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 온 아이
에오윈 아이비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에오윈 아이비, 이원경 역, [눈에서 온 아이], 비채, 2016.

Eowyn Ivey, [THE SNOW CHILD], 2012.

  대학 시절, 그러니깐 처음 성인이 된 후에... 이전에는 남녀가 아무리 가까워도 미성년이라 어른들은 무조건 우정의 범주에서 이해하려 했다... 이성으로 만났던 친구는 자기가 겨울에 태어난 것을 무슨 주문처럼 얘기하고 다녔는데,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는지 주위의 친구들은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가수의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었다. 노래에 별다른 소질이 없었던 나는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카드를 썼고... 졸업과 함께 그녀는 어디론가 시집을 가버렸다.

  나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태어났다. 기독교 절기 중의 하나인 부활절(Easter)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지만,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고 생명이 초록빛 싹을 틔우는 계절이 왔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돌아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읽었을 때... 눈으로 만들어진 소녀... 그래서 더위보다는 추위에 강하고, 무더운 여름에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서늘한 곳에서 지내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이 내리는 계절에 다시 돌아오는... 겨울 철새의 이동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아름답다.

  메이블이 말했다.

  "소녀를 만들자. 작은 여자아이."

  잭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을 대로 해."

  눈밭에 꿇어앉은 메이블은 눈 소녀의 밑 부분을 바깥으로 펼쳐진 치맛자락 모양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쓰다듬어 올라가며 눈을 깎아 호리호리한 윤곽을 빚어내자, 마침내 눈사람이 작은 아이처럼 보였다. 메이블이 일어서서 보니, 잭은 주머니칼로 얼굴을 새기고 있었다.

  "다 됐어"(p.64-65)

  숲가에 다다라 눈 쌓인 나뭇가지 사이로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고작 백 미터쯤 너머에 그 아이가 있었다. 메이블 쪽으로 등을 돌리고 웅크린 소녀는 그녀가 만든 파란색 양털코트 위로 옅은 금발을 늘어뜨렸다. 불러야 하나 싶어 메이블이 목청을 가다듬자, 그 소리에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 벌떡 일어난 소녀는 눈밭에 놓인 작은 자루를 집어 들고 달아났다. 가장 큰 가문비나무 뒤로 사라지기 직전에 소녀가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자, 메이블은 소녀의 반짝이는 파란 눈과 작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았다. 기껏해야 여덟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p.81)

  에오윈 아이비의 소설 [눈에서 온 아이]는 그녀의 고향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1920년대의 이야기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는 지금으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지만, 수명이 짧았던 당시에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잭과 메이블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살다가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후에 주변 사람들의 입방아를 견디지 못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개척의 땅으로 이주한다. 둘만의 평온을 찾기 위해 찾아온 땅이었지만, 알래스카는 춥고 척박하다. 가장 큰 문제는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이들에게 희망이 남아 있을까? 그러던 중에 우연히 만든 눈사람 소녀... 이후에 한 작은 소녀가 이들 부부 앞에 나타나고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

  우리가 널 뭐라고 부르면 좋겠니? 계속 '아가야'라고 할 수는 없잖아?

  소녀는 말이 없었다. 잭은 아이에게서 이름을 듣기는 글렀다고 생각한 듯 손을 뻗어 소금을 집어 갔다. 메이블은 기다렸지만, 잭은 다시 먹기 시작했다.

  파이나. 소녀가 소곤소곤 말했다.

  그게 뭔데? 메이블이 물었다.

  내 이름요. 파이나.

  다시 말해줄래? 조금 천천히?

  파-이-나.(p.165-166)

  안타깝게도 이야기는 전부 하나같이 슬프게 끝나. 눈 소녀는 겨울만 되면 찾아오지만 결국 녹아버리고 말지. 마을 애들이랑 놀다 모닥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봄이 오기 전에 미처 달아나지 못하거나, 아버지의 책에서처럼 한 젊은이를 만나 사랑에 빠져서 말야.(p.177)

  작가는 러시아의 전래동화 [눈 소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한때는 러시아의 땅이었고, 자신이 나고 자란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기본 골격은 비슷하게 이루어져 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첫 번째 겨울을 보내고 만든 눈사람, 그리고 이후에 나타난 소녀, 봄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겨울이 오면 다시 찾아오는 신비로운 소녀... 6년의 세월이 흐르고, 부부는 이웃의 도움으로 땅을 개간하고 밭을 일구어 그 땅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겨울마다 찾아오는 소녀는 어느덧 처녀로 자라나 사랑에 빠지는데...

  저게 내 이름의 뜻이에요. 파이나가 여전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산?

  아뇨. 저 빛이요. 아빠는 해가 저물 때 보이는 눈의 색을 내 이름으로 지었어요.

  산 노을. 메이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p.345)

  ......희망은 날개가 있어...... 영혼에 둥지를 트나니....... 맺어진 인연의 끈을 놓지 말 것이며...... 그러겠습니까?...... 어서...... 어서...... 울창한 숲으로 달려가...... 내 머리맡에 장미를 놓지 말고...... 그러겠습니까?......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죽음이 둘을......

  네......

  네......

  네......

  네......(p.480)

  소녀, 아니 처녀가 된 파이나의 임신, 결혼식... 그리고 가정생활과 출산... 하지만 눈에서 온 소녀는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전래동화가 비극으로 끝나듯이 파이나는 어디론가 떠나는데... 작가는 마지막을 약속의 희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글을 읽으면서 내내 감탄한 것은 유려한 문체 때문이다. 번역가 이원경의 약력을 살펴보니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그 실력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이 걸림돌 없이 읽히는 문장은 정말 최고이다. 원작을 찾아서 비교하며 읽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길 정도인데, 아쉽게도 국내의 인터넷 서점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유려한 문체의 아름다운 겨울 소녀 이야기는 첫눈이 내리는 요즘 같은 계절하고 매우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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