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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ㅣ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평점 :
데이비드 발다치, 황소연 역,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북로드, 2016.
David Baldacci, [MEMORY MAN], 2015.
스릴러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영웅적인 주인공, 특별한 악당, 계산된 플롯, 본성의 탐구, 사회적인 메시지, 눈속임과 반전... 그리고 인간의 성장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이 높아진 것일까? 만족할 만큼 모든 요소를 고루 갖춘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인 성향으로 지나치게 서술 위주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하고, 순문학과의 경계에서 적절한 긴장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데이비드 발다치의 소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그동안의 것을 무색하게 하는 정통 스릴러로, 우리에게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작품하고 다르게 어떤 신화나 서사를 차용하지 않고 오로지 머릿속에 모든 것을 저장하는 남자를 내세워 가족의 살인과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을 진득하게 그리고 있다.
에이머스 데커는 그들 세 사람의 처참한 죽음을 언제까지고 아득한 푸른빛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 기억은 푸른 칼날이 되어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를 사정없이 찔러댈 것이다. 그는 그 기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p.5)
그는 방금 관찰한 거리의 풍경을 몰아내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은 안구 안쪽에 설치된 영화 스크린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그 풍경은 영원히 거기 있을 것이다. 본 것을 잊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가 보는 모든 것은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머릿속에 하나하나 기록되어 필요에 의해 불려나오기도 하고 스스로 툭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전자는 유용하지만 후자는 늘 성가시다.(p.15)
한번 본 것은 무엇이든 영원히 기억할 수 있다면, 시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누구나 부러워할 능력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기억을 지우지 못해 피로하다. 언제 어디서나 입력한 정보를 손쉽게 꺼내 볼 수 있지만, 좋지 않은 기억도... 가령 아내와 딸이 처참한 죽임으로 발견된 순간은 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40대 초반의 전직 경찰, 195cm의 거구에 과체중인 남자, 20년 전 프로미식축구 선수로 데뷔하던 날의 사고, 두 번의 심정지 후에 생긴 과잉기억증후군과 공감각자... 에이머스 데커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경찰이 되어 뛰어난 기억 능력으로 한때는 벌링턴 경찰서에서 가장 높은 검거율을 경신했지만, 아내와 딸을 잃은 사건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수사는 미궁에 빠진다. 일을 그만두고 공원의 노숙자로 전락했다가 마음을 다잡고 사립탐정이 되어 심부름하며 하루를 산다.
"어떻게 잡은 거야?"
"쉬웠어. 오늘 새벽 2시에 놈이 경찰서로 들어와서 자수했거든. 이렇게 쉽게 검거한 건 처음이지 뭐야. 방금 놈을 면담하고 왔어."
데커는 그녀를 쏘아보았다. "거의 16개월이나 지난 이 시점에 놈이 제 발로 와서 내가 세 명을 죽였소 하고 자백했다고?"(p.34)
"맨스필드에서 사용된 탄환을 분석했는데."
"그게 뭐......"
그녀가 끼어들어 말했다. "일치하는 게 나왔어."
그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일치? 뭐랑 일치하는데?"
"네 아내를 죽인 총."(p.151)
후천적으로 생긴 능력의 후유증은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딸을 낳음으로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지금은 희망도 의욕도 없다. 하지만 16개월이 지난 후에 누군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하면서 자수를 한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고, 유죄를 주장하며 죽기를 자청하는 남자... 이제 인생의 목표와 삶의 의미가 다시 생긴다.
맨스필드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 9명이 희생된다... 자기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개인적인 감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용의자...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기억이 없다... 소설은 에이머스 데커를 중심으로 두 개의 사건, 그의 가족 살인과 맨스필드 총기 난사 사건을 추적하는데... 탄환 분석 결과 같은 총기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다. 둘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수개월 뒤 시카고 외곽의 연구소에서 오랜 기간 입원하고 나서 그는 과잉기억 장애와 공감각 증상을 가진 후천성 서번트증후군으로 공식 진단을 받았다. 부상은 그의 선수 생활을 끝장낸 대신 그를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두뇌의 소유자 중 하나로 만들어놓았다.(p.182)
진짜로 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자문해봐, 형제여, 너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이 야기되었는지. 이제 끝내야지. 바로잡으라고. 그때 그랬어야 했어. 용기를 내. 겁쟁이처럼 굴지 마, 형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안 그러면 다음번엔 진짜 피를 보게 될 거야. 마지막 기회야.(p.366)
뒤를 쫓으며 단서를 찾아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범인은 이것을 조롱하며 그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그의 머릿속 기억의 세계에 펼쳐진 수많은 파편의 조각을 모아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왜 나를 타깃으로 삼았을까? 어떤 원한이 있기에? 내가 모욕을 준 사람은 누구? 결국, 범인이 원하는 것은 나인가? 끝없는 두뇌의 회전으로 사건을 재구성해보지만, 답은 오리무중이다. 그러면서 주변의 인물이 하나둘 살해되고, 또 다른 메시지가 전해진다.
수수께끼를 풀고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무엇보다 논리적인 완성도를 보이는데, 작가의 치밀함과 세심함이 글 속에서 묻어난다. 데이터를 저장할 수는 있어도 삭제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의 고뇌, 서서히 조여오는 심리적 압박은 진정한 스릴러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사건의 연속성... 그리고 비만 인구, 지역경제 불황, 학교 총기 난사와 같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사건의 해결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암시를 통해서 앞으로 나올 에이머스 데커의 이야기에 더 큰 기대를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