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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평점 :
나기라 유, 정수윤 역, [유랑의 달], 은행나무, 2020.
Nagira Yuu, [RUROU NO TSUKI], 2019.
제17회 서점대상
나는 문학성과 대중성의 사이에서 서점대상을 받은 소설을 좋아한다. 코로나19로 답답한 생활에서 인생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어쩌면 이렇게 구구절절 애잔한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소설 [유랑의 달]은 올해 읽은 최고의 작품이다. 주인공 여자와 남자의 심리 묘사가 매우 뛰어난데, 사쿠라바 가즈키의 소설 [내 남자](재인, 2008.)가 떠오른다. '유랑(流浪)'이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인생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의 재미와 글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내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이유는 '이상한 집에 사는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반 아이들은 우리 엄마가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고 수군거렸다. 마음이 내킬 때만 요리를 하는 것도, 가끔씩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것도, 집에서 과격한 성인용 영화를 보는 것도, 엄마와 아빠가 키스를 하는 것도, 반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일인 모양이었다.(p.20)
-다카히로가 죽었으면 좋겠어.
-운석이라도 떨어져서 지구가 박살 나든가.
다카히로 한 사람의 죽음이 전 인류의 죽음과 동등해져 있었다. 그 정도로 그 녀석이 싫었다. 정말로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내가 죽거나. 내가 죽는 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p.31)
십 대 여자아이와 젊은 남녀가 패밀리 레스토랑에 있다. 수수께끼 같은 짧은 도입,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의문과 궁금증은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나이 사라사는 가끔씩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는... 등 이상한 집에 사는 아이였다. 사실 남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그들만의 재미가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모든 것이 뒤바뀐다. 초등학교 4학년, 아홉 살 소녀는 이모 집에서 애물단지로 지내다가 공원에서 만난 낯선 남자를 따라간다.
남자는 비닐우산을 내 머리 위로 가져왔다.
"우리 집에 올래?"
그 말이 따뜻한 빗물처럼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달콤하고도 서늘한 것에 잠겨 든다. 전신을 뒤덮었던 불쾌함이 씻겨나간다.
"갈래."(p.32)
후미는 나에게 제대로 하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처럼 다른 아이들하고 일제히 같은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나를 곤란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뭐든 제대로 하는 후미 옆에서 뒹굴뒹굴 만화나 보고 있어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후미는 그저 후미대로 단정한 생활을 계속했다. 후미 자신이 똑바로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똑바로 하는 것은, 후미에게 별개의 일이었다.(p.51)
사에키 후미의 집에서 모처럼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피자를 시켜 먹고, 이불에서 뒹굴며 저녁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잠시 부모님과 살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더불어 아늑함과 안전함, 하지만 열아홉 살 대학생이 아홉 살 여자아이를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실종 소식이 TV 뉴스를 장식하고, 세상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끝이 정해진 두 달의 동거는 진실과는 다르게 로리콘 유괴범과 그로부터 몹쓸 짓을 당한 가여운 피해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나는 엄마에게 있어 살아남는 데 필요한 밥도 아니었고, 슬픔을 덜어줄 과자도 아니었다. 엄마가 그토록 싫어하는 '무거운 짐'이었다. 엄마는 무거운 짐을 들지 않았다. 엄마는 참지 않는 사람이었다.(p.65)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나의 이름은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보에 목덜미가 잡혀 초중고, 아르바이트, 직장에서도 내가 '가나이 사라사 양 유괴사건'의 피해 아동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퍼져나갔다.
-너, 유괴된 동안 온갖 짓 다 당했지?
다카히로의 그 말은 세상이라는 것의 정체를 꽤나 잘 드러낸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혐오의 눈빛은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고 아연했다. 위로나 배려라는 선의의 형태로 '상처 입은 불쌍한 여자아이'라는 도장을,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쾅쾅 찍어댄다. 다들 자기가 상냥하다고 생각한다.(p.84)
후미의 방보다 더 위로 시선을 가져갔다. 여름날 사위는 빨리 밝아와, 동쪽 하늘에 화염처럼 붉은 장미꽃색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밤의 영역에는 아직도 어렴풋한 흰 달이 걸려 있다.
곧 사라지겠네. 마치 나 자신처럼 여겨졌다.
목이 잘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가만히 옆은 달을 올려다본다.
그런데도 달은 언제까지나 그곳에 더 있었고, 내 목도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p.149-150)
이즈미가 해준 이야기와는 꽤나 분위기가 다르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하지만 아마도 진실 따위는 없으리라. 이즈미에게는 이즈미의, 료에게는 료의 각기 다른 해석이 있을 뿐. 나도 똑같다. 내가 아는 후미와, 세상이 아는 후미는 전혀 다르다. 그 사이에서 발버둥 친다. 료도 그럴까.(p.162-163)
후미는 그렇게 말한 뒤, "들어올래?"하고 물었다. 후미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다. 그날은 비가 왔고, 후미는 남색 모카신을 신었고, 내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우리 집에 올래?
달고도 차가운 얼음사탕 같은 목소리가, 내 위로 미지근한 빗방울처럼 부드럽게 떨어졌다. 15년이 지난 오늘 밤도, 나는 그날과 똑같이 쉽게 녹아들었다.
"갈래."(p.191)
"사라사, 요즘도 저녁으로 아이스크림 먹니?"
맥락 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어째서?"
"이젠 아이가 아니니까."
지루한 이유다. 하지만 지루함의 집합체가 일상이다.(p.206)
"그럼 서로 맘이 같네. 사귀어버려."
"그거랑 좀 달라. 더 절실하게 좋아해."
"절실하게?"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 없어선 안 되는 것, 같은."(p.293-294)
이모 집에서 보육원으로, 새로 사귄 남자 친구에게로... 그녀는 안식처가 없는 유랑하는 달이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세상은 혐오스러운 눈빛과 불편한 친절을 베푼다. 인간관계에서 연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인터넷 사건 기록은 가는 곳마다 발목을 잡는다. 사실하고 다른 진실을 믿어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 어느 뒷골목 빌딩 2층에 있는 카페 calico에서 후미를 만난다. 그로부터 15년, 후미는 서른네 살이 되어 있다.
일반적인 남과 여의 사랑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절실한 사랑, 놓을 수 없는 인연의 끈... 두 사람이 함께하지 않으면 불안정한 삶이 되고 마는... 한 사람은 가는 곳마다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고, 다른 한 사람은 기대와 희망에서 어긋나버린... 불완전하기에 둘은 절대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는 사실과 그들이 간직한 진실은 다르기에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함께 한다. 등장하는 인물의 우울한 사연을 심미적으로 풀어내어 상처 입은 인생을 보듬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