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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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하루오, 김은모 역, [방주], 블루홀6, 2023.

Yuki Haruo, [HAKOBUNE], 2022.

2022 주간 분슌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2022 MRC 대상 1위

작년, 2023년에 출간한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추천은 유키 하루오의 소설 [방주]이다. 아무래도 비슷한 책을 즐겨 읽는 사람끼리의 입소문이기에 의무감과 기대감이 있다. 방주(方舟)는 글자 그대로 '네모난 배'이지만, 대부분은 '노아의 방주'를 떠올린다. 아주 오래전 산꼭대기에 3층으로 만든 배에는, 대홍수가 땅의 모든 것을 앗아갈 때 보존한 생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티브로 하는 클로즈드 서클물인데, 완성도는 매우 높다.

산속에 묻힌 이 화물선 같은 지하 건축물에서 탈출하려면 아홉 명 중 누군가 한 명을 희생시켜야 하니까.

우리는 희생양을 선택해야 한다.

아니면 모두 죽는다.

어떻게 할까?

아홉 명 중 죽어도 되는 사람은, 죽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건 그를 죽인 범인밖에 없다.

범인을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제한 시간은 앞으로 약 일주일.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살인범을 찾아내야 한다.(p.9-10)

일종의 폐허 탐험, 대학 등산 동아리 출신 선후배 7명은 깊은 산속에 있는 지하 건축물을 찾는다. 맨홀 아래의 시설물은 오래된 화물선 분위기이고, 지하 1층과 2층은 각 20개의 방이 있고, 지하 3층은 물에 잠겨졌다. 과격파 또는 신흥종교의 비밀 공간으로 예상하는,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만든 곳이다. 싸늘한 밤공기를 피해서 하룻밤 머무는데, 길을 잃은 가족 3명이 합류한다.

"즉, 철골을 제거하고 이 방의 닻감개를 돌려서 바위를 아래로 떨어뜨리면 되는 거지? 하지만 그러면 닻감개를 돌리는 사람이 여기에 갇힌다는 건가."(p.69)

새벽에 지진과 산사태로 이들은 모두 고립된다. 커다란 바위가 지하 1층의 입구를 막았는데, 지하 2층의 닻감개를 돌려서 바위를 떨어뜨릴 수 있으나 그러면 닻감개를 돌린 사람은 떨어진 바위에 갇힌다. 더구나 지하 3층의 물이 불어나고 있어서... 한 명이 목숨을 희생해야 나머지가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행 중 한 사람이 목 졸려 살해된다. 지진, 고립, 수몰, 살인이라는 일련의 사건... 우리 중 누군가는 범인이고, 범인이 닻감개를 돌리는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다.

결국 범인이 왜 비상사태가 발생한 와중에 살인을 저질렀느냐는 막연한 수수께끼만 우리 앞에 버티고 있다. 풀어낸들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은 수수께끼다.(p.106-107)

어쩌면 누가 지하에 남을지 선택하는 일이, 유야와 사야카를 죽인 것보다 훨씬 잔인한 살인일지도 모른다. 다만 꼭 누군가 한 명을 정해야 한다면, 살인을 저지른 자를 선택해야 한다. 괴롭지만 그것이 최선책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p.176)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죽는 사람과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죽는 사람, 어느 쪽이 더 불행한지는 남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겠지."(p.231)

모두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굳이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누군가가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면, 범인이어야 한다는 합의는 올바른 결정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물은 점점 차오르고... 여기에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난다. 목이 잘린 시체, 대담한 범행... 연쇄살인 사건이다. 한정된 시간에 범인을 찾아야 하고,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그 과정이 치밀하고 논리적이다.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의 특징은? 외부하고 연락할 수 없는, 철저히 단절된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이어야 하고... 외부인의 소행이 아닌 정해진 숫자의 내부인 중에서 범인은 나름의 동기와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소설 [방주]는 웰메이드이다. 노아의 방주하고 비슷한 산꼭대기의 지하 3층 건축물은, 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물이 차오른다. 여기에서 연쇄살인의 동기는 분명하고, 이것을 밝히는 과정은 흥미롭다. 마지막 반전이 별점을 확~ 끌어올리는데,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한 충격이다. 일본 미스터리의 오락성이라는 측면에서 최고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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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로 양복점
가와세 나나오 지음, 이소담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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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세 나나오, 이소담 역, [이사부로 양복점], 황금시간, 2019.

Kawase Nanao, [Taylor Isaburo], 2017.

달콤한 힐링이 아닌 저항과 혁명에 관한 소설이다! 작가인 가와세 나나오는 패션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한다고 한다. 패션 디자인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이는데, 역발상 전략이었을까? [이사부로 양복점]은 코르셋을 소재로 한다. 코르셋은 여성의 허리를 조이는 기능성 속옷이고, 여성주의자에게는 억압의 상징이다. 그래서 여성 해방으로 탈코르셋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그런데 다시 코르셋을 입자는 괴이한 주장! 코르셋 혁명에 관해서이다.

내 인생은 앞으로도 쭉 변변찮을 것이 분명하다.

중학생 때 이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선 첫 번째 비극은 후쿠시마현의 어중간한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다.(p.8)

변변찮은 인생을 한탄... 몇 가지 이유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지나간) 후쿠시마현의 어중간한 시골 마을, 쓰다 아쿠아마린이라는 이상한 이름, 에로 만화를 그리는 엄마, 보잘것없는 외모와 가난한 현실 때문이다. 청소년기의 방황을 넘어서 대재난 이후 일본 사회의 무력감을 드러내고, 더구나 고령화와 지방 소멸의 문제하고도 연관이 있어 절망적인 분위기이다. 반전이 필요하다.

나는 낡은 보디에 입힌 고상한 코르셋을 바라보았다. 허리 부분을 과도하게 조였고, 몸에 맞춘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연출하기 위해 열 장 이상의 조각을 복잡하게 꿰맸다. 가슴에서 허리까지 오는 코르셋은 세로줄 무늬를 강조했고, 촘촘한 솔기 사이에 뼈대를 몇 개나 삽입한 것이 보였다. 저것은 고래수염이다. 가터벨트까지 갖춘 이 코르셋에는 18세기 로코코풍 기교가 한껏 발휘되었다.(p.22-23)

그런데 이사부로 양복점, 다 망한 시골 양복점에 여자 속옷이 등장한다. 호기심과 망측함으로 화제가 되는데, 낡은 보디에 입힌 고상한 코르셋은 18세기 로코코 양식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유일하게 (본의 아니게 여성 속옷에 관심이 많은) 아쿠아마린은 이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상류 계급의 상징이었던 코르 발레네의 가치를... 여성 복식은 투쟁과 번영의 역사이고, 양복점이 망한 이유는 시대에 맞물리지 못해서이고, 신상품으로 내놓은 코르셋은 예술의 경지이다.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 쓰다 아쿠아마린과 여든두 살의 재봉사 스즈무라 이사부로는 코르 발레네를 앞에 두고 깊은 대화를 나눈다. 어린 남자와 늙은 남자의 속옷 얘기는 우스꽝스러우며 경이롭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나는 82년이나 사회라는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안전지대에 앉아서 그저 순종하며 살아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간이 같은 체제 쪽에 서 있더구나. 남자로서 이 꼴이 한심하지 않니?"

"아니요, 그다지요."

"어리석기는! 한심하다고 생각해야지! 지금 당장 일어나야 한다! 화염병을 여자 속옷으로 바꿀 때야! 속옷으로 이 세상을 깨부술 순간이 왔어!"(p.53-54)

"남의 눈치 보지 마. 남과 비교하지 마. 의견을 억누르지 마. 네 인생을 너 이외의 누구에게도 맡기지 마."(p.79)

"어떤 천이든 방향이 있어. 거기에서 1밀리미터라도 벗어나는 순간 천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결을 거슬러서 억지로 완성하면 주름이 생기고 형태가 무너져서 결과적으로 옷이 인간에게 복수를 한다."

"옷이 복수를 한다니요......"

"몸의 중심선에서 옷감의 결이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옷을 입는 사람이 영향을 받아. 왠지 편하지 않고 당겨지는 것 같고 움직이기 불편한 느낌은 몸이 보내는 경고야. 재봉이 형편없는 옷은 뼈와 근육을 서서히 비틀어지게 하고 신경에도 영향을 줘. 내가 국가 첩보원이나 킬러였다면 옷을 무기로 쓸 거다."(p.81)

"숫자는 그냥 기준일 뿐이야. 인간의 눈은 세상을 늘 착각해서 보니까. 봉제물은 수치의 정확함보다 봤을 때의 정확함이 중요해. 직각 옷깃을 만들 때도 눈의 착각 때문에 안쪽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여. 직각으로 보이려면 몇 도쯤 바깥으로 내야 하는데, 대부분 수치에 지나치게 의존하니까 기계적으로 패턴을 그리고 끝이지."(p.85-86)

"원래 무모한 짓은 젊은이가 아니라 늙은이가 하는 법이야. 나이를 먹을수록 멍청해지니까. 나는 꿈과 보람을 위해서라면 벌이 따위 없어도 행복하다느니 하는 말은 개나 줘버릴 헛소리라고 생각해. 그런 건 인정받지 못했을 때를 위한 예방책에 불과해. 상품에 맞는 대가를 얻어야 혁명이 비로소 성공하는 거니까."(p.142)

그동안 변변찮은 인생이었다고 여기는 두 사람은 코르셋 혁명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갈고닦은 기술로 코르셋을 만들어 인생을, 세상을 바꾸려는데... 가족, 학교, 상공회(상인회), 부녀회, 지역 주민의 반대와 반발이 거세다. 미성년이라서, 노년이기에 이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매우 과감하고 도전적이다. 체제 저항과 혁명 정신 외에 작가의 옷에 관한 철학이 잘 드러난다.

"스팀펑크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지금은 다양한 요소가 뒤섞이고 분류되었거든요. 사람에 따라 해석도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그래도 바탕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시대예요. 이 한 세기에는 다양한 분야의 기술과 문화가 빼곡하게 채워졌으니까요."(p.169)

"지금 정했어요. 아니요, 제가 멋대로 정했어요. 이 가게의 테마를 '에버렛 자포니즘'으로 하겠어요."

"에버렛? 그건 또 뭐냐."

"양자역학으로 다세계 해석을 한 사람이에요. 이 세상이 다양한 순간마다 나누어져 수많은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이론이에요. 즉 일본에는 개국한 직후에 다시 쇄국으로 돌아간 평행 세계가 있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단순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화양절충(일본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의 조화)이 아니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만들어내겠다는 소리예요. 기모노와 코르셋을 조합한 필연성이나, 그걸 입은 사람들의 생활상 같은 거요. 이사부로 양복점에서 일본의 평행 세계를 만들 거예요."(p.204-205)

좋은 옷을 만들어 과거(리즈 시절)를 회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바꾸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켜... 인생을,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이지만,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생기고... 에버렛 자포니즘을 철학으로 멋진 코르셋을 만들어낸다. 어떤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 용기를 북돋는 소설이다. 패션 디자인으로, 그것도 코르셋으로 체제를 거스른다는 발칙한 상상은 아주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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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
사이조 나카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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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조 나카, 이규원 역, [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 북스피어, 2019.

Saijo Naka, [MARUMARU NO IGA], 2017.

제36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와,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무슨 감동 공식이 있는 것인가? 살짝 유치하면서 뻔한 내용이지만, 뭔가에 홀린 듯이(공식대로 흘러가서)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에도 시대 1800년대 중, 후반을 배경으로, 3대가 경영하는 작은 과자점 난보시야(南星屋)에는 희비와 애환이 있다. 기억나는 일본 역사소설은 하무로 린의 [저녁매미 일기](비채, 2013.)인데, 쇼군과 농민 사이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무사의 이야기라면... 사이조 나카의 [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은 전통 과자를 만들어 파는 조닌(도시에 사는 상인이나 장인)의 이야기이다. 둘 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카스도스

와카미도리

이가모찌

오오우쯔라모찌

우메가이

마쓰카제

난텐즈키

에도성 고지마치 6초메 뒷골목에 있는 과자점 난보시야는 매일 정오에 문을 여는데, 일각(2시간) 전부터 사람들은 줄 서서 기다린다. 작은 가게, 정해진 명물 과자는 없다. 단지 계절이나 명절하고 어울리는 과자를 내놓고, 주인장의 기분에 따라 그날그날 다른 과자를 만들어 판다. 명품 과자를 납품하는 어용 가게도 있지만, 난보시야는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먼... 재료를 선택하고 제조를 궁리하여 이문을 최소화하기에 서민이 즐겨 찾는 곳이다. 여기까지는 흔한 설정이다.

지헤에의 아명(에도 시대 무가나 화족 집안의 아이가 어릴 때 쓰던 이름)은 오카모토 고헤이지였다. 오카모토가의 차남이며 한 살 어린 고로가 삼남이다.

열 살에 무가 신분을 버리고 과자 장인의 제자로 들어간 것은 스스로 원해서였다. 같은 시기에 고로도 절에 들어갔다.

큰형이 오카모토가를 계승하였는데, 지금은 타계하고 큰형의 아들이 당주로 있다.

지헤에는 우에노 야마시타에 있는 과자점에서 10년을 수행하고 2년간 보은봉공(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주인이게 은혜를 갚기 위해 일정 기간 남아 일하는 것)까지 마친 뒤 에도를 떠났다. 기량을 닦기 위해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것은 과자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의 장인이나 거치는 과정이다.(p.16-17)

어머니는 신부수업을 위해 에도 성 내궁에 들어가 일할 때 주군의 성은을 입어 지헤에를 임신했다. 다행히 딸이라도 낳아 측실이 된다면 오카모토가에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오빠 구니에 역시 괜한 욕심을 부릴 사람은 아니어서 지헤에를 아들로 들여 오카모토가에서 키우기로 했다... 당시 친부는 아직 십대로 나이가 어렸고 쇼군직 상속을 앞두고 있었다. 구니에는 누이가 잉태한 아기가 친부의 쇼군직 상속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p.48-49)

이제는 환갑의 나이, 난보시야의 주인인 지헤에는 전대 쇼군의 서자라는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 유력 가문인 외삼촌 오카모토가의 차남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고모로, 사촌을 형제로 알고 살았다. 열 살이 되었을 무렵, 우연히 비밀을 알게 되고... 가문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무가 신분을 버리고 과자 장인이 되기로 한다. 5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과자에 진심인 그는 10년의 수행과 2년의 보은봉공을 끝내고도 16년 동안 숱한 지방을 돌아다니며 72권의 과자첩을 기록했다. 에도로 돌아와서 딸 오헤이와 손녀 오키미와 함께 여러 지방의 과자를 만들어 파는 완전한 상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고 여기던 출생의 비밀이 문제를 일으킨다. 과자로 연결된 현재와 과거의 사건은 아주 흥미진진하다.

태어났을 때 이미 곁에 없던 친부에게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다만 머나먼 존재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갑을 맞은 올봄, 지헤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뭐 하나 효도한 일이 없구나.(p.47-48)

스이노스케는 눈 깜빡이는 시간마저 아끼려는 양 지헤에의 손을 응시했다. 그 손이 빚어내는 것들 하나하나가 놀랍고 기뻤다. 한편 소년의 무구한 광채는 늙은 지헤에에게는 눈이 부실 정도여서, 그저 웃는 얼굴을 최대한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을 어느새 품게 되었다.

"무사는 무엇을 위해 있는 겁니까?"

스이노스케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전쟁 없는 요즘 세상에 무사에게는 어떤 역할이 있는 걸까요?"

"어떤 역할이라니...... 그거야......"하고 말을 꺼내 놓고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p.80)

"경단처럼 마음도 둥글게. 그게 요령이란다."

"하지만 이가모찌니까 까칠까칠해도 괜찮지 않나요?"

...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구나...... 이가모찌보다는 마루마루처럼 마음을 둥글게라고......"(p.134)

무가에서 태어나 과자점 주인이 된다. 여덟 살 고헤이지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행복에 겨운 동생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179)

얼마 전 옹이와 이야기할 때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그 저택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더 커다란 무엇, 바로 쇼군의 숨겨 둔 아들이라는 자신의 출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행에 나서서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던 것도 에도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p.221)

"마쓰카제를 팔던 가게 주인이 이걸 들고 진지하게 말하더군.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 같다고 말이야."

...

딸이 결혼하는 날은 부모에게 무엇보다 기쁜 날이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쓸쓸함이 사무치는 날이다.

"그래도 딸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조금쯤 쓸쓸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p.267)

아버지는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고헤이지에게는 사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친부인 이에나리에게도 친밀감은커녕 혐오밖에 느낄 수 없었다.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는지 구니에는 꾸짖는 투로 말을 이었다.

"주군은 너를 남몰래 걱정하고 계신다. 종종 내려 주시는 과자가 그 증거다."(p.288)

전대 쇼군의 7주기, 지헤에는 어린 시절에 다른 가문하고 다르게 유독 과자를 하사품으로 내려주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그때의 맛을 떠올려 카스도스를 만들었다가 곤욕을 치른다. 어느 무가 소년이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자기의 어린 시절이 겹치고, 잠시 손자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헤에는, 딸과 손녀가 드러내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살기를 원한다. 무가에서 태어나 대권과 가업을 포기하고 과자 장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과거가 나오고... 손녀 오키미는 다이묘 가문하고 혼담이 오가는데, 이것은 지헤에의 출생 때문에 자칫 모반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난보시야에는 고향의 맛을 간직한 과자가 있고, 끊임없이 펼쳐지는 희로애락이 있다. 즐거움을 나누고, 괴로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과자 장인은 과자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언짢은 일은 잊어버리고, 행복을 주는 과자... 무사의 칼보다 더 힘이 있는 과자의 이야기이다. 내일은 화과자라도 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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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크리스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스기타 히로미 그림,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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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글, 스기타 히로미 그림, 양윤옥 역, [마더 크리스마스], 소미미디어, 2018.

Higashino Keigo, Sugita Hiromi, [SANTA NO OBASAN], 2001.

히가시노 게이고의 크리스마스 그림 동화이다. 우리가 아는 일본 미스터리의 거장, 바로 그 히가시노 게이고가 맞다. 다작으로 유명하고,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는... 에세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림 동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라서 한 달 전에 읽었더라면, 좀 더 분위기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으로 읽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핀란드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산타협회 회의가 열린다. 회의실 풍경은, 회의에 참석한 열두 명의 산타클로스는 옷차림과 피부색은 제각각 다르지만, 하나같이 수염과 눈썹이 하얗다. 이날 안건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미국 지부를 담당하고, 회장직에 있었던 산타의 은퇴로 차기 회장을 선출해야 한다. 둘은, 미국 지부를 담당할 새로운 산타를 뽑아야 한다. 회의는 각 나라 지부를 담당하는 산타클로스의 만장일치로 진행된다. 작가는 회의 과정을 통해서 현실을 풍자하고, 산타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먼저, 회장 선출은 부회장 산타가 이어서 회장이 되는 것으로 한다. 만장일치로 통과, 부회장이던 네덜란드 지부 산타가 회장이 된다. 다음으로, 미국 지부를 담당할 산타 후보를 추천하는데, 여기에서 살짝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어쨌든 회원 모두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독일 지부 산타, 피부색 때문에 후보 시절에 곤란을 겪었다는 아프리카 지부 산타, 이것을 위로하는 영국 지부 산타...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북유럽계인데, 실제 산타 모델인 성 니콜라스는 서아시아계라는 얘기...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선물이 좋을지 고민하고... 회의는 우왕좌왕이다.

"이번에 후보자를 선정하면서 나는 지금까지의 제약을 모조리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아프리카 산타의 입회 승인 회의 때였어요. 그를 지켜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내 후임자가 될 미국 산타에는 흑인도 대상에 넣어야겠다고요.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인간적인 자질 외에는 어떤 조건도 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여기 이 여자 분이 미국 산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어요."(p.30)

은퇴를 앞둔 미국 지부 산타는 후임으로 제시카를 추천한다. 여성 산타클로스가 가능한가? 규칙을 점검하는 독일 지부 산타, 수염이 없음을 지적하는 프랑스 지부 산타... 산타는 꼭 남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네덜란드 지부 산타, 산타클로스는 부성(父性)의 상징이라는 일본 지부 산타... 여성 산타클로스를 두고 회원 간의 실랑이가 벌어진다.

"저도 부성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시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또한 산타는 부성의 상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부성을 부여받은 것은 반드시 남성만은 아니겠지요. 또한 모성을 부여받은 것도 반드시 여성에 한정된 일은 아닐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저는 산타에 지원했습니다."

...

"겉모습 따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아프리카 산타가 중얼거렸다.(p.54)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이 되고... 제시카는 아들 토미 모르게 빨간 맞춤 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하면서 세 마리의 순록이 끄는 썰매에 오른다. 큼직한 선물 보따리... 밤새 미국 전역을 돌아야 한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아닌 산타클로스 아줌마 이야기이다. 산타클로스가 되는 웃지 못할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는데, 각 나라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시대정신을 포함하고 있고... 아기자기한 삽화는 이야기하고 매우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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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 - 157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누마타 신스케 지음, 손정임 옮김 / 해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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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타 신스케, 손정임 역, [영리], 해냄, 2018.

Numata Shinsuke, [EIRI], 2017.

제157회 아쿠타가와상

분가쿠가이(문학계) 신인상

왜 제목을 영리(影裏), 부제(제목 설명)를 '그림자의 뒤편'이라고 했을까? 그림자 영(影), 속 리(裏)를 썼으니 '그림자의 안쪽', '그림자의 내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림자의 뒤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상상되지 않는다. 작가는 제목을 전광영리참춘풍(電光影裏斬春風) "번갯불이 봄바람을 벤다."(p.96) 인생은 찰나이지만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에서 발췌했다는데, 뭔가 아리송하다.

대략 90여 페이지 단편 소설이다. 예전에는 번역 출간할 때 나름대로 엄선 과정이 있었던 거 같은데, 요즘에는 상을 받으면 무조건 판권부터 사 오는 듯하다.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고 해서 재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상을 받은 배경은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을 소재로, 누군가 써야 할 글을 썼다는 의미가 있겠지만...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라서 동떨어진 느낌이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의 무책임성으로 별다른 감동은 없다.

강이 완만히 굽어지면서 제방 전체가 양 기슭의 삼나무와 편백나무 그림자로 푸르게 비치는 곳에 다다랐다. 그곳은 마치 온종일 햇빛이 닿지 않는 정원 구석 같은 곳이었다. 풀꽃과 나무가 지금까지 본 것보다 적고, 가냘픈 것들이 더 많이 보인다. 여린 잎사귀의 테두리가 살짝 비친다. 어느 것이나 여러 해 동안 자외선을 피해 왔던 노력이 보상을 받은 듯 온몸에 선명한 초록빛 윤기를 휘감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p.8)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이와테현의 자연환경, 오이데강의 특별한 풍경... 자외선을 피해서 선명한 초록빛을 휘감은 여린 잎사귀, 그곳은 햇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의 이면이 아니라) 그림자의 내면 세계가 있다. 작가는 그림자의 내면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햇빛을 등지고 전쟁, 태풍, 지진, 쓰나미... 등이 몰아치는 곳이지만, 어두운 그림자의 내면에서 일본은 여전히 버티고 번성하고 있다는 것을...?

1장에서 곤노 슈이치는 회사 동료인 히아사 노리히로와 친하게 지낸다. 같이 술을 마시고, 지난 1년 내내 낚시를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히아사는 퇴사하고, 잠시 연락이 끊긴다. 허전함과 그리움이 있는데, 히아사는 상조회사로 이직해서 나타난다. 2장에서 곤노는 오랜만에 헤어진 동성 연인과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히아사의 부탁으로 상조회에 가입하고, 같이 낚시를 즐긴다. 3장에서 지진 재해가 일어나고, 히아사는 행방불명된다. 그리고 뜻밖의 채무가 있음을, 곤노는 히아사의 본가에 방문해서 그의 아버지로부터 모르던 얘기를 듣는다.

한마디로 동일본대지진을 전후로 게이와 사기꾼의 이야기이다. 문학성을 이유로 성소수자를 중심에 두고, 앞뒤 모르는 모호한 전개는 매우 불친절하다. 껄끄러운 번역은 더 불편하고...

사회 문제를 파악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고, 시작과 끝을 포함해서 뼈대를 만들고,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구성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성과 개연성을 점검하고... 재미까지 주는 대중소설이 훨씬 친절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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