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정의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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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요시 리카코, 주자덕 역, [절대정의], 아프로스미디어, 2018.

Akiyoshi Rikako, [ZETTAI SEIGI], 2016.

오랜만에 읽은 이야미스(일본어로 싫다는 뜻을 지닌 '이야'와 미스터리의 줄임말인 '미스'의 결합, 불쾌한 느낌의 추리소설)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가 떠오르고, 성경적 세계관에서 율법주의 바리새인을 현실에서 만난 기분이고, 심각하게 상황윤리를 고민하게 한다. 극단적인 설정으로 허구의 과장이 지나치지만, 그러므로 소설 속 범죄를 옹호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아,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고 싶은 당신을 초대합니다.

오셔서 저에 대해 많이 추억해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가키 노리코(p.90)

가즈키, 유미코, 리호, 레이카는 연보라색으로 고급스러운 봉투의 우편물을 받는다. 5년 전에 죽은 친구로부터.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죽인 노리코의 초대장이다. 살인으로 끝난 우정... 악연이 궁금하다.

"아내가, 그러니까 노리코의 엄마가 잘못된 것을 무척 싫어했어요. 언제나 옳은 일을 해야 한다며 엄격하게 훈육을 해 왔습니다. 이전에는 노리코가 반발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2년 전에 통금 시간이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노리코를 찾으러 나간 아내가 차에 치여서 그만......"(p.22)

고교 동창인 다가키 노리코(高規範子, 이름이 고규범자...;;)는 이름에 '규범(規範)'이 들어가 있다. 공부 잘하는 완벽한 아이, 모두에게 규범과 같은 존재, 고지식하고 강한 정의감은 모범이 된다. 이것의 배경은 엄격한 가정교육과 규범을 지키지 않았을 때 엄마가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융통성 없이 옳은 일에만 관심을 두는 정의의 신봉자가 되어 남모르는 희열을 느낀다. 친구들은 학교에서 곤란한 일을 겪거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노리코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마움과 함께 뭔지 모를 불편함이 있다.

"융통성? ... 그것이 정의보다 중요한 거야? ... 어쨌든 나는 옳은 일에만 관심이 있어. 잘못된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단 말이야."

그렇게 잘라 말한 노리코는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말에는 억양이 없었고 목소리도 인공 음성 같았다. 마치 사이보그 같았다. 사이보그는 인간다운 미묘한 감정이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올바른 것에 대해 프로그램 된 일만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상처를 받든 파멸되든 사이보그는 관심이 없다.(p.46)

"나는 마사히코 씨의 편도 유미코의 편도 아니야. 나는...... 정의의 편이야."

정의의 편. 그 말이 이렇게 차갑게 느껴질 줄이야.

유미코의 머릿속에 악당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히어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히어로는 오직 정의를 위해 악과 싸우는 데 열중한다. 그러나 정의의 히어로가 공격을 할 때마다 주위의 자연이나 건물은 파괴되고, 자동차나 기차는 나가떨어지고,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이리저리 허둥지둥 도망친다. 그렇다면 그건 몬스터가 하는 짓과 다를 것이 없지 않나. 결국, 정의의 히어로는 정의에 집착한 몬스터가 아닌가.(p.139)

리호는 어느 날, '전라로'라는 말의 쓰임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노리코의 존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올바른 것이라 해도, 노리코에게 지적을 받으면 고마운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그냥 불쾌할 뿐이다.

전라의 정의.

정의의 누디스트.

노리코의 정의는 너무나 드러나 있고, 노골적이고, 보는 사람이 눈을 돌리고 싶게 만든다. 어디든 상관없이 상대를 가리지도 않고, 망측스럽게 '정의'를 드러내며 달려든다. 융통성과 배려라는 옷을 두르지 않은 알몸의 정의 앞에 주위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있을 수밖에 없다.(p.190)

"내가 세무서에 고발할 거거든."

노리코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

레이카는 조심스럽게 정면에 있는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명이 노리코의 얼굴에 기분 나쁜 음영을 만들어, 웃고 있는 입이 귀까지 찢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마치 야차를 연상시키는 형상이었다. 지금까지 보살처럼 보였던 노리코의 얼굴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 것이다.(p.266)

졸업하고 15년이 지나 동창회를 통해서 인연은 계속된다. 가즈키는 프리 저널리스트로, 노리코와 유미코는 가정주부로, 리호는 학원 사업으로, 레이카는 중견 배우로 살고 있다. 재회의 기쁨은 잠시이고 이들은 극심한 피로를 마주하는데, 노리코의 정의감은 합법과 불법을 따지며 친구들의 삶에 관여한다. 차라리 모르는 사이라면 당하지 않았을 것을... 저작권을 검증하고, 이혼 문제에 개입하고, 가정사에 참견하고, 사생활을 간섭한다. 노리코는 정의밖에 모르는 정의의 사이보그, 정의의 몬스터, 정의의 누디스트, 정의의 야차이고... 정의의 포식자였다. 그리고 5년 전 그날, 사건이 일어났다.

노리코는 언제나 논리정연하고 백 퍼센트 옳다. 그 화살이 나에게로 향하지 않는다면, 내가 잘못한 게 없다면... 오히려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완벽한 삶을 살지 못해서 노리코보다 네 명의 친구들에게 마음이 갔다. 그들의 범행이 드러나지 않기를 응원했는데, 이것은 논리적 모순으로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사랑과 공의를 온전히 실천하신 그분(?)이 아니고는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불쾌함을 일본 미스터리의 진정한 매력으로 여기고 이야미스에 환장한 적이 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짜릿한 자극으로 정서가 메마른 느낌이 좋다...;;ㅎㅎ 경멸과 살의의 충동, 정의의 배신이라는 측면에서 참신하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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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이드 게임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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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이도 준, 민경욱 역, [노사이드 게임], 인플루엔셜, 2022.

Ikeido Jun, [NO SIDE GAME], 2019.

이케이도 준의 [노사이드 게임]은 럭비와 경영을 접목한 소설이다. 스포츠 시리즈는 지금까지 3권인데, 야구를 소재로 하는 [루스벨트 게임](인플루엔셜, 2020.)과 육상을 소재로 하는 [육왕](비채, 2023.)이 있다.

"고귀라...... 노사이드라는 말이 있더군."

기미시마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조용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스트로스의 제너럴 매니저가 되고 알아봤지. 그랬더니 영어권 럭비 용어에는 없는 말이었어. '원 포 올, 올 포 원'도 마찬가지고."

둘 다 럭비 정신을 예찬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결국은 둘 다 일본식 럭비 용어라는 소리지. 그런데 그게 마음에 쑥 들어오는 건,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무사도 정신이나 청렴함이라는 미의식 같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가 아닐까."(p.47)

'노사이드(No Side)'는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럭비 용어인데, 격렬한 사투가 끝나면 적도 아군도 없이 서로의 건투를 빌어준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는 스포츠의 숭고한 정신인 것은 맞지만, 그 이면에는 상당한 부조리가 있다.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매니지먼트로 다가서면, (내용이 현실에 기반한 사실이라면) 일본의 럭비는 답이 없다! 사회고발 저널리즘을 읽는 기분이다.

"인사부에서 들으셨죠? 요코하마공장의 총무부장은 '도키와자동차 아스트로스'의 제너럴 매니저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아스트로스는 도키와자동차의 럭비팀 이름으로, 일본럭비협회 산하 사회인리그인 플래티나리그에 소속된 '명문' 팀이었다.

그 팀의 제너럴 매니저를 기미시마가 맡게 된 것이었다.(p.22)

대기업 도키와자동차의 본사 경영전략실에서 7년을 근무한 기미시마 하야토는 요코하마공장의 총무부장으로 발령된다. 차기 사장으로 유력한 영업본부장 상무이사에게 각을 세우다가 사내 정치에 밀려 좌천된 것이다. 소형 엔진을 제조하는 주력 공장인데, 총무부장은 회사 럭비팀의 제너럴 매니저(단장)를 겸임해야 한다. 도키와자동차의 아스트로스는 사회인(실업) 플래티나리그에 소속된 명문 팀이다. 하지만 문제는 기미시마는 럭비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한 장면, 시작은 아주 익숙하다.

기미시마가 물었다. "너무 기본적인 질문이라 죄송한데요, 감독에 따라 팀 구성이 그렇게 많이 달라지나요?"

...

"그야 물론 달라지죠. 회사의 사장이 바뀌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경영 자원이 같더라도 경영전략이 달라진다는 말인가요?"(p.35-36)

16억 엔에 가까운 적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돈이 많이 드나요?"

도키와자동차 같은 대기업이 아니면 럭비팀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게다가 예상보다 훨씬 식구도 많네요."

팀은 총 80명. 그중 선수는 약 50명이었다.

럭비는 15명이 경기하는 스포츠였다. 그렇다면 포지션 하나에 서너 명의 선수층이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나머지 스태프 약 30명에는 럭비팀장도 겸하고 있는 신도 공장장과 기미시마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런 관리직 외에 코치나 매니저, 트레이너, 물리치료사나 영양관리사, 팀 닥터, 그리고......

"분석가까지 있네요."(p.38-39)

제너럴 매니저가 우선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하나는, 감독의 사임으로 새로운 감독을 찾아야 한다. 모든 운동 경기가 그렇듯이 럭비도 감독에 따라 팀 구성이 완전히 달라진다. 성공적으로 팀을 이끌었던 감독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이사회에 보고할 팀의 예산안 작성이다. 선수 50명과 스태프 30명인 팀은 연간 16억 엔 이상을 사용하는데, 놀라운 것은 이게 모두 적자이다. 기미시마의 눈에는 아스트로스가 사회 공헌을 목적으로 한다지만, 아무런 수익 창출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하나 드러나는 부조리는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

럭비에는 15명이나 되는 선수가 필요하다. 야구 9명, 축구 11명보다 많다. 농구라면 3분의 1의 인원으로 팀이 된다. 첫 번째 전제로 일단 그만큼의 인건비가 더 든다는 소리다.

그런데 경기 수는 많지 않다.

작년 시즌 아스트로스의 경기는 리그전과 순위결정전, 거기에 컵 쟁탈전까지 합쳐도 15회에 불과했다.(p.55-56)

기미시마가 말했다. "플래티나리그는 아마추어이지만, 농구는 프로야. B리그는 경기도 많고 팀 경비도 럭비보다 적게 들지. 하지만 그런 점을 제쳐두더라도 수익 구조에서 가장 다른 점은 막대한 방영권을 포함한 후원사 수입이야. 그것만 20억 엔이 넘어. 물품 판매도 10억 엔이지. 일본럭비협회를 볼까? 방영권 수입이 4억 엔, 물품 판매는 4천만 엔에 불과해. 하늘과 땅 차이지. 그 차이를 만드는 게 바로 경영자의 차이야."(p.57)

이 남자의 근간에는 선민사상이 있었다.

럭비는 귀족 스포츠이고 선택받은 자만이 가치를 안다. 아랫것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도 대기업 경영자들의 옹호를 받아 재정은 윤택하고 곤란함이 없다. 구태의연한 이 남자 탓에 럭비계가 치른 대가가 너무 컸다.(p.391)

플래티나리그는 경기당 평균 3천 명대의 관중, 다른 프로 스포츠하고 단순 비교해서 비효율적인 특성, 경기의 수는 많지 않고, 입장 수익은 협회의 운영비로 들어간다. 만성 적자, 채산성 없는 사업, 대기업에 의존적인 구조... 자립하지 못하고 덩치만 큰 아이와 같다. 문제는, 무엇보다 협회는 아마추어리즘을 본질로 여긴다는 것이다. 럭비는 신성한 귀족 스포츠이기에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 그들만의 숭고한 정신은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개혁을 거부하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리그를 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기업은 언제 팀을 해산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럭비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돈을 내고 좋은 선수만 모은다고 강해지지 않아. 일시적으로 강해지겠지만 오래 갈 수 없지. 그런 팀보다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지역의 사랑을 받는 팀을 만들며 성장했으면 좋겠어. 강해지기 위해서는 인기가 없으면 안 돼. 우리의 발로 단단히 설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고."(p.61)

"자네도 나도, 이 팀도, 그리고 도키와자동차라는 회사도, 더 나아가면 일본이라는 나라도, 혹은 세상이 다 그래. 결국에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옳은 것들만 남지. 반대로 도리에서 벗어나면 언젠가 대가를 치르는 법이야. 자정작용이 사라졌을 때 이 시스템은 끝나."(p.430)

기미시마는 아스트로스의 자립을 목표로 한다. 충성스러운 팬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과 연계한 활동, 럭비 교실, 주니어 팀 창설, 자원봉사를 통한 교류... 입장 수익과 부가 수익을 늘리고, 팀만이 아닌 협회의 개혁을 요구한다. 문제의식과 구체적인 개혁안은 일본 럭비를 향한 작가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이외에 명감독의 선임 과정, 라이벌 일본모터스의 사이클론스와 접전, 스토브리그에서 유망주의 발굴, 예산 삭감과 팀 해체 위기, 사내 정치의 복수, 결승전의 짜릿한 승리... 등을 포함해 기업 스포츠의 운영 현실을 이야기한다. 럭비의 정신을 오용하는 사람을 향한 쓴소리! 럭비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고, 뻔한 결말인데도 재미있다. 아, 우리 협회도 잘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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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볶음에 바치다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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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아레노, 권남희 역,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 문학수첩, 2014.

Inoue Areno, [KYABETSUITAME NI SASAGU], 2011.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내 안의 남성성이 사라지는 것인가? 세상에, 환갑의 세 여자에게 반하다니...(그윽한 눈길로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쪽 취향은 아닙니다...ㅠㅠ) 인생에서 60이라는 나이는 (예전하고 다르겠지만) 여전히 이별과 상실의 슬픔은 익숙하지 않고, 남모르는 그리움이 있다. 이노우에 아레노의 소설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는 여성적이고, 발랄하고, 원숙하고, 맛깔스럽다. 추억이 깃든 제철 음식은 일본 특유의 서정성이 느껴지는데, 지브리 스튜디오의 음악과 함께하면 한껏 분위기를 살릴 수 있다. 아주아주 공감하는 내용이라서 두 번을 읽었다.

신마이, 히로스, 복숭아 국수,

고구마 도장, 모시조개 튀김, 콩밥,

머위 꽃, 양배추 볶음, 옥수수,

오이, 붕장어와 장어

도쿄의 조그만 동네 상점가, 반찬가게 코코야에는 60대 세 명의 여자가 일하고 있다. 사장인 코코는 항상 으하하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주도하지만, 이혼한 전남편에게 미련이 남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개업부터 함께 한 마쓰코는 속마음하고 다르게 삐딱하고, 연하의 첫사랑으로부터 실연당한 후 독신으로 산다. 신입인 이쿠코는 오래전에 어린 아들을 잃고, 최근에는 남편마저 떠나보냈다. 이혼, 독신, 사별의 삶을 사는 세 여자는 음식을 만들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코코야는 계절에 따른 음식을 준비하는데, 반찬가게의 노동 강도는 상당하다. 이른 시간에 장을 보고, 그날의 메뉴를 정하고, 아침 6시부터 준비해 오전 11시에 모든 음식을 진열한다. 손님들이 다녀가고 한가해진 오후 2시 30분에 같이 점심을 먹고, 오후 8시 30분에 영업을 종료해 계산을 마감하면 밤 10시이다. 코코와 마쓰코는 같이 한잔하러, 이쿠코는 곧장 집으로 간다.

"나 스스무 군이 마음에 들었어."

이쿠코와 마쓰코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잠시 후 이쿠코가 "알았어"라고 하더니, 온화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나도 마음에 드는걸"하고 덧붙였다.

코코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자신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선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놀란 것은 마쓰코까지 불쑥, 그러나 역시 결연한 목소리로 "나도"라고 말했을 때였다.(p.47)

코코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차로 3시간이나 걸리는 전남편을 찾아간다. 휴일에 이혼한 남편의 가정을 거리낌 없이 방문하는 정서가 놀라운데,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마쓰코는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지금도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하고 결혼한 남자를 잊지 못한다. 이쿠코는 밤마다 아들과 남편을 추모한다. 아들은 두 살 때, 남편은 그로부터 34년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사고를 두고 평생 남편을 원망하고 살았는데, 반년 전에 갑작스럽게 남편이 죽었다. 이들은 낮에 가게로 쌀 배달을 온 청년을 보면서... 이혼한 남편을, 헤어진 연인을, 죽은 아들을 떠올린다. 각자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이성의 감정 외에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 아저씨가 된 아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오늘 밤은 어렴풋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마이인 가스가 스스무, 그 청년의 조금 나이 든 모습을 상상하면 되지 않을까. 낮에 그를 본 순간, 이건 우리 소우네, 하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소년이나 청년을 볼 때마다 소우의 그림자를 찾아왔지만, 상대편으로부터 아들의 느낌이 밀려든 것은 처음이었다.(p.25)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마쓰코는 인정한다. 남자 하나 없이 아줌마뿐인, 얼굴이 기름으로 번질거리고 머리카락에 간장 냄새 배게 하는 곳이라 해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 한편으로, 이곳 이외의 장소로도 갈 수 있을 거라는 몽상도 한다.(p.53)

이쿠코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난감했다. 실제로 '꽤 미인인 편'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둘째 치고, 요리를 비롯한 집안일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깔끔하게 해왔고, 남편에게 거칠게 말한 적도 없다. 싸움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남편의 동료나 지인들은 '좋은 아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 슌스케에게는 '좋은 아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쿠코는 그 사실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 엉겁결에 "못된 마누라였어"라고 즉답한 것은 그 탓이다.(p.76)

마쓰코가 줄곧 그려왔던 그런 피로연이었다. 정말로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손을 넣어 그대로 꺼내 온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내내 머릿속에 그려온 정경이었다. 다만 이날 결혼한 것이 마쓰코가 아니었을 뿐. 상좌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가미조 슌과 그 아내가 된 사람이었다.(p.115)

왜 또 보냈냐고, 슌스케가 죽었으니 머위 꽃 선물도 이제 끝내지, 그걸로 됐지 않느냐고, 시누를 멀리하겠다는 게 아니라, 슌스케는 이제 없는데 슌스케가 있던 시절과 다를 바 없이 뭔가가 이어져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슬퍼지기 때문이라기보다 뭔가 책망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p.145)

무서운 것은 마쓰코와의 결혼이었어. 마쓰코가 아니라면 무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결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을 봤어. 그런데 실패였어. 무섭지 않은 여자와의 결혼은 길게 가지 못하더라고.(p.191)

애초에 정상이라 해도 35년 전에 아들을 잃은 뒤의 자신은 줄곧 이상했다. 그리고 이상한 대로 어떻게든 계속 움직이던 자신 속의 쳇바퀴가, 슌스케의 죽음으로 그때와는 또 다른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1년 조금 지난 지금은 움직이는 법이 또 바뀌었다. 사는 건 그런 건지도 모른다.(p.195-196)

"나 결혼할 거라 그랬잖아! 전남편이 붕장어를 보내주면 그 사람이 질투한다고!"(p.215)

60세를 넘긴 세 여자의 이별과 상실의 슬픔 그리고 그리움에 관해서이다. 전남편하고의 관계를 이제는 깨끗이 정리해야 하는 코코, 헤어진 연인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쓰코의 이야기도 좋지만, 세상에 없는 아들과 남편을 그리워하는 이쿠코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지난 1년 동안의 내 모습이 투영되기도 하고... 아, 아늑하고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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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기도할 때
고바야시 유카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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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유카, 민경욱 역, [죄인이 기도할 때], 소미미디어, 2021.

Kobayashi Yuka, [TSUMIBITO GA INORU TOKI], 2018.

가상의 법, 동해복수법을 내용으로 하는 고바야시 유카의 소설 [저지먼트](예문아카이브, 2017.)를 인상적으로 읽어서 소설 [죄인이 기도할 때]를 연속으로 읽었다. 공립학교에서의 폭력, 괴롭힘을 소재로 하는 사회파 미스터리인데, (우리도 우리지만) 일본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청소년의 자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어 점점 교묘하고 악랄해지는 범행을 고발한다. 여기에는 무관심한 가정, 무책임한 학교, 무능한 공권력이 있고... 가해 학생은 소년법 등으로 보호받지만, 피해 학생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유가족까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부조리한 상황에 쫓겨 자살할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다면 '11월 6일 복수의 날'에 증오하는 상대를 매장해버리고 죽자!(p.13)

주간지에 11월 6일의 저주... 라는 기사가 실린다. 중학교에서 폭력에 시달리던 S는 유서를 남기고 11월 6일에 자살한다. 다음 해 11월 6일에 S의 엄마가 자살하고, 그다음 해 11월 6일에 S를 괴롭힌 Y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열여섯 살인 도키타 쇼헤이는 한 학년 선배로부터 폭력과 금품 갈취를 당한다. 한계에 이른 상황... 주간지 기사를 떠올리며 자살을 결심하는데, 어차피 죽을 거라면 11월 6일에 가해자를 죽이고 나서 자살하는 것을 생각한다. 도시전설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11월 6일을 복수의 날로 만들어 수많은 복수극으로 학교폭력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날 피에로 복장의 페니에게 도움을 받는다.

시간이 흐르자 죽은 아들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왜 죽었지? 죽을 용기가 있었으면 뭐든 할 수 있잖아. 학교가 싫으면 전학을 가면 그만이다. 외국 유학이라는 길도 있다. 집에서 가정교사를 붙여 공부하면 되고, 왕따로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대안학교로 전학갈 수도 있었다. 선택지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그럼 부모로서 그런 선택지가 있다고 가르쳐준 적 있는가'라고 묻는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구나......(p.92)

마흔다섯 살인 가지미 시게아키는 주간지 11월 6일의 저주... 기사의 피해 가족이다. 아들과 아내를 연이어 잃은 슬픔,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원한이 있다. 한순간에 가정은 붕괴되고... 그리움만, 학교 따위는 목숨을 걸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지 못한 후회만 남는다. 학교폭력 피해자 모임인 라이프세이프에 가입해서 활동하는데, 죽은 아들하고 연관된 피해자를 발견한다.

"사과해서 모든 걸 다 용서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만약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사과하면 모든 걸 용서해줄 거야?"

아버지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용서받을 수는 없어."

"아버지는 불륜을 저지르고, 어머니는 남자가 생겨 집을 나가고, 나는 아버지의 불륜 상대에게 짐짝 취급을 당하고. 만약 아버지 아들이 절망해 주으면...... 내가 자살해도 용서해줄 거야? 살인이라는 거, 타인만이 아니라고."(p.134)

괴롭힘을 당하는 당사자는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이다. 가정에서의 이해와 관심이 필요한데,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지 못하는 때가 있다. 살인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이지만, 극한에 달한 피해자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도키타 쇼헤이는 페니와 함께 가해자를 응징할 완전범죄를 공모한다.

어쩌면 나는 인간은 갱생할 수 있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특히 미성년이면 개선의 여지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게아키를 자살로 몰아넣은 학생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반성하며 사람에게 상처주는 일의 무서움을 평생 잊지 않고 살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한심한 생각을 했던 자신을 저주하고 싶어졌다.

물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고통을 깨닫고 반성하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아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언젠가 누군가의 부모가 되면 그때는 깨달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음속에 강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웃기고 있네.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쳐야 한단 말인가. 녀석들에게 시게아키의 죽음은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의 나에게 묻고 싶다. 이 나라의 연간 자살자 수는 2만 명 이상인데 왜 자기 아들은 자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p.168-169)

가지미 시게아키는 인간의 갱생, 미성년의 교화를 기대하고 살았다. 하지만 현실은, 아들과 아내를 죽임으로 몰아넣은 가해자는 아무런 반성 없이 살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때의 사건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여전히 학교폭력과 괴롭힘을 일삼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시련, 악을 죽여 선량한 목숨을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요?(p.228)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검사도 판사도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폭력으로 아이를 잃은 유가족뿐입니다."(p.261)

날로 대담하고 경악스러운 학교폭력의 문제를 다루며 아주 극단적인 담론을 제시한다. 살인은 결코 해서는 안 되고,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임을 강조하면서도...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죽어야 하는가?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 를 묻는다. 극한의 상황에서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여야 하고... 누군가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유가족이 아니라 가해자여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전부 동의할 수 없지만, 수많은 청소년이 죽임의 상황에 몰려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소설로 말하는데, 부디 본인의 목숨만은 끊지 말아요!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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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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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이영미 역, [음의 방정식], 문학동네, 2016.

Miyabe Miyuki, [FU NO HOUTEISHIKI], 2014.

이제 슬슬 히가시노 게이고하고 미야베 미유키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반짝(?) 결심... 둘 다 나온 책이 많아서 따라가기에 벅차고, 읽을 때마다 시리즈와 재출간을 확인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소설 [음의 방정식]은 두 세계관의 충돌(교차? 크로스오버?)이 있는데, 행복한 탐정 시리즈의 사립탐정 스기무라 이사부로와 소설 [솔로몬의 위증](문학동네, 2013.)으로부터 20년이 지나서 주요 인물인 후지노 료코는 실제 변호사가 되어 등장한다.

이 등급 평가는 고등부에 올라가서도 답습되고 대학 진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세이카 학원 대학은 인기 이는 사립대지만 명문까지는 아니어서, 이른바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이곳에 진학하는 고등부 학생은 실은 대부분 B등급과 C등급이다. A등급 학생들은 다른 유명 대학에 진학한다. D등급은 거의 세이카 학원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년제를 포기하고 전문대나 직업학교를 택하는 학생도 많다고 한다.(p.14)

세이카 학원 중등부 3학년 D반을 대상으로 하는 '피난소 생활 체험캠프'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동일본대지진 후에 시작한 교육 행사로,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를 가정해서 하룻밤 동안 피난소 생활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참가는 희망자에 한해서이고, 사립학교답게 충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새벽에 한 남학생이 프로그램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유는 담임 교사의 선 넘는 무리한 진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학교는 진상을 조사하는데... 참가 학생 9명은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담임은 사실을 부인한다. 여기에 팽팽한 대립이 있다.

함정에 빠졌다고 호소하는 피해자의 결백을 입증하려면 왜 그런 함정이 생겼는지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피해자가 꺼릴 만한 사실을 들춰내면 된다.

"선생님, 저와 손잡으시겠습니까?"(p.60-61)

학생 측의 한 부모는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사립탐정 스기무라 이사부로를 고용한다. 담임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조난공동법률사무소를 찾아서 후지노 료코 변호사가 사건을 담당한다. 처음에는 반대의 위치에서 입장 차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기에 사립탐정과 변호사는 손을 잡고 정보를 공유한다. 두 주인공의 활약... 담임에 관한 평가는 열혈 교사로 찬사와 비난이 공존한다. 우등생의 성취감과 열등생의 소외감, 자랑거리와 비난거리가 오롯이 존재한다.

음의 방정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생과 학생,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 이끄는 쪽과 따르는 쪽, 억압하는 쪽과 억압받는 쪽의 조합부터 잘못되었고, 그러니 어떤 숫자를 넣어도 마이너스 답만 나온다.(p.116-117)

"이십 년 전의 나. 시기도 딱 이맘때쯤. 여름방학이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의 추억이에요?"

"네. 어떤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고 3학년들이 뜻을 모아 학교에서 모의재판을 열었어요. 저는 검사 역을 맡았죠."

...

"게다가 지금은 집에서 제가 더 세니까요."(p.128)

[솔로몬의 위증]에서 검사와 변호사 역을 맡았던 학생은 커서 결혼했나 보다. 미야베 미유키를 꾸준히 읽은 독자라면 스기무라 이사부로와 후지노 료코의 등장이 매우 반가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라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사회파 미스터리답게 일본의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분위기, 입시와 서열 제도, 사립학원의 인사 갈등, 중학교 3학년의 영악함, 교사의 잘못된 교육관... 등을 볼 수 있고, 이것이 얽히고설켜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유명 인물이 둘이나 나오면서 13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은 그들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사건도 어찌 보면 시시하고... 작가의 명성하고 비교해서 아쉬움이 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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