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평점 :
로랑 비네, 이주영 역, [HHhH], 황금가지, 2016.
Laurent Binet, [HHhH], 2009.
2010 콩쿠르상
2014 일본 서점대상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이 '환호'라고 쓰고 '환장'이라고 읽을 만한 책이 나왔다. 한마디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생생한 기록인데, 마치 히스토리 채널에서 전쟁사를 보는듯한 기분이다. 1930~1940년대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를 배경으로 독일은 무슨 짓을 벌였으며,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여기에 민족적으로 어떤 대항을 했는지 연대기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로랑 비네의 소설 [HHhH]는 프랑스에서 신인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권위 있는 콩쿠르상과 일본에서 외국소설 부문 서점대상을 받은 특별한 이력이 있는데, 그만큼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
그의 이름은 가브치크. 실존했던 사람이다.
...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제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도 레지스탕스로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p.9-10)
이제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인프라 소설(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옮긴이)이다.(p.320)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하는 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라스트 엔딩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 1975.)을 말한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영화라서 세세한 내용보다는 이미지로 기억하는데, 암살 작전을 실행한 레지스탕스는 성당의 지하에 숨어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독일군과 경찰은 체포에 난항을 겪자 소방 호스로 물을 쏟아붓는데, 한겨울의 추위에 턱밑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그들은 마지막 탄환의 총구를 서로에게 겨누며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아직 어려서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이해하지 못했고, 원래부터 체코인은 모두 레지스탕스, 슬로바키아인은 모두 나치 부역자라고 생각했다. 단 한순간도 프랑스의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프랑스의 경우를 보면 이런 이분법적인 생각은 문제가 되었다. 우리 프랑스인들은 나치에 저항도 했지만 동시에 부역도 하지 않았는가? 솔직히 말해, 요시프 티토(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독 게릴라 활동을 한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옮긴이)가 크로아티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그러니까 크로아티아인이라고 전부 나치에 협력한 것은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세르비아인이라고 전부 나치에 저항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전쟁 중 체코슬로바키아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좀 더 분명하게 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한쪽은 독일에 점령당해 독일 제3국에 병합된 보헤미아-모라비아(다른 말로 하면 현재의 체코공화국)였다. 그 말은 독일 제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보호령 신세라는 말이었다. 또 한쪽은 겉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사실은 독일 제3제국의 위성국가에 지나지 않는 슬로바키아였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개개인이 달리 행동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는 알지 못했다.(p.12-13)
물론 하이드리히가 히믈러와 함께 만들어 가는 팀워크에서 하이드리히는 SS의 두뇌 역할을 한다(S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HHhH."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는 뜻이다.).(p.175)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에서 소설 [레드브레스트](비채, 2013.)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의 어두운 역사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되어 부역하거나 아니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선택지는 둘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경우 부역과 저항 이외에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동부전선에서 소련과 써우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계 이민자들이 뒤섞여 밀접하면서도 껄끄러운 복잡한 관계였다. 1939년 히틀러는 전방위적인 압박으로 체코를 제3제국의 치하로 만들고, 슬로바키아를 위성국가로 두었다.
나치 친위대 SS의 수장인 히믈러의 뒤를 잇는 이인자로서 그의 오른팔이자 브레인으로, 정보기관의 책임자로 정치공작과 비밀작전을 실제로 지휘하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체코의 총독으로 부임한다. 그는 무자비한 유대인 학살을 벌이며 '프라하의 도살자'로 불리는데, 그래서인지 영국의 특수작전국(SOE)의 도움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는 슬로바키아인 요제프 가브치크(Jozef Gabchik) 중사와 체코인 얀 쿠비시(Jan Kubis) 하사를 표적 암살에 투입한다. 일명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으로 나치의 상징적인 인물을 제거함으로 위상을 세우려 한다.
가브치크와 쿠비시가 스타일과 성격이 반대였음을 파일은 보여주고 있다. 가브치크가 키 작고 에너지 넘치는 외향적인 스타일이라면 쿠비시는 키 크고 침착하고 진지한 스타일이다. 내가 얻은 모든 증언 자료들에서도 같은 내용을 읽었다. 이렇게 스타일과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업무를 분담하게 된다. 가브치크는 기관총 담당, 쿠비시는 폭탄 담당.(p.207)
나의 임무는 또 한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소속 병사와 함께 조국으로 파견되어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방법에 따라 장소를 정하고 파괴공작이나 테러 활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목표한 결과를 얻기 위해 조국 안팎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내가 자원한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게 성심을 다해 노력할 것을 맹세한다.
1941년 12월 1일, 가브치크와 쿠비시가 서명한 서류의 내용이다.(p.216)
암살 작전 수행 시 현장에서 사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지휘관은 두 사람을 따로 불러 이 같은 사실을 전달한다.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고, 자신이 이러한 중요임무를 맡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1941년 12월 28일 날짜에 유서를 남기고 핼리팩스 폭격기를 타고 낙하산으로 잠입한다. 현지 레지스탕스와 접선, 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위조 신분으로 프라하에 간다. 그리고 드디어 1942년 5월 27일, 수요일이 된다.
히틀러는 리디체를 복수심 어린 광기의 상징적인 분출구로 이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이드리히의 암살범들을 찾아내 처벌하지 못해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은 독일 제3제국은 무자비한 광기에 휩싸인다. 리디체를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묘지는 훼손되고 과수원은 갈아엎어지고 건물은 불타고 땅은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도록 소금 세례를 받는다. 리디체는 지옥의 불구덩이와 다름없다. 이미 폐허가 된 마을을 불도저들이 밀어 버린다. 마을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서는 안 된다. 마을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도록 모든 흔적을 완전히 지워야 한다.(p.390)
리디체 마을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공포와 절망에 빠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양심의 가책이 두 사람을 괴롭힌다. 두 사람은 작전을 수행했고 짐승 같은 하이드리히도 죽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전 세계를 가장 사악한 인간 중 한 명으로부터 구해 냈으나 리디체 주민들이 자신들 때문에 죽은 것 같아 괴롭다. 더구나 히틀러가 가브치크와 쿠비시를 찾아 죽일 때까지 보복은 분명히 계속될 것이다. 지하실에 갇혀 있다시피 한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초조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또 하다가 마침내 한 가지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두 사람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무모한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두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p.391-392)
나치의 공분과 대대적인 보복, 협박과 회유, 2천만 크라운의 현상금, 배신으로 밀고자의 발생, SS 대원 팔백 명을 투입, 최후의 저항... 1942년 6월 18일 정오 12시에 네 발의 총성과 함께 소란스러운 총격은 멈춘다.
1부는 역사적인 배경과 주요 인물에 관한 내레이션으로 되어 있고, 2부는 유인원 작전의 과정과 최후의 순간을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침탈의 역사와 이것에 저항하는 민족의 투쟁이 우리의 모습하고 매우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191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쓰러뜨린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22일 새벽 천여 명의 무장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한 발로 자결한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홍구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단상의 고위 관료를 향해 폭탄을 던진다. 1942년보다 한발 앞선 우리 선조들의 저항이 더욱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