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야쿠마루 가쿠, 김성미 역, [돌이킬 수 없는 약속], 북플라자, 2017.

Yakumaru Gaku, [SEIYAKU], 2015.

  인터넷 서점에 들어갈 때마다 인기도서로 눈에 띄는 책이 있다. 소설 부문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현대문학, 2012.), 손원평의 [아몬드](창비, 2017.) 그리고 야쿠마루 가쿠의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 그렇다. 오래 전에 절박함으로 했던 약속,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이 책의 원제는 [誓約](서약)이다.

  히스란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의 황무지와 거기서 군생하는 키 작은 식물을 말한다.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8월 하순에서 9월에 걸쳐 황량한 대지 일대에 히스와 엉겅퀴 꽃들이 핀다고 한다.(p.22)

  야쿠마루 가쿠는 일본의 소년법을 소재로 사회파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이다. [천사의 나이프](황금가지, 2009.) 등 그의 작품은 소년법 개정에 공헌할 정도로 유명한데, 이번에는 소재를 바꾸어 약속(서약)에 관해서이다. 작가로서 2막을 열었다는 평가, 과거를 회상하며 복선과 암시로 전개하는 이야기 구조는 박진감과 긴장감이 흐른다.

  나는 봉투를 뒤집어 발신인을 보았다. 주소는 쓰여 있지 않고 '사카모토 노부코'라고만 되어 있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이윽고 그 이름의 주인에 생각이 미치자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해지고 봉투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봉투 입구를 뜯고 안에 든 편지지를 빼냈다.

  "그들은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편지지에는 그것만 적혀 있었다.(p.28-29)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봉투를 뜯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당신을 지켜봤습니다만, 정말로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기나 한 건가요? 지금 당신이 행복한 것은 나와 그 약속을 한 덕분 아닙니까? 만약 당신이 이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 주변에도 나와 똑같은 재앙이 덮칠지도 모릅니다."(p.50-51)

  봉투 안에는 몇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장은 운동복 차림으로 담배를 피며 파친코를 하고 있는 중년남성의 사진이다. 또 다른 한 장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중년남성의 옆얼굴이었다. 모두 멀리서 몰래 찍은 것 같은 사진이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각각 가도쿠라 도시미츠와 이이야마 켄지인 것일까?

  나머지 한 장의 사진을 더 본 순간, 심장을 예리한 것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공원에서 놀고 있는 호노카의 사진이었다.(p.104-105)

  "언제쯤 약속을 지켜줄 건가요?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살펴봐 왔습니다. 약속을 지켜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당신은 전혀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지 않아요. 할 수 없이 그 남자들의 소재를 알려주는 준비까지 해줬는데 당신은 내 말을 계속 무시하고 있어요."(p.133)

  무카이 사토시는 바텐더로 히스(HEATH)의 공동창업주이다. 아내와 딸, 가게의 동업자와 직원들, 안정되고 평탄한 삶에서 사카모토 노부코의 편지를 받는다. 그들이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어서 약속을 지키라는,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덮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다카토 후미야였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크게 뒤덮은 멍 때문에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자라며 괴물로 불리었다. 폭력성으로 소년원을 들락거리고, 범죄에 가담해서 야쿠자에게 쫓기는 길바닥 인생이었다. 그러던 중 사카모토 노부코를 만나 한 가지 약속을 한다. 호적을 바꾸고, 성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비용으로 500만 엔을 줄 테니 딸의 복수를 해달라는 것이다. 딸을 유린하고 살해한 범인들이 무기징역을 살고 있다. 언젠가 그들이 출소하면 죽여달라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거래, 16년 전의 약속이다.

  "내일로 16년간 당신을 옥죄어왔던 것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약속을 완수한 기념으로 가게에서 건배라도 들면 좋겠지요."

  "너는... 너는 악마야. 사람이 아니야."

  나는 모든 증오를 퍼부어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사람이기라도?"

  비웃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p.177)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목숨의 가치라는 게 다른 것 같다.

  지금이니 드는 생각이지만, 그 무렵의 나는 내 목숨과 인생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있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그 무렵과 다르지 않겠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p.277-278)

  그런데 사카모토 노부코는 이미 오래전에 암으로 사망했다. 무심코 지내온 세월... 이제 와서 누가 편지를 보낸 것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두 사람을 찾아가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카토 후미야에서 무카이 사토시로 신분을 바꾼 것을 아는 사람은...? 편지의 압박은 거세지고, 과거의 범행이 드러나고, 딸이 납치되고... 주위의 눈을 피해 발신인을 찾아야 한다.

  소설은 마치 한 편의 스릴러, 로드 무비를 보는 듯하다. 현재를 조여오는 과거의 행적은 긴장을 놓을 수 없고, 반전의 타이밍은 적절하다.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논리를 끝까지 잘 유지하고, 인간의 본성, 원한과 복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에 관한, 지킬 수 없는 약속, 상황 윤리의 문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 약속을 또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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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사카 고타로, 김소영 역, [사신 치바], 웅진지식하우스, 2006.

Isaka Kotaeo, [SINIGAMI NO SEIDO], 2005.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사카 고타로는 일본소설을 읽는다면 누구나 좋아하는 작가이다. 수없이 회자된 이름인데, 그동안 나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사신 치바]는 처음으로 읽은 소설이다. 혹시나 해서 책장을 찾아보니 [골든 슬럼버](웅진지식하우스, 2008.)를 가지고 있다. 들은 소문만으로 기대가 컸던 것일까? 15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별점은 달랐겠지...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을 주인공으로 6개의 단편은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게 한다. 참고로 작가는 치바현 출신이다.

  치바는 정확하다

  치바와 후지타 형님

  산장 살인사건

  연애 상담사 치바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

  치바 vs. 노파

  경험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 죽음에 관한 많은 종교적, 철학적, 생물학적 사고가 있지만, 이번에는 사신(死神)이 등장하는 문학적 사고이다. 사신이 일하는 세계관, 치바라는 사신 캐릭터... 시작은 좋다.

  내가 일을 할 때면 늘 날씨가 안 좋다. '죽음을 다루는 일'인 만큼 으레 날씨도 궂은 거겠지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다른 동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우연인가 싶다.(p.15)

  찬찬히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번의 내 모습은 젊은 여성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외모일 터였다. 패션잡지의 남성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20대 초반의 청년. 설정이 그렇다고 정보부에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네들은 조사 때마다 가장 일하기 좋은 인물상을 이끌어내서 우리의 외모나 나이를 결정한다.(p.17)

  "아까는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놀랐어요." 내가 맨손으로 건드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는 설명할 수 없는 법. 우리가 맨손으로 만지면 인간의 수명이 일 년 단축되긴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오늘내일 죽게 되어 있으니까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p.20)

  "치바라고 해요." 나는 대답했다. 일을 맡아 파견될 때는 이름이 붙는데, 하나같이 거리나 도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모습이나 나이는 그때그때 바뀌지만 이름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관리상의 편리 때문이리라.(p.20)

  "수명 전에 죽는 경우도 있어요. 돌발적인 사고나 예기치 못한 사건 같은 것들은 대체로 수명이 아니에요. 화재나 지진, 익사 같은 거. 그런 것들은 수명과는 별개로 나중에 정해지는 거죠."(p.27)

  상대를 직접 만나보고 조사를 해서 '죽음'을 실행하기에 적합한가 어떤가를 판단하여 보고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조사라고는 하나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일주일 전에 상대와 접촉해서 두세 번 이야기를 듣고 '가(可)' 혹은 '보류'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이 조사제도는 형식적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 판단 기준이라는 게 사신의 재량에 맡겨져 있어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가'를 보고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p.28)

  우리는 일주일간의 조사가 끝나면 담당 부서에 결과를 보고한다. 그 결과가 '가'일 경우(하기야 대부분이 '가'이지만), 그 다음 날인 여드레째 되는 날에 '죽음'이 실행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 실행을 끝까지 확인해야만 일을 끝낸 셈이 된다.

  덧붙여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담당했던 인간이 어떤 식으로 죽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사전에 통지받지 않는다. 조사 기간인 일주일 동안 사인이 발생하는 경우도 없고, 예를 들어 엿새째에 입은 상처가 덧나 여드레째에 사망한다는 식의 사례도 없기 때문에 확인의 시간이 올 때까지 그네들이 어떠한 형식으로 죽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p.30)

  내 동료들은 일하는 사이사이 짬이 나면 음반 매장에서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다. 한눈팔지 않고 귀에 헤드폰을 댄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손님이 있다면, 아마 나 아니면 내 동료일 것이다.(p.30)

  내 일은 일주일 동안 후지타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고, 그 결과 그가 죽을 만한지 어떤지를 보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후지타를 만나지 않고 보고만 해도 된다. 보고를 '가'로 정해두면 문제가 없다. 내 동료 중에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보고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착실하게 일하는 타입이다. 성실함이라든가 책임의식을 갖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따라서 좀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서라도 후지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p.60)

  물론 인간은 최종적으로는 죽게 되어 있다. 다만 가까운 장래의 일만을 말하자면, 내 보고가 나오지 않는 이상 후지타의 죽음은 확정되지 않는다. 자살이나 병은 사신의 관할 밖이지만 조사 기간 동안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는다.(p.81)

  나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영양분을 섭취할 필요도 없다. 식사에 흥미는 없었지만 아무튼 2인분의 요리를 먹었다.(p.122)

  곧잘 오해를 받곤 하는데, 우리 사신은 자살이나 병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가령 '불시에 차에 치여서'라든가, '느닷없이 나타난 노상강도에게 찔려서'라든가, '화산폭발로 집이 무너져서' 같은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행하고 있지만 그 이외의 것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진행중인 병이나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받은 극형, 빚에 시달리다 못한 자살 등은 우리 사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들이 때때로 "암이라고 하는 사신에 걸려들어서" 같은 수사법을 구사하면 "뭉뚱그려서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하며 우리는 분노에 떤다.(p.167)

  천사는 도서관으로 모이고, 사신은 음반 매장에서 모인다. 작가적 상상력은 아주 대단하다. 사신은 정보부에서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모습을 바꾸어 조사 대상(곧 죽을) 사람에게 접근한다. 일주일간 죽음이 적합한지를 판단해서 보고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죽음이 정해져 있고 여덟 번째 날에 실행된다. 사신은 고통이나 맛을 느낄 수 없고, 감정도 없다. 오직 음악을 좋아할 뿐이다. 사신 치바는 비를 몰고 다니며 가끔 대화의 초점이 어긋난다.

  죽음을 맞이하는 여섯 사람은 나름의 사연을 안고 있다. 그래서 죽기를 원하는 이가 있고,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면,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도 있다. 후지키 가즈에는 대기업 전자제품 제조회사에서 고객 불만 처리를 담당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요구를 하는 전화로 골머리를 앓는다. 후지타는 야쿠자의 중간 보스로 의협심이 강한 남자이다. 그는 형님의 복수를 위해 죽음의 길로 뛰어든다. 거친 눈보라 속 산장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씩 죽어 간다. 오기와라는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호감을 사고 사랑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사신이 찾아왔다. 모리오카는 살인하고 도주 중이다. 그는 옛 기억을 찾아 마지막 여행을 한다. 미용실을 경영하는 니타 할머니는 사신을 알아보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치바는 정확하다'는 마지막 반전이 돋보이고, '치바와 후지타 형님'은 논리적인 전개가 눈에 띈다. '산장 살인사건'은 한 편의 추리극을 보는 기분이고, '연애 상담사 치바'는 여운이 남는다.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는 막장에 몰린 인간의 본성을 볼 수 있고, '치바 vs. 노파'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임박한 죽음의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세계관과 캐릭터의 설정이 가장 큰 장점이다. 취향의 차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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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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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라 유, 정수윤 역, [유랑의 달], 은행나무, 2020.

Nagira Yuu, [RUROU NO TSUKI], 2019.

제17회 서점대상

  나는 문학성과 대중성의 사이에서 서점대상을 받은 소설을 좋아한다. 코로나19로 답답한 생활에서 인생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어쩌면 이렇게 구구절절 애잔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소설 [유랑의 달]은 올해 읽은 최고의 작품이다. 주인공 여자와 남자의 심리 묘사가 매우 뛰어난데, 사쿠라바 가즈키의 소설 [내 남자](재인, 2008.)가 떠오른다. '유랑(流浪)'이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인생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의 재미와 글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내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이유는 '이상한 집에 사는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반 아이들은 우리 엄마가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고 수군거렸다. 마음이 내킬 때만 요리를 하는 것도, 가끔씩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것도, 집에서 과격한 성인용 영화를 보는 것도, 엄마와 아빠가 키스를 하는 것도, 반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일인 모양이었다.(p.20)

  -다카히로가 죽었으면 좋겠어.

  -운석이라도 떨어져서 지구가 박살 나든가.

  다카히로 한 사람의 죽음이 전 인류의 죽음과 동등해져 있었다. 그 정도로 그 녀석이 싫었다. 정말로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내가 죽거나. 내가 죽는 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p.31)

  십 대 여자아이와 젊은 남녀가 패밀리 레스토랑에 있다. 수수께끼 같은 짧은 도입,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의문과 궁금증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나이 사라사는 가끔씩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등 이상한 집에 사는 아이였다. 사실 남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그들만의 재미가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모든 것이 뒤바뀐다. 초등학교 4학년, 아홉 살 소녀는 이모 집에서 애물단지로 지내다가 공원에서 만난 낯선 남자를 따라간다.

  남자는 비닐우산을 내 머리 위로 가져왔다.

  "우리 집에 올래?"

  그 말이 따뜻한 빗물처럼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달콤하고도 서늘한 것에 잠겨 든다. 전신을 뒤덮었던 불쾌함이 씻겨나간다.

  "갈래."(p.32)

  후미는 나에게 제대로 하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처럼 다른 아이들하고 일제히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나를 곤란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뭐든 제대로 하는 후미 옆에서 뒹굴뒹굴 만화나 보고 있어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후미는 그저 후미대로 단정한 생활을 계속했다. 후미 자신이 똑바로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똑바로 하는 것은, 후미에게 별개의 일이었다.(p.51)

  사에키 후미의 집에서 모처럼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피자를 시켜 먹고, 이불에서 뒹굴며 저녁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잠시 부모님과 살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더불어 아늑함과 안전함, 하지만 열아홉 살 대학생이 아홉 살 여자아이를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실종 소식이 TV 뉴스를 장식하고, 세상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끝이 정해진 두 달의 동거는 진실과는 다르게 로리콘 유괴범과 그로부터 몹쓸 짓을 당한 가여운 피해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나는 엄마에게 있어 살아남는 데 필요한 밥도 아니었고, 슬픔을 덜어줄 과자도 아니었다. 엄마가 그토록 싫어하는 '무거운 짐'이었다. 엄마는 무거운 짐을 들지 않았다. 엄마는 참지 않는 사람이었다.(p.65)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나의 이름은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보에 목덜미가 잡혀 초중고, 아르바이트, 직장에서도 내가 '가나이 사라사 양 유괴사건'의 피해 아동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퍼져나갔다.

  -너, 유괴된 동안 온갖 짓 다 당했지?

  다카히로의 그 말은 세상이라는 것의 정체를 꽤나 잘 드러낸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은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고 아연했다. 위로나 배려라는 선의의 형태로 '상처 입은 불쌍한 여자아이'라는 도장을,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쾅쾅 찍어댄다. 다들 자기가 상냥하다고 생각한다.(p.84)

  후미의 방보다 더 위로 시선을 가져갔다. 여름날 사위는 빨리 밝아와, 동쪽 하늘에 화염처럼 붉은 장미꽃색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밤의 영역에는 아직도 어렴풋한 흰 달이 걸려 있다.

  곧 사라지겠네. 마치 나 자신처럼 여겨졌다.

  목이 잘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가만히 옆은 달을 올려다본다.

  그런데도 달은 언제까지나 그곳에 더 있었고, 내 목도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p.149-150)

  이즈미가 해준 이야기와는 꽤나 분위기가 다르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하지만 아마도 진실 따위는 없으리라. 이즈미에게는 이즈미의, 료에게는 료의 각기 다른 해석이 있을 뿐. 나도 똑같다. 내가 아는 후미와, 세상이 아는 후미는 전혀 다르다. 그 사이에서 발버둥 친다. 료도 그럴까.(p.162-163)

  후미는 그렇게 말한 뒤, "들어올래?"하고 물었다. 후미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다. 그날은 비가 왔고, 후미는 남색 모카신을 신었고, 내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우리 집에 올래?

  달고도 차가운 얼음사탕 같은 목소리가, 내 위로 미지근한 빗방울처럼 부드럽게 떨어졌다. 15년이 지난 오늘 밤도, 나는 그날과 똑같이 쉽게 녹아들었다.

  "갈래."(p.191)

  "사라사, 요즘도 저녁으로 아이스크림 먹니?"

  맥락 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어째서?"

  "이젠 아이가 아니니까."

  지루한 이유다. 하지만 지루함의 집합체가 일상이다.(p.206)

  "그럼 서로 맘이 같네. 사귀어버려."

  "그거랑 좀 달라. 더 절실하게 좋아해."

  "절실하게?"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 없어선 안 되는 것, 같은."(p.293-294)

  이모 집에서 보육원으로, 새로 사귄 남자 친구에게로... 그녀는 안식처가 없는 유랑하는 달이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세상은 혐오스러운 눈빛과 불편한 친절을 베푼다. 인간관계에서 연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터넷 사건 기록은 가는 곳마다 발목을 잡는다. 사실하고 다른 진실을 믿어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 어느 뒷골목 빌딩 2층에 있는 카페 calico에서 후미를 만난다. 그로부터 15년, 후미는 서른네 살이 되어 있다.

  일반적인 남과 여의 사랑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절실한 사랑, 놓을 수 없는 인연의 끈... 두 사람이 함께하지 않으면 불안정한 삶이 되고 마는... 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고, 다른 한 사람은 기대와 희망에서 어긋나버린... 불완전하기에 둘은 절대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는 사실과 그들이 간직한 진실은 다르기에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함께 한다. 등장하는 인물의 우울한 사연을 심미적으로 풀어내어 상처 입은 인생을 보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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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게임
야나기 코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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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야나기 코기, 한성례 역, [조커 게임], 씨엘북스, 2014.

Yanagi Koji, [JOKER GAME], 2008.

제30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제6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블로그 이름을 바꿔야 하나? 올린 글이 원본인데도 자꾸 유사 문서에 포함된다. 소설 [조커 게임]은 도서 리뷰인데, 어쩌면 불법 도박하고 관련한 오해를 일으켜 검색 반영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 정성스럽게 쓰는 글인데, 늘 아쉬움이 있다. 최근에 중고서점 이용에 재미를 붙였고, 책을 좀 꾸준히 읽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쉬운... 그래서 선택한 첩보 미스터리이다. 신선한 소재가 마음에 든다.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된 5개의 단편 모음이다.

  조커 게임

  유령

  로빈슨

  마의 도시

  더블 크로스

  하나의 세계관이란, 1930년대 후반 일본 육군은 비밀리에 스파이 양성학교를 설립한다. 일명 D기관, 유키 중령을 중심으로 여기에 소속된 요원의 이야기이다. 책을 펼치기 전까지 몰랐는데, 현대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별의별 생각이 들었고, 절대 공감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다행히 우리와는 연관이 없고, 당시 시대를 풍자하고 있어서 나름 흥미로웠다. 첩보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끝은 추리식 결말로 누가? 왜? 어떻게? 를 설명하는 오락성 작품이다.

  '스파이처럼 잔꾀나 부리는 짓은 예부터 내려온 우리 일본 무사도에 반하는 행위'라고 공공연히 토로하며 스파이 양성을 탐탁지 않아 하는 고위 간부들도 적지 않았다.(p.16)

  '군인이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p.17)

  "지방인(地方人)을 암만 훈련시켜봐야 반쪽짜리 군인 밖에 될 수 없다. 그런 녀석들에게 절대로 군사 기밀을 맡길 수 없다!"라고 잘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방인'이란 군대용어로 군인 이외의 민간인을 말한다. 재학시절부터 군인정신을 철저히 교육받은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라면 몰라도 일반대학을 나온 학생을 신뢰하라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p.17)

  마왕으로 불리는 유키 중령은 전설의 스파이였다. 적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모진 고문으로 신체의 일부를 잃는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빈틈을 노려 탈출에 성공, 획득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더는 스파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스파이 양성학교에서 후학을 기르는 일을 하게 된다. 군인이 아닌 스파이를 만드는 과정은 선발부터 훈련 내용 모든 것이 다르다. 태평양전쟁(1941-1945년) 바로 직전의 일본 육군은 일왕주의와 군국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사무라이 정신의 오만함은 극에 달했고...

  "잊지 말게. 여기는 스파이 양성학교다. 이 녀석들은 여기를 나가면 세계 각지로 흩어져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야만 하지. 외교관 꽁무니나 따라다니며 이삼 년 보내다가 귀국하는 속 편한 무관 따위와 차원이 달라. 십 년, 이십 년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낯선 타국 땅에서 지내야 한다. 침투한 지역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어 그 나라의 정보를 모으고 본국으로 보내는 일을 오로지 홀로 해 나가는 거야. 누구에게도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되고 비상사태가 발생해도 의논할 곳이 없어. 임무에 실패해 적에게 발각될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그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그 고독한 생활이 자네는 상상이 가나?"(p.32-33)

  "우리 대영제국에 이런 속담이 있네. '스파이는 더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신사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p.76)

  스파이는 군인과 철저히 구분된다. 죽으면 안 되고, 누군가를 죽여서도 안 된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 일본 육군은 스파이를 잔꾀나 부리는 것으로 배척하지만, 영국은 스파이를 신사로 취급한다. D기관에서 훈련한 요원에게 임무가 주어진다. '조커 게임'은 일본에 거주하는 미국인 기술자 존 고든의 스파이 혐의를 입증해야 한다. '유령'은 요코하마에 있는 영국인 총영사 어니스트 그레이엄이 폭발물 테러의 용의자인지를 조사해야 한다. '로빈슨'은 런던에서 활동 중인 요원의 신분이 노출되어 영국 정보부에 의해 납치, 감금된다. '마의 도시'는 상하이 조계 지역에서 발생한 일본인 헌병 살인 사건과 폭탄 테러를 조사해야 한다. 더블 크로스는 도쿄에서 독일과 소련의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던 독일인 카를 슈나이더의 죽음을 밝혀야 한다. 각각의 단편은 나름의 반전과 속 시원한 결말이 있다.

  "미스터 가모, 당신이니 하는 얘기지만 지금 일본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어요. 특히 최근 중국 대륙에서 자행한 일본군의 행각은 해도 너무해요. 이대로라면 일본은 세계적으로 고립될 거예요. 일본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해 볼 생각인가요? 우리 집에까지 스파이를 보내다니 파렴치한......"(p.77)

  "심장이 멈추지 않는 한 무슨 수를 써서든 탈출하라. 그리고 캐낸 정보를 본국으로 가지고 돌아와라. 이게 바로 제군들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정신력이나 일본 남아의 고유한 정신 같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다."(p.142)

  조사 결과 런던 주재의 한 외교관이 암호도 쓰지 않고 일본어로 국제전화를 한 것이 문제였음이 밝혀졌다.

  육군은 조속히 외무성에 다음과 같은 엄중한 요구를 했다.

  '군의 기밀사항에 관해서는 최소한 암호를 사용할 것. 국제전화는 도청당하고 있으므로 통화 시 최대한 주의를 기울일 것.'

  그러나 외무성은 '신이 수호하는 우리 일본어는 아주 특수하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신사의 나라 영국이 외교관의 전화를 도청한다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해당 기밀이 누설된 것은 우리 탓이 아니라'라며 딱 잘라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p.185)

  스파이 활동은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오늘날하고는 차이가 있지만, 따라서 활동하는 내용도 차이가 있다. 당시에도 스파이의 기본 능력은 아주 출중했다.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보를 빼내는 기술... 소설은 스파이의 허황한 활약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나 사건을 참고해서... 작가적 상상력은 논리를 기반으로 짜임새 있는 한편의 미스터리를 완성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만행과 무모한 희생을 지적하고, 황당한 논리를 풍자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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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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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타 사야카, 김석희 역, [편의점 인간], 살림, 2016.

Murata Sayaka, [KONBINI NINGEN], 2016.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그저께 뒤통수를 세게 한 방 맞았다! 신의(信義), 믿음과 의리는 없다.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에 못을 박는다. 집에 와서 마음을 잡고 [편의점 인간]을 읽었다. 편의점(便宜店)이 주는 일상의 편리함이 있다. 무라타 사야카는 대학 시절부터 18년 동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했다고 한다. 작가로서 좋은 경험이었을까? 누구보다 완전한 편의점 인간인 그녀는 소설 [편의점 인간]을 내놓았다. 오랜 경험과 하나의 큰 화두... 매우 사실적이면서 아주 독특한 이야기이다.

  편의점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손님이 들어오는 차임벨 소리에, 가게 안을 흐르는 유선방송에서 신상품을 소개하는 아이돌의 목소리. 점원들이 부르는 소리, 바코드를 스캔하는 소리. 바구니에 물건 넣는 소리, 빵 봉지 쥐는 소리, 가게 안을 돌아다니는 하이힐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뒤섞여 '편의점의 소리'가 되어 내 고막에 거침없이 와 닿는다.(p.9)

  지문이 묻어 있지 않도록 깨끗이 닦은 유리창 밖으로 바쁘게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의 시작. 세계가 눈을 뜨고, 세상의 모든 톱니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하는 시간. 그 톱니바퀴의 하나가 되어 돌고 있는 나. 나는 세계의 부품이 되어 이 '아침'이라는 시간 속에서 계속 회전하고 있다.(p.13)

  대학생, 밴드를 하고 있는 젊은 남자, 프리터, 주부,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 등 다양한 사람이 같은 제복을 입고 '점원'이라는 균일한 생물로 다시 만들어져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날의 연수가 끝나자 모두 제복을 벗고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꼭 다른 생물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p.27)

  나는 종종 탁상 계산기로 그날부터 지난 시간을 계산해 볼 때가 있다. 스마일마트 히이로마치 역전점은 하루도 쉬지 않고 불을 켠 채 계속 돌아가고 있다. 요전 날 가게는 열아홉 번째 5월 1일을 맞았으니까 그로부터 15만 7,600시간이 지난 셈이다. 나는 서른여섯 살이 되었고, 가게와 점원으로서의 나는 열여덟 살이 되었다. 그날 나와 함께 연수를 받은 점원은 이제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점장도 여덟 명째다. 가게의 상품도 그날의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점원으로 남아 있다.(p.32)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같은 옷을 입고 일하다가도 일이 끝나면 모두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스마일마트 히이로마치 역전점은 1998년 5월 1일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불을 켠 채 계속 돌아가고 있다. 서른여섯 살인 후루쿠라 게이코는 이곳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수많은 톱니바퀴 중의 하나가 되어, 세계의 부품으로 작동하고 있다. 세상은 점점 변화하고 있지만, 그녀는 18년 동안 점원으로 남아 있다.

  왜 편의점이 아니면 안 되는지, 평범한 직장에 취직하면 왜 안 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서 '점원'이 될 수는 있어도, 매뉴얼 밖에서는 어떻게 하면 보통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전혀 모르는 채였다.(p.33)

  나는 고향 친구를 만날 때는 지병이 좀 있고 몸이 약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하는 곳에서는 부모님이 병약해서 보살펴야 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해두었다. 이 두 종류의 변명은 여동생이 궁리해주었다.(p.51)

  빨리 편의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에서는 일하는 멤버의 일원이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이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관계없이, 같은 제복을 몸에 걸치면 모두 '점원'이라는 균등한 존재다.(p.54)

  보통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흔히 주변에서 말하는 나잇값을 제대로 하면 되는가? 적당한 때 취업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승진하고, 집을 사고, 노후를 대비하는 삶.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기준(틀)에 맞으면 비로소 보통의 인간이 되는가... 알게 모르게 우리는 사회의 요구와 간섭에 길들어 있다. 그런데 후루쿠라 게이코는 앞서 말한 보통의 인간하고는 거리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조금 이상하고, 특이한 아이로 지목된다. 그녀는 정확한 매뉴얼이 있는 편의점에서 일한다.

  가게 주위를 걷는 것은 편의점 점원에게 중요한 정보 수집이기도 하다. 인근의 식당이 도시락을 팔기 시작하면 편의점 매상에 영향을 미치고, 새로 공사가 시작되면 거기서 일하는 손님이 늘어난다. 가게가 오픈한 지 4년째, 근처에 있는 경쟁 가게가 망했을 때는 힘들었다. 그쪽 가게를 이용하던 손님들이 우리 가게로 몰려드는 바람에 점심 피크타임이 끝나지 않아서 잔업을 해야 했다. 도시락이 부족하여 점장이 본사 직원에게 수요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야단을 맞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는 이 거리를 점원으로서 정신 바짝 차리고 찬찬히 살펴보면서 걸어 다닌다.(p.55-56)

  "이 가게는 정말이지 밑바닥 인생들뿐이에요. 편의점은 어디나 그렇지만,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주부, 이렇다 할 장래 설계도 없는 프리터, 대학생도 가정교사 같은 수지맞는 아르바이트는 할 수 없는 밑바닥 대학생뿐이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돈 벌러 온 외국인이죠. 정말로 밑바닥 인생뿐이에요."(p.86-87)

  누군가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을 밑바닥 인생으로 폄훼한다. 제대로 된 취업이 아니라 시간제로 일하는 임시직, 주 수입의 부족을 채우기 위한 부업, 잠시 거쳤다 지나가는 아르바이트, 외국인이 일하는 곳... 그러나 주인공은 편의점에서 좋은 부품으로, 늘 한결같이 일하고 있다. 주위 사람은 걱정스럽게 여기며 간섭하지만, 그녀는 편의점 인간으로 변함없는 날을 보낸다.

  편의점은 강제로 정상화되는 곳이니까, 당신도 곧 복원되어버릴 거예요.(p.90)

  "정말로 여기는 변함이 없어"(p.94)

  전화를 끊은 뒤,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편의점 점원으로 태어났을 때에 비하면 늙어 있었다. 거기에 불안은 없지만, 전보다 피로를 쉽게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정말로 늙어서 편의점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여섯 번째 점장은 허리가 아파서 일을 못 하게 되어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몸은 편의점을 위해 계속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p.96-97)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가족이 왜 그렇게 나를 고쳐주려고 하는지, 겨울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p.102)

  육체노동자는 몸이 망가지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성실해도, 분발하여 열심히 노력해도, 몸이 나이를 먹으면 나도 이 편의점에서 쓸모없는 부품이 될지도 모른다.(p.105)

  18년 동안 그만두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빈틈은 메워져버린다. 내가 없어진 자리도 깜짝할 사이에 충원되고, 편의점은 내일부터 전과 똑같이 굴러갈 것이다.(p.172)

  편의점에 최적화된 인간에게 세상의 간섭은 갈수록 더해진다. 변명 거리를 만들어 놓아도 왜 취업하지 않아? 왜 결혼하지 않아? 변화 없는 삶을 안쓰럽게 여기고, 삶이 고쳐지기를... 그렇지 않으면 삭제될 것이다. 존재하려면 세상에 길들어야 한다. 가족의 염려를 알 것 같지만, 변화는 쉽지 않다. 간섭하는 사회와 간섭받는 인간... 여기에 잘 순응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고작 편의점에서만 적응하는 인간도 있다. 작가의 거침없는 전개가 마음에 든다. 분명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데, 나는 코드가 맞아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편의점 인간이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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