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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로 양복점
가와세 나나오 지음, 이소담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가와세 나나오, 이소담 역, [이사부로 양복점], 황금시간, 2019.
Kawase Nanao, [Taylor Isaburo], 2017.
달콤한 힐링이 아닌 저항과 혁명에 관한 소설이다! 작가인 가와세 나나오는 패션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한다고 한다. 패션 디자인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이는데, 역발상 전략이었을까? [이사부로 양복점]은 코르셋을 소재로 한다. 코르셋은 여성의 허리를 조이는 기능성 속옷이고, 여성주의자에게는 억압의 상징이다. 그래서 여성 해방으로 탈코르셋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그런데 다시 코르셋을 입자는 괴이한 주장! 코르셋 혁명에 관해서이다.
내 인생은 앞으로도 쭉 변변찮을 것이 분명하다.
중학생 때 이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선 첫 번째 비극은 후쿠시마현의 어중간한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다.(p.8)
변변찮은 인생을 한탄... 몇 가지 이유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지나간) 후쿠시마현의 어중간한 시골 마을, 쓰다 아쿠아마린이라는 이상한 이름, 에로 만화를 그리는 엄마, 보잘것없는 외모와 가난한 현실 때문이다. 청소년기의 방황을 넘어서 대재난 이후 일본 사회의 무력감을 드러내고, 더구나 고령화와 지방 소멸의 문제하고도 연관이 있어 절망적인 분위기이다. 반전이 필요하다.
나는 낡은 보디에 입힌 고상한 코르셋을 바라보았다. 허리 부분을 과도하게 조였고, 몸에 맞춘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연출하기 위해 열 장 이상의 조각을 복잡하게 꿰맸다. 가슴에서 허리까지 오는 코르셋은 세로줄 무늬를 강조했고, 촘촘한 솔기 사이에 뼈대를 몇 개나 삽입한 것이 보였다. 저것은 고래수염이다. 가터벨트까지 갖춘 이 코르셋에는 18세기 로코코풍 기교가 한껏 발휘되었다.(p.22-23)
그런데 이사부로 양복점, 다 망한 시골 양복점에 여자 속옷이 등장한다. 호기심과 망측함으로 화제가 되는데, 낡은 보디에 입힌 고상한 코르셋은 18세기 로코코 양식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유일하게 (본의 아니게 여성 속옷에 관심이 많은) 아쿠아마린은 이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상류 계급의 상징이었던 코르 발레네의 가치를... 여성 복식은 투쟁과 번영의 역사이고, 양복점이 망한 이유는 시대에 맞물리지 못해서이고, 신상품으로 내놓은 코르셋은 예술의 경지이다.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 쓰다 아쿠아마린과 여든두 살의 재봉사 스즈무라 이사부로는 코르 발레네를 앞에 두고 깊은 대화를 나눈다. 어린 남자와 늙은 남자의 속옷 얘기는 우스꽝스러우며 경이롭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나는 82년이나 사회라는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안전지대에 앉아서 그저 순종하며 살아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간이 같은 체제 쪽에 서 있더구나. 남자로서 이 꼴이 한심하지 않니?"
"아니요, 그다지요."
"어리석기는! 한심하다고 생각해야지! 지금 당장 일어나야 한다! 화염병을 여자 속옷으로 바꿀 때야! 속옷으로 이 세상을 깨부술 순간이 왔어!"(p.53-54)
"남의 눈치 보지 마. 남과 비교하지 마. 의견을 억누르지 마. 네 인생을 너 이외의 누구에게도 맡기지 마."(p.79)
"어떤 천이든 방향이 있어. 거기에서 1밀리미터라도 벗어나는 순간 천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결을 거슬러서 억지로 완성하면 주름이 생기고 형태가 무너져서 결과적으로 옷이 인간에게 복수를 한다."
"옷이 복수를 한다니요......"
"몸의 중심선에서 옷감의 결이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옷을 입는 사람이 영향을 받아. 왠지 편하지 않고 당겨지는 것 같고 움직이기 불편한 느낌은 몸이 보내는 경고야. 재봉이 형편없는 옷은 뼈와 근육을 서서히 비틀어지게 하고 신경에도 영향을 줘. 내가 국가 첩보원이나 킬러였다면 옷을 무기로 쓸 거다."(p.81)
"숫자는 그냥 기준일 뿐이야. 인간의 눈은 세상을 늘 착각해서 보니까. 봉제물은 수치의 정확함보다 봤을 때의 정확함이 중요해. 직각 옷깃을 만들 때도 눈의 착각 때문에 안쪽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여. 직각으로 보이려면 몇 도쯤 바깥으로 내야 하는데, 대부분 수치에 지나치게 의존하니까 기계적으로 패턴을 그리고 끝이지."(p.85-86)
"원래 무모한 짓은 젊은이가 아니라 늙은이가 하는 법이야. 나이를 먹을수록 멍청해지니까. 나는 꿈과 보람을 위해서라면 벌이 따위 없어도 행복하다느니 하는 말은 개나 줘버릴 헛소리라고 생각해. 그런 건 인정받지 못했을 때를 위한 예방책에 불과해. 상품에 맞는 대가를 얻어야 혁명이 비로소 성공하는 거니까."(p.142)
그동안 변변찮은 인생이었다고 여기는 두 사람은 코르셋 혁명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갈고닦은 기술로 코르셋을 만들어 인생을, 세상을 바꾸려는데... 가족, 학교, 상공회(상인회), 부녀회, 지역 주민의 반대와 반발이 거세다. 미성년이라서, 노년이기에 이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매우 과감하고 도전적이다. 체제 저항과 혁명 정신 외에 작가의 옷에 관한 철학이 잘 드러난다.
"스팀펑크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지금은 다양한 요소가 뒤섞이고 분류되었거든요. 사람에 따라 해석도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그래도 바탕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시대예요. 이 한 세기에는 다양한 분야의 기술과 문화가 빼곡하게 채워졌으니까요."(p.169)
"지금 정했어요. 아니요, 제가 멋대로 정했어요. 이 가게의 테마를 '에버렛 자포니즘'으로 하겠어요."
"에버렛? 그건 또 뭐냐."
"양자역학으로 다세계 해석을 한 사람이에요. 이 세상이 다양한 순간마다 나누어져 수많은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이론이에요. 즉 일본에는 개국한 직후에 다시 쇄국으로 돌아간 평행 세계가 있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단순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화양절충(일본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의 조화)이 아니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만들어내겠다는 소리예요. 기모노와 코르셋을 조합한 필연성이나, 그걸 입은 사람들의 생활상 같은 거요. 이사부로 양복점에서 일본의 평행 세계를 만들 거예요."(p.204-205)
좋은 옷을 만들어 과거(리즈 시절)를 회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바꾸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켜... 인생을,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이지만,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생기고... 에버렛 자포니즘을 철학으로 멋진 코르셋을 만들어낸다. 어떤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 용기를 북돋는 소설이다. 패션 디자인으로, 그것도 코르셋으로 체제를 거스른다는 발칙한 상상은 아주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