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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ㅣ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사카 고타로, 김소영 역, [사신 치바], 웅진지식하우스, 2006.
Isaka Kotaeo, [SINIGAMI NO SEIDO], 2005.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사카 고타로는 일본소설을 읽는다면 누구나 좋아하는 작가이다. 수없이 회자된 이름인데, 그동안 나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사신 치바]는 처음으로 읽은 소설이다. 혹시나 해서 책장을 찾아보니 [골든 슬럼버](웅진지식하우스, 2008.)를 가지고 있다. 들은 소문만으로 기대가 컸던 것일까? 15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별점은 달랐겠지...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을 주인공으로 6개의 단편은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게 한다. 참고로 작가는 치바현 출신이다.
치바는 정확하다
치바와 후지타 형님
산장 살인사건
연애 상담사 치바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
치바 vs. 노파
경험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 죽음에 관한 많은 종교적, 철학적, 생물학적 사고가 있지만, 이번에는 사신(死神)이 등장하는 문학적 사고이다. 사신이 일하는 세계관, 치바라는 사신 캐릭터... 시작은 좋다.
내가 일을 할 때면 늘 날씨가 안 좋다. '죽음을 다루는 일'인 만큼 으레 날씨도 궂은 거겠지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다른 동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우연인가 싶다.(p.15)
찬찬히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번의 내 모습은 젊은 여성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외모일 터였다. 패션잡지의 남성 모델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20대 초반의 청년. 설정이 그렇다고 정보부에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네들은 조사 때마다 가장 일하기 좋은 인물상을 이끌어내서 우리의 외모나 나이를 결정한다.(p.17)
"아까는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놀랐어요." 내가 맨손으로 건드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는 설명할 수 없는 법. 우리가 맨손으로 만지면 인간의 수명이 일 년 단축되긴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오늘내일 죽게 되어 있으니까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p.20)
"치바라고 해요." 나는 대답했다. 일을 맡아 파견될 때는 이름이 붙는데, 하나같이 거리나 도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모습이나 나이는 그때그때 바뀌지만 이름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관리상의 편리 때문이리라.(p.20)
"수명 전에 죽는 경우도 있어요. 돌발적인 사고나 예기치 못한 사건 같은 것들은 대체로 수명이 아니에요. 화재나 지진, 익사 같은 거. 그런 것들은 수명과는 별개로 나중에 정해지는 거죠."(p.27)
상대를 직접 만나보고 조사를 해서 '죽음'을 실행하기에 적합한가 어떤가를 판단하여 보고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조사라고는 하나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일주일 전에 상대와 접촉해서 두세 번 이야기를 듣고 '가(可)' 혹은 '보류'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이 조사제도는 형식적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 판단 기준이라는 게 사신의 재량에 맡겨져 있어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가'를 보고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p.28)
우리는 일주일간의 조사가 끝나면 담당 부서에 결과를 보고한다. 그 결과가 '가'일 경우(하기야 대부분이 '가'이지만), 그 다음 날인 여드레째 되는 날에 '죽음'이 실행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 실행을 끝까지 확인해야만 일을 끝낸 셈이 된다.
덧붙여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담당했던 인간이 어떤 식으로 죽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사전에 통지받지 않는다. 조사 기간인 일주일 동안 사인이 발생하는 경우도 없고, 예를 들어 엿새째에 입은 상처가 덧나 여드레째에 사망한다는 식의 사례도 없기 때문에 확인의 시간이 올 때까지 그네들이 어떠한 형식으로 죽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p.30)
내 동료들은 일하는 사이사이 짬이 나면 음반 매장에서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다. 한눈팔지 않고 귀에 헤드폰을 댄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손님이 있다면, 아마 나 아니면 내 동료일 것이다.(p.30)
내 일은 일주일 동안 후지타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고, 그 결과 그가 죽을 만한지 어떤지를 보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후지타를 만나지 않고 보고만 해도 된다. 보고를 '가'로 정해두면 문제가 없다. 내 동료 중에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보고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착실하게 일하는 타입이다. 성실함이라든가 책임의식을 갖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따라서 좀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서라도 후지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p.60)
물론 인간은 최종적으로는 죽게 되어 있다. 다만 가까운 장래의 일만을 말하자면, 내 보고가 나오지 않는 이상 후지타의 죽음은 확정되지 않는다. 자살이나 병은 사신의 관할 밖이지만 조사 기간 동안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는다.(p.81)
나는 맛도 느끼지 못하고, 영양분을 섭취할 필요도 없다. 식사에 흥미는 없었지만 아무튼 2인분의 요리를 먹었다.(p.122)
곧잘 오해를 받곤 하는데, 우리 사신은 자살이나 병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가령 '불시에 차에 치여서'라든가, '느닷없이 나타난 노상강도에게 찔려서'라든가, '화산폭발로 집이 무너져서' 같은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행하고 있지만 그 이외의 것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진행중인 병이나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받은 극형, 빚에 시달리다 못한 자살 등은 우리 사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들이 때때로 "암이라고 하는 사신에 걸려들어서" 같은 수사법을 구사하면 "뭉뚱그려서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하며 우리는 분노에 떤다.(p.167)
천사는 도서관으로 모이고, 사신은 음반 매장에서 모인다. 작가적 상상력은 아주 대단하다. 사신은 정보부에서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모습을 바꾸어 조사 대상(곧 죽을) 사람에게 접근한다. 일주일간 죽음이 적합한지를 판단해서 보고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죽음이 정해져 있고 여덟 번째 날에 실행된다. 사신은 고통이나 맛을 느낄 수 없고, 감정도 없다. 오직 음악을 좋아할 뿐이다. 사신 치바는 비를 몰고 다니며 가끔 대화의 초점이 어긋난다.
죽음을 맞이하는 여섯 사람은 나름의 사연을 안고 있다. 그래서 죽기를 원하는 이가 있고,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면,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도 있다. 후지키 가즈에는 대기업 전자제품 제조회사에서 고객 불만 처리를 담당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요구를 하는 전화로 골머리를 앓는다. 후지타는 야쿠자의 중간 보스로 의협심이 강한 남자이다. 그는 형님의 복수를 위해 죽음의 길로 뛰어든다. 거친 눈보라 속 산장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씩 죽어 간다. 오기와라는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호감을 사고 사랑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사신이 찾아왔다. 모리오카는 살인하고 도주 중이다. 그는 옛 기억을 찾아 마지막 여행을 한다. 미용실을 경영하는 니타 할머니는 사신을 알아보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치바는 정확하다'는 마지막 반전이 돋보이고, '치바와 후지타 형님'은 논리적인 전개가 눈에 띈다. '산장 살인사건'은 한 편의 추리극을 보는 기분이고, '연애 상담사 치바'는 여운이 남는다. '살인 용의자와 동행하다'는 막장에 몰린 인간의 본성을 볼 수 있고, '치바 vs. 노파'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임박한 죽음의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세계관과 캐릭터의 설정이 가장 큰 장점이다. 취향의 차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