종 언론과 매스컴의 보도로 치명타를 날릴 음모... 다구치는 다급히 리스크 매니지먼트 위원회를 개최한다. 후생노동성 기술관 시라토리 게이스케의 대활약, 조각을 모아 큰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주 흥미롭다.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사법기관과 의료기관의 대립은 결국 몇몇 경찰관의 음모를 의사와 관련 공무원이 파해처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끝맺는다. Ai 시스템 운용의 당위성, 다구치 고헤이와 시라토리 게이스케의 콤비 활약... 작가는 이번에도 대학병원을 무대로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