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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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칼라니티, 이종인 역, [숨결이 바람 될 때], 흐름출판, 2016.

Paul Kalanithi, [WHEN BREATH BECOMES AIR], 2016.

  문학과 철학에 조예가 깊으며, 고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이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폴 칼라니티의 자서전이자 투병기 그리고 아내와 딸에게 남긴 마지막 글인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감정이 메마르고 냉혈인이 되어 가는 것일까?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후에 작품을 내놓은 어느 작가의 역사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꺼져가는 생명으로 마지막 혼신의 힘을 기울여 글쓰기에 몰입하는 모습이 연상되어 소설의 내용보다 작가의 드라마 같은 인생에 더 감동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여기저기에서 호평으로 책을 선택하여(김서늬님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단숨에 읽었지만, 역시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곡선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CT 정밀검사 결과를 휙휙 넘겼다. 진단은 명확했다. 무수한 종양이 폐를 덮고 있었다. 척추는 변형되었고 간엽 전체가 없어졌다. 암이 넓게 전이되어 있었다. 나는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마지막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난 6년 동안 이런 정밀검사 결과를 수없이 검토했다. 혹시나 환자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지만 이번 검사 결과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 사진은 내 것이었다.(p.19)

  저자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어린 시절 심장의였던 아버지를 따라 애리조나 주의 킹맨에서 자랐다. 사막으로 이루어진 작은 도시에서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은 독서와 공부에 관심을 두게 했고,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해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한다. 문학과 철학, 과학과 생물학에 관심을 보이던 그는 이때부터(그 이전부터)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에 의문을 품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과 의학의 역사를 공부한다. 우리의 경우 돈벌이(?)를 기준으로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세우고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진로를 정한다. 졸업 후 예일대 의과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에서 신경과 레지던트로 일한다. 그가 의사로서 보인 실력은 대단한듯하다. 논문을 쓰고, 상을 받고... 수련의가 끝나면 그를 교수로 채용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접촉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암에 걸린다.

  모든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는 동안, 신경외과의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 모든 뇌수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질인 뇌를 조작하며, 뇌수술을 받는 환자와 대화할 때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뇌수술은 대개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며, 그래서 인생의 중대한 사건들이 그렇듯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가령 당신의 어머니가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치명적인 뇌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낮은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시력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면? 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 당신의 아이가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기 때문에,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p.95)

  우리는 모두 시한부를 살고 있다. 그것이 일 년 후가 될지? 십 년 후가 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는 마찬가지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주일에 100시간이 넘게 일하는 혹독한 병원 근무는 그를 0.0012%에 속하게 만들었다. 폐를 뒤덮은 무수한 암 덩어리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술이나 화학요법 이전에 약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원인 모를 체중 감소와 극심한 요통에 시달렸지만, 약물을 복용하면서부터 서서히 일상으로 회복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는 왜 쉬지 않고 다시 혹독한 레지던트 생활로 되돌아갔을까? 마치 신이 경고했음에도 보란 듯이 무시하고 일반인조차 견디기 힘든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진짜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꿈을 향해 후회 없는 전진을 한 것일까? 글을 읽는 내내 그의 도전정신에 감탄하기보다는 무모함과 오만함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츠키 히로유키의 에세이 [대하의 한 방울](지식여행, 2012.)에서 한 문장이 떠오른다. "무명인 채 일생을 마치고,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이 일생을 마쳤다고 비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살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건 두 번째, 세 번째로 생각하면 됩니다. 산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큰일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전후 혼란의 시대를 헤쳐온 저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p.100) 맞다! 무언가를 이루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내 삶은 그동안 잠재력을 쌓아왔으나 그 잠재력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정말 많은 걸 계획했고, 그 계획이 곧 성사될 참이었다. 내 몸은 쇠약해졌고, 내가 꿈꿨던 미래와 나 자신의 정체성은 붕괴되었으며, 내 환자들이 대면했던 실존적 문제를 나 역시 마주하게 되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마치 모래 폭풍이 그동안 친숙했던 모든 흔적을 쓸어간 것처럼.(p.148-149)

  그는 잠시 호전된 몸을 이끌고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다. 어쩌면 혼자 남게 될지 모르는 아내 루시와 협의하여 자녀 계획을 세우고 딸 케이디를 낳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악성 종양의 발발로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재발한 암은 화학요법으로도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그의 시간을 늘릴 수 없었다. 마침내, 처음 암 진단 후 22개월 뒤인 2015년 3월 9일에 세상을 떠난다. 아쉽다. 정말 많이 아쉽다. 한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왜 그 기회를 놓쳤을까? 의사가 아니라면 작가가 되기를 희망했다고 하는데, 과감히 의사의 꿈을 접고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죽음 앞에서 전진하라는 꿈과 희망의 메시지라기보다는 신의 섭리를 무시한 대하의 한 방울 같은 인간의 최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면 쉬울 텐데요. 2년이 남았다면 글을 쓸 겁니다. 10년이 남았다면 수술을 하고 과학을 탐구하겠어요."(p.166)

  어쨌든 마지막 투병 기간에 쓴 글이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결국, 죽음을 대가로 의사의 꿈과 작가의 꿈을 동시에 이룬 것일까? 감동보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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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닷컴
소네 케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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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네 게이스케, 권일영 역, [암살자닷컴], 예담, 2016.

Sone Keisuke, [KOROSIYA DOT COM], 2013.

  [코](북홀릭, 2011.),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북홀릭, 2013.), [침저어](예담, 2013.), [열대야](북홀릭, 2014.)로 알려진 소네 게이스케의 작품을 드디어 읽었다. 그동안 책의 독자들이 왜 그의 작품을 좋아하면서 아쉬워하는지, 재미있어하면서 찜찜해 하는지 이해가 된다. 한 권의 소설을 읽고 그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암살자닷컴]을 통해서 느낌 감정은... 일반적으로 일본 미스터리는 아무리 잔혹해도 기본적으로 권선징악의 구도를 유지하고 선과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그의 소설은 매우 파격적이라고 해야 하나?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악과 악의 대결이고 때로는 선한 의도가 악에 의해 희생하기도 한다. 기발한 발상... 그동안의 익숙함과 동떨어진 진행은 가히 놀랄만하지만, 나 역시 아쉬움과 찜찜함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생명이 빠져나가는 오마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로가 말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이게 내 직업이라."(p.12)

  여기에는 암살자닷컴(krosiya.com)을 중심으로 연결된 네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네 개의 암살 이야기가 수록되었는데, 앞의 세 개는 로런스 블록의 소설 [살인해드립니다](엘릭시르, 2015.)가 떠오르고, 마지막 한 개는 하라 료의 소설 [안녕, 긴 잠이여](비채, 2013.)가 떠오른다. 한 명의 암살자가 등장하는 게 아니라 장마다 다른 암살자가 등장하는데... 이혼한 아내와 아들의 학원비를 보내기 위해 부업으로 일하는 현직 형사로부터 직장을 잃은 남편을 대신하여 일하는 가정주부 그리고 평생을 조직에 몸담고 있다가 이제는 은퇴할 때를 기다리는 전문가까지 다양한 암살 노동자가 나오고 있다. 누가 이러한 상황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조직'은 일감을 알선하는 입찰 사이트만이 아니라 쇼핑몰도 운영한다. 거기서는 권총, 독약 등 업무에 필요한 각종 용품에서부터 양심의 가책을 견뎌낼 수 없을 때 현실 도피를 도와주는 각성제까지, 청부살인업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다.(p.68)

  마음이 변한 까닭은 그저께 '암살자닷컴'에서 보낸 '배신자 정보'라는 제목의 메일 매거진을 봤기 때문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pikopiko-1216'인가 하는 청부살인업자가 낙찰받은 일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에 따라 '상응하는 처분을 내렸다'고 한다. 메일 매거진에는 pikopiko-1216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너무나도 참혹한 그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로 달려가야만 했다.(p.113-114)

  '조직'은 사정이 있어 입찰에 부칠 수 없거나 입찰에 부쳤어도 마무리되지 않은 일을 임의로 선택한 청부살인업자에게 맡긴다. 이것을 수의계약, 흔히 '수계'라고 한다. 보수는 지불되지만 지명을 받은 청부살인업자는 그 일을 거부할 수 없다.(p.173)

  수의계약으로 처리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카테고리1은 입찰에 부쳤지만 보수가 싸거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참가자가 모이지 않아 유찰된 일, 카테고리2는 낙찰되었지만 미수에 그친 일이다. 낙찰자가 시도는 했지만 미수에 그쳐 실행 단계에서 표적에게 반격을 당했거나 경찰에 체포된 경우다.

  카테고리3은 위의 두 경우와 달리 '조직'이 직접 의뢰하는 일이다. 낙찰받고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자, '조직'의 비밀을 외부에 유출시킨 자 등에게 제재를 가한다. 표적이 되는 대상은 주로 '조직'과의 계약자, 즉 청부살인업자인데 '조직'을 탐색하는 기자나 탐정인 경우도 있다. 그리고 카테고리3에는 표적을 처치하는 일 이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작업이 따른다. 이른바 '세공'이라고 해서 본때를 보이기 위해 표적의 시체를 훼손하는 것이다.(p.176-177)

  암살자닷컴은 철저한 비밀 속에서 옥션처럼 입찰 경쟁으로 일감을 분배한다. 즉, 가장 낮은 금액을 제시한 사람이 일을 따내는 방식인데, 난이도에 따라 경쟁률이 다르다. 때로는 몇몇 회원 간의 가격 경쟁이 붙기도 하고, 아예 입찰이 없는 경우도 있다. 먼저, 기한 내에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조직은 그에 응당한 벌을 내린다. 가격이 너무 싸거나 일의 까다로움으로 입찰이 없으면, 조직은 수의계약을 맡은 이에게 일을 떠맡기는 체계이다.

  짧으면서 분명한 네 개의 이야기는 소네 게이스케의 명성이 전혀 헛되지 않았음을 잘 드러낸다. 흡입력이 있고, 사소한 반전으로부터 마지막의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기까지 재미라는 한 가지를 두고 평가하면 절대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권선징악의 테두리를 벗어난 설정은 끝내 나의 발목을 잡는다.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잘못된 부정이나, 미성년자의 아무렇지 않은 살인 행위, 그리고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이를 향한 조직의 복수는 끔찍한 작업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재미와 찜찜함이 공존하는 작품, 그래서인지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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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온 아이
에오윈 아이비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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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오윈 아이비, 이원경 역, [눈에서 온 아이], 비채, 2016.

Eowyn Ivey, [THE SNOW CHILD], 2012.

  대학 시절, 그러니깐 처음 성인이 된 후에... 이전에는 남녀가 아무리 가까워도 미성년이라 어른들은 무조건 우정의 범주에서 이해하려 했다... 이성으로 만났던 친구는 자기가 겨울에 태어난 것을 무슨 주문처럼 얘기하고 다녔는데,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는지 주위의 친구들은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가수의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었다. 노래에 별다른 소질이 없었던 나는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카드를 썼고... 졸업과 함께 그녀는 어디론가 시집을 가버렸다.

  나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태어났다. 기독교 절기 중의 하나인 부활절(Easter)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지만,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고 생명이 초록빛 싹을 틔우는 계절이 왔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돌아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읽었을 때... 눈으로 만들어진 소녀... 그래서 더위보다는 추위에 강하고, 무더운 여름에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서늘한 곳에서 지내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이 내리는 계절에 다시 돌아오는... 겨울 철새의 이동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아름답다.

  메이블이 말했다.

  "소녀를 만들자. 작은 여자아이."

  잭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을 대로 해."

  눈밭에 꿇어앉은 메이블은 눈 소녀의 밑 부분을 바깥으로 펼쳐진 치맛자락 모양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쓰다듬어 올라가며 눈을 깎아 호리호리한 윤곽을 빚어내자, 마침내 눈사람이 작은 아이처럼 보였다. 메이블이 일어서서 보니, 잭은 주머니칼로 얼굴을 새기고 있었다.

  "다 됐어"(p.64-65)

  숲가에 다다라 눈 쌓인 나뭇가지 사이로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고작 백 미터쯤 너머에 그 아이가 있었다. 메이블 쪽으로 등을 돌리고 웅크린 소녀는 그녀가 만든 파란색 양털코트 위로 옅은 금발을 늘어뜨렸다. 불러야 하나 싶어 메이블이 목청을 가다듬자, 그 소리에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 벌떡 일어난 소녀는 눈밭에 놓인 작은 자루를 집어 들고 달아났다. 가장 큰 가문비나무 뒤로 사라지기 직전에 소녀가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자, 메이블은 소녀의 반짝이는 파란 눈과 작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았다. 기껏해야 여덟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p.81)

  에오윈 아이비의 소설 [눈에서 온 아이]는 그녀의 고향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1920년대의 이야기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는 지금으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지만, 수명이 짧았던 당시에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잭과 메이블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살다가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후에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를 견디지 못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개척의 땅으로 이주한다. 둘만의 평온을 찾기 위해 찾아온 땅이었지만, 알래스카는 춥고 척박하다. 가장 큰 문제는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이들에게 희망이 남아 있을까? 그러던 중에 우연히 만든 눈사람 소녀... 이후에 한 작은 소녀가 이들 부부 앞에 나타나고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

  우리가 널 뭐라고 부르면 좋겠니? 계속 '아가야'라고 할 수는 없잖아?

  소녀는 말이 없었다. 잭은 아이에게서 이름을 듣기는 글렀다고 생각한 듯 손을 뻗어 소금을 집어 갔다. 메이블은 기다렸지만, 잭은 다시 먹기 시작했다.

  파이나. 소녀가 소곤소곤 말했다.

  그게 뭔데? 메이블이 물었다.

  내 이름요. 파이나.

  다시 말해줄래? 조금 천천히?

  파-이-나.(p.165-166)

  안타깝게도 이야기는 전부 하나같이 슬프게 끝나. 눈 소녀는 겨울만 되면 찾아오지만 결국 녹아버리고 말지. 마을 애들이랑 놀다 모닥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봄이 오기 전에 미처 달아나지 못하거나, 아버지의 책에서처럼 한 젊은이를 만나 사랑에 빠져서 말야.(p.177)

  작가는 러시아의 전래동화 [눈 소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한때는 러시아의 땅이었고, 자신이 나고 자란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기본 골격은 비슷하게 이루어져 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첫 번째 겨울을 보내고 만든 눈사람, 그리고 이후에 나타난 소녀, 봄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겨울이 오면 다시 찾아오는 신비로운 소녀... 6년의 세월이 흐르고, 부부는 이웃의 도움으로 땅을 개간하고 밭을 일구어 그 땅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겨울마다 찾아오는 소녀는 어느덧 처녀로 자라나 사랑에 빠지는데...

  저게 내 이름의 뜻이에요. 파이나가 여전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산?

  아뇨. 저 빛이요. 아빠는 해가 저물 때 보이는 눈의 색을 내 이름으로 지었어요.

  산 노을. 메이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p.345)

  ......희망은 날개가 있어...... 영혼에 둥지를 트나니....... 맺어진 인연의 끈을 놓지 말 것이며...... 그러겠습니까?...... 어서...... 어서...... 울창한 숲으로 달려가...... 내 머리맡에 장미를 놓지 말고...... 그러겠습니까?......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죽음이 둘을......

  네......

  네......

  네......

  네......(p.480)

  소녀, 아니 처녀가 된 파이나의 임신, 결혼식... 그리고 가정생활과 출산... 하지만 눈에서 온 소녀는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전래동화가 비극으로 끝나듯이 파이나는 어디론가 떠나는데... 작가는 마지막을 약속의 희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감탄한 것은 유려한 문체 때문이다. 번역가 이원경의 약력을 살펴보니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그 실력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이 걸림돌 없이 읽히는 문장은 정말 최고이다. 원작을 찾아서 비교하며 읽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길 정도인데, 아쉽게도 국내의 인터넷 서점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유려한 문체의 아름다운 겨울 소녀 이야기는 첫눈이 내리는 요즘 같은 계절하고 매우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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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김성한 지음 / 새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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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달콤한 인생], 새움, 2016.

  달콤한 인생이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대한민국은 가진 자의 나라이고... 소수의 몇몇이 달콤한 인생을 누리고 있다. 단맛의 중독, 끊을 수 없는 달달함... 돈과 권력의 맛은 처음에는 설탕처럼 뇌의 쾌감중추를 자극하여 포만감을 불러오고... 이것이 지속하여 만성화되면, 우리의 뇌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을 분비하여 마약처럼 더 강한 맛을 찾게 한다. 중독! 충분히 달콤하면서도 만족이 없는 삶... 김성한의 소설 [달콤한 인생]은 한 남자의 끝없는 욕망이 결국에는 멈추지 못하고 왜곡되어 파멸을 불러오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자식은 분명 살인자다. 사회의 암 덩어리다.'

  그렇지만 상우는 암세포를 절제해내는 것은 의사가 할 일이지 알량한 정의감을 가진 변호사의 사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우가 할 일은 높은 수임료를 받아 챙기고, 그 대가로 이 어린 살인자를 법의 사각지대로 안전하게 숨겨주는 것이었다.(p.12)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제대로 된 한국형 스릴러이다. 주로 일본소설을 읽는데, 이유는 가벼움과 메시지 때문이고... 확실한 장르를 유지하면서 자기만의 글을 쓰는 작가가 있기 때문이다. 남이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분야에서 평생의 소재를 가지고 계속해서 써내는 작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국내소설은 순수문학을 향한 자기 검열 때문일까? 경계의 짜릿함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느낌을 지울 수 없고, 메시지는 약하고, 더구나 가볍지도 않다. 그래서 매번 하는 말이 우리도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작가가 나왔으면 하는데... 하지만 다르게 보면, 그들은 너무나도 높게만 보인다. 제발 순수문학에 물들지 않기를...

  "이제부터 모두가 자네들을 부러워할 거야. 자부심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라도 좋아. 그렇지만 진짜 변호사 생활은 3층부터 시작하는 거니 유념들 하게. 제군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며 더 높은 층수에 오를수록 직업윤리가 어쩌니 영혼 없는 변호사니 하는 말들을 자주 듣게 될 테지만, 그런 시기와 질투에 일일이 신경 쓸 것 없어. 군들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거야."

  정훈은 젓가락으로 유리잔을 두드리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더 높은 층수에는 더 달콤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과 성공이 바로 그 곳에 있는 거지. 내 말이 거짓인지 의심되면 어디 한번 올라와 보라고. 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7층에서 군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p.28-29)

  그런데 [달콤한 인생]은 절대로 밀리지 않는 작품이다. 카카오페이지 동시 구독자 3만 명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듯이, 내가 덮어씌운 살인사건의 변호를 내가 맡는다는 설정은 정말 탄복할만하다. 나름의 논리를 유지하면서 끝까지 힘을 가하는데, 특히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심리는 매우 현실적이라 시종일관 시선을 끈다. 상우는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그 보상이 따르듯이 고교 시절부터 좋아하던 여자와 결혼하고, 고급 주택가에 집을 마련하고, 중형 외제 세단을 탄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더 높은 연봉, 더 많은 세상의 관심, 그리고 육체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법률적 대리인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정치권력에 끈을 대기 위해 사생활을 포기하고, 정기적으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아니, 박상우. 정신 차려! 출소하면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살인자의 꿈치고는 너무 과분하군. 게다가 십 년 후에 출소하고 나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등록이 취소된 변호사 자격증으로 어떤 직업을 구할 수 있겠어. 고작해야 남이 살 집을 짓고, 남이 쓸 물건을 나르고, 하루에 열 시간씩 계산대 앞에 서서 남이 사는 라면과 생리대의 바코드를 찍고...... 아니, 안 돼. 이런 삶을 살 수는 없어. 절대로 견뎌내지 못할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온전한 나의 삶이지 다른 누군가를 위한 삶이 아니야!'(p.53)

  그날 새벽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며 주저 없이 달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인이라는 치명적인 행위는 그가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갈 수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뱃속의 딸을 포함해서 전 재산을 잃을 것이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몰락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는 해서는 안 되는 결정을 한다. 사건을 조작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그 사람의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서 무죄를 변론한다.

  "그렇다면 사건의 진범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들 눈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지요.'

  "TV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범인은 항상 자신의 사건에 관심이 많은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범인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상우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카메라 한 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범인이 지금 이 뉴스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잘 들어두세요.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든, 그 계획은 실패하고 말 겁니다."(p.171)

  세상의 순리가 그렇듯이 거짓은 또 다른 거짓말을 생산하고, 한번 꼬인 매듭은 좀처럼 풀리지 않아 계속해서 발목을 잡는다. 그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유혹에 빠지고,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간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진실은 점점 그의 숨통을 조여오는데...

  작가는 브레이크 제동 없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한 남자의 삶을 통해서 일상의 행복을 말하고 싶었나 보다. 젊은 연인의 속삭임,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 카페에서 차 한 잔의 여유, 따뜻한 저녁 식사... 누군가는 찌들었다고 표현하는 평범한 일상에 사실은 소중한 많은 것이 녹아 있다는 것을 상우는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달콤한 인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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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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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 비네, 이주영 역, [HHhH], 황금가지, 2016.

Laurent Binet, [HHhH], 2009.

2010 콩쿠르상

2014 일본 서점대상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이 '환호'라고 쓰고 '환장'이라고 읽을 만한 책이 나왔다. 한마디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생생한 기록인데, 마치 히스토리 채널에서 전쟁사를 보는듯한 기분이다. 1930~1940년대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를 배경으로 독일은 무슨 짓을 벌였으며,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여기에 민족적으로 어떤 대항을 했는지 연대기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로랑 비네의 소설 [HHhH]는 프랑스에서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권위 있는 콩쿠르상과 일본에서 외국소설 부문 서점대상을 받은 특별한 이력이 있는데, 그만큼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

  그의 이름은 가브치크. 실존했던 사람이다.

  ...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도 레지스탕스로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p.9-10)

  이제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인프라 소설(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옮긴이)이다.(p.320)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하는 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라스트 엔딩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 1975.)을 말한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라서 세세한 내용보다는 이미지로 기억하는데, 암살 작전을 실행한 레지스탕스는 성당의 지하에 숨어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독일군과 경찰은 체포에 난항을 겪자 소방 호스로 물을 쏟아붓는데, 한겨울의 추위에 턱밑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그들은 마지막 탄환의 총구를 서로에게 겨누며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아직 어려서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이해하지 못했고, 원래부터 체코인은 모두 레지스탕스, 슬로바키아인은 모두 나치 부역자라고 생각했다. 단 한순간도 프랑스의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이런 이분법적인 생각은 문제가 되었다. 우리 프랑스인들은 나치에 저항도 했지만 동시에 부역도 하지 않았는가? 솔직히 말해, 요시프 티토(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독 게릴라 활동을 한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옮긴이)가 크로아티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그러니까 크로아티아인이라고 전부 나치에 협력한 것은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인이라고 전부 나치에 저항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전쟁 중 체코슬로바키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좀 더 분명하게 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한쪽은 독일에 점령당해 독일 제3국에 병합된 보헤미아-모라비아(다른 말로 하면 현재의 체코공화국)였다. 그 말은 독일 제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보호령 신세라는 말이었다. 또 한쪽은 겉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사실은 독일 제3제국의 위성국가에 지나지 않는 슬로바키아였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개개인이 달리 행동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는 알지 못했다.(p.12-13)

  물론 하이드리히가 히믈러와 함께 만들어 가는 팀워크에서 하이드리히는 SS의 두뇌 역할을 한다(S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HHhH."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는 뜻이다.).(p.175)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에서 소설 [레드브레스트](비채, 2013.)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의 어두운 역사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되어 부역하거나 아니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선택지는 둘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경우 부역과 저항 이외에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동부전선에서 소련과 써우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계 이민자들이 뒤섞여 밀접하면서도 껄끄러운 복잡한 관계였다. 1939년 히틀러는 전방위적인 압박으로 체코를 제3제국의 치하로 만들고, 슬로바키아를 위성국가로 두었다.

  나치 친위대 SS의 수장인 히믈러의 뒤를 잇는 이인자로서 그의 오른팔이자 브레인으로, 정보기관의 책임자로 정치공작과 비밀작전을 실제로 지휘하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체코의 총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무자비한 유대인 학살을 벌이며 '프라하의 도살자'로 불리는데, 그래서인지 영국의 특수작전국(SOE)의 도움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는 슬로바키아인 요제프 가브치크(Jozef Gabchik) 중사와 체코인 얀 쿠비시(Jan Kubis) 하사를 표적 암살에 투입한다. 일명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으로 나치의 상징적인 인물을 제거함으로 위상을 세우려 한다.

  가브치크와 쿠비시가 스타일과 성격이 반대였음을 파일은 보여주고 있다. 가브치크가 키 작고 에너지 넘치는 외향적인 스타일이라면 쿠비시는 키 크고 침착하고 진지한 스타일이다. 내가 얻은 모든 증언 자료들에서도 같은 내용을 읽었다. 이렇게 스타일과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업무를 분담하게 된다. 가브치크는 기관총 담당, 쿠비시는 폭탄 담당.(p.207)

  나의 임무는 또 한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소속 병사와 함께 조국으로 파견되어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방법에 따라 장소를 정하고 파괴공작이나 테러 활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목표한 결과를 얻기 위해 조국 안팎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내가 자원한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게 성심을 다해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

  1941년 12월 1일, 가브치크와 쿠비시가 서명 서류의 내용이다.(p.216)

  암살 작전 수행 시 현장에서 사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지휘관은 두 사람을 따로 불러 이 같은 사실을 전달한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고, 자신이 이러한 중요임무를 맡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1941년 12월 28일 날짜에 유서를 남기고 핼리팩스 폭격기를 타고 낙하산으로 잠입한다. 현지 레지스탕스와 접선, 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위조 신분으로 프라하에 간다. 그리고 드디어 1942년 5월 27일, 수요일이 된다.

  히틀러는 리디체를 복수심 어린 광기의 상징적인 분출구로 이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이드리히의 암살범들을 찾아내 처벌하지 못해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은 독일 제3제국은 무자비한 광기에 휩싸인다. 리디체를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묘지는 훼손되고 과수원은 갈아엎어지고 건물은 불타고 땅은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도록 소금 세례를 받는다. 리디체는 지옥의 불구덩이와 다름없다. 이미 폐허가 된 마을을 불도저들이 밀어 버린다. 마을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서는 안 된다. 마을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도록 모든 흔적을 완전히 지워야 한다.(p.390)

  리디체 마을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공포와 절망에 빠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양심의 가책이 두 사람을 괴롭힌다. 두 사람은 작전을 수행했고 짐승 같은 하이드리히도 죽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전 세계를 가장 사악한 인간 중 한 명으로부터 구해 냈으나 리디체 주민들이 자신들 때문에 죽은 것 같아 괴롭다. 더구나 히틀러가 가브치크와 쿠비시를 찾아 죽일 때까지 보복은 분명히 계속될 것이다. 지하실에 갇혀 있다시피 한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초조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또 하다가 마침내 한 가지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두 사람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무모한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두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p.391-392)

  나치의 공분과 대대적인 보복, 협박과 회유, 2천만 크라운의 현상금, 배신으로 밀고자의 발생, SS 대원 팔백 명을 투입, 최후의 저항... 1942년 6월 18일 정오 12시에 네 발의 총성과 함께 소란스러운 총격은 멈춘다.

  1부는 역사적인 배경과 주요 인물에 관한 내레이션으로 되어 있고, 2부는 유인원 작전의 과정과 최후의 순간을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침탈의 역사와 이것에 저항하는 민족의 투쟁이 우리의 모습하고 매우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191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쓰러뜨린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22일 새벽 천여 명의 무장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한 발로 자결한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홍구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단상의 고위 관료를 향해 폭탄을 던진다. 1942년보다 한발 앞선 우리 선조들의 저항이 더욱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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