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일구
시마다 소지 지음, 현정수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시마다 소지, 현정수 역, [최후의 일구], 블루엘리펀트, 2012. 

Shimada Soji, [SAIGO NO IKKYU], 2006.

 

  개인적으로 일본 미스터리를 읽거나 소개하면, 주위의 반응은 항상 싸늘합니다. 왜 그런 책을 읽느냐는 표정으로 차라리 고전을 읽으라는 비아냥 섞인 조언을 해옵니다. 언제부터 고전은 고상한 것이고 미스터리는 천박한 것이 되었을까요? 책에 대한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제목에 '살인'이나 '사건'이라는 단어가 있으면,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표지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신)본격 소설보다는 은유적인 제목의 사회파 미스터리를 더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책을 읽으며 나 혼자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와 부조리를 다루어 변혁과 개혁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회파 미스터리를 선호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순수문학과 비교하여 가치 폄하되는 주위의 편견과 선입견을 만회해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이 있습니다.

 

  시마다 소지는 1981년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화려하게 등단하여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미스터리의 거장입니다. [최후의 일구]는 '미타라이 기요시'가 등장하는 시리즈로, 미타라이는 탐정이 취미인 점성술사에서 작품이 하나씩 발표될 때마다 능력이 조금씩 향상되어 이제는 점성술을 취미로 하는 IQ300의 명탐정입니다. 조금은 허황하지만, 지구 상의 대부분 언어에 통달했으며 취미는 클래식 듣기이고 어떤 이유에선지 커피는 마시지 않으며 대신 홍차 마니아입니다. 마치 셜록 홈즈와 존 왓슨처럼 미타라이 옆에는 이시오카 가즈미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캐릭터,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부'라는 수식어, 그동안 발표한 작품... 등을 통해서 이번에는 잠시 사회파 미스터리가 아닌 신본격 미스터리를 제대로 즐겨보자는 기대감으로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타이밍이 맞지 않았나 봅니다. 아니, 어쩌면 시마다 소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작품은 신본격보다는 사회파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회파를 좋아하는 처지에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나, 신본격을 바라는 처지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있습니다.

 

  "서류가 날조되었다고 하더군요. 세상에는 이자제한법이라는 법률이 있어서 돈을 빌리 때의 이자 상한선은 15퍼센트로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그 회사는 40퍼센트의 폭리를 취하고 있으니 위법이라며 따라서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고요."

  미타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사유사항확인서라는 것이 '이자 제한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재판에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법원은 극단적인 서류 지상주의입니다."(p.43)

 

  [최후의 일구]는 하나의 단편과 하나의 중(장)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작품은 개별적이면서도 서로 연관된 독특한 구성으로 입체적인 재미를 줍니다. 1장에서는 엉뚱한듯하면서도 천재성이 뚜렷한 탐정 미타라이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전개하는 친구 이시오카에 대해서, 그리고 이들을 찾아온 어느 의뢰인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다르게 소설은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명탐정의 추리는 사건 해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야구밖에 모르는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이 가난한 탓에 저에게 야구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이 있는 행위였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연대보증을 서는 바람에 당시 4백60만 엔 정도의 빚을 지고 목을 매 자살한 뒤로는 그 마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프로야구입니다. 즉 저는 어머니를 위해 처음부터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그 마음가짐으로 매일 야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으로도 돈을 위해 야구를 하는 거라고, 야구로 돈을 벌 거라고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p.81-83)

 

  이것이 정말 최후의 일구다. 내 생애 최후의 일구. 죽은 내 아버지를 위해서, 죽은 다케치의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상에서 영원히 매장된 다케치의 천재성을 위해서. 내 야구 인생 마지막 추도식을 겸한 공을, 지금 던져 보이겠다!

  140킬로미터를 내봐! 라고 자신에게 소리쳤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반드시 던져야 한다. 20여 년간의 야구 인생도 오늘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앞으로 영원히 어깨가 망가진다고 해도 상관없다.(p.258)

 

  2장에서는 야구로 인생을 살아온 두 선수의 안타까운 운명이 그려져 있습니다. 대부업체와 연관되어 자살한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야구 선수가 되어 집안을 일으키고자 했던 다케타니 료지, 하지만 프로의 벽은 매우 높기만 합니다. 평생 야구를 사랑하고 열심히 했지만, 한 번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2류 투수의 슬픈 인생. 그는 아버지를 위해, 친구를 위해 최후의 일구를 던집니다.

  타고난 재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4번 타자 다케치 아키히데, 하지만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선수는 어떤 이유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벌입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최후의 일구]는 다시는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된 야구 선수의 기나긴 고백입니다. 두 젊은이의 노력과 성공, 좌절과 복수가 이야기를 지배합니다. 탐정 미타라이는 숨겨져 있습니다. 불법 대부업의 폐해를 고발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밀실 화재라는 트릭이 있고, 복수의 집념이 있습니다. 작가의 빼어난 글솜씨와 번역의 탁월함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살아가는 인생이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심
도바 순이치 지음, 나계영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도바 순이치, 나계영, [오심], 씨엘북스, 2012. 

Doba Shunichi, [MISS JUDGE], 2011.

 

  스포츠에는 도전이 있고, 승리가 있고, 사연이 있고, 감동이 있다. 그래서 창작의 좋은 동기가 될 것 같지만, 사실 그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이기 때문에 스포츠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 성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연쇄 살인, 밀실 트릭, 납치 유괴, 사회 문제... 등을 소재로 하는 미스터리가 야구와 만난다면? 그것도 팀이나 선수의 대결이 아니라, 선수와 심판의 대결이라면? 조금은 발칙하고 무모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지만, 도바 순이치의 [오심]은 악연으로 맺어진 고등학교 선후배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메이저리그에서 투수와 구심으로 만난다는 독특한 설정으로... 고도의 심리전을 벌이는 미스터리 드라마를 완성했다.

 

  오만함을 덕지덕지 처바른 듯한 상대방의 말투에 긴장한다. 뒤돌아보기 전에 '침착해!'라고 자신을 타이른다. '동요하지 마라. 평소처럼 하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p.21-22)

 

  심판은 단지 심판일 뿐이다. 경기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직업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다짐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버적거리는 불쾌한 소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p.25)

 

  다치바나 요시키는 강속구를 구사하는 화려한 투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프로에 진출한 이후 정확한 제구력으로 매년 꾸준한 성적을 올리며 기복 없는 활약을 해왔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2선발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 스프링 캠프를 마치고 드디어 일본에서 양키스와 개막 2연전을 하는 날, 그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한 사람을 만난다.

 

  맘대로 쓰라지. 분노야말로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게다가 그라운드에 나오면 자신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퇴장!"이라는 말을 할 권리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심판은 야구의 전능한 신이 된다.(p.93)

 

  그렇기에 심판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두려워하고 확실하게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명선수조차 낯빛을 살피는 심판이. "녀석을 열 받게 하지 마"라고 누구나 뒤에서 수군거리는 심판이. 선수를 능가하는 존재라면 역시 심판만이 떠올랐다.(p.94)

 

  다케모토 하야토는 한때 십 년에 한 명 나오는 인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주목받는 투수였다. 고교부터 대학까지 1선발로 눈에 띄는 선수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11년 전, 그날의 악연만 아니었다면 지금 자신이 마운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텐데... 야구를 그만두고 10년이라는 험난한 시간을 견디고서야 일본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심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그를 만났다.

 

  스트라이크존은 규칙상 엄격하게 정해놓았지만, 실제 운용은 룰북과는 딴판이다. 특히 높낮이는 룰북의 내용을 비웃는다. 투수가 떨어지는 공을 많이 던지고 이에 맞추어 타자도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요즘 추세다 보니 스트라이크존이 눈에 띄게 아래로 이동했다. 실제로는 허리에 찬 벨트가 상한선이고 하한선은 정강이 한가운데 즈음이리라. 일본 프로야구보다 꽤 낮은 감이 있다. 그리고 다치바나는 아직 그 스트라이크존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코스를 엄밀히 확인해야 한다.(p.57)

 

  2구가 방금 전에 볼이라는 판정을 받은 공과 같은 코스로 들어왔다. 미트만 움직이지 않으면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인 코스다. 그러나 화이트삭스의 포수는 질리지도 않고 미트를 비틀었다. 곧바로 볼이라고 판정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만을 토로했다.

  "들어갔잖습니까?"

  "자네가 미트를 움직였으니 볼이야."(p.140-141)

 

  선발 투수는 로테이션으로 등판하고, 심판은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를 합쳐서 50개 구장의 경기를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특정 투수가 공을 던질 때, 특정 심판이 구심을 보는 일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설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개막전 일구에 대한 의심스러운 판정으로 민감한 일본인 투수의 심리적인 문제와 결합하여 시즌 전체를 지배한다. 마운드에 오르는 제구력 투수는 타자가 좋아하는 코스로 약간의 차이를 주어 타구가 빗맞게 유도한다. 때로는 꽉 찬 코스로 승부하기에 스트라이크존은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같은 코스의 공에 대한 판정이 달라진다면? 투수는 흔들리고 더는 던질 곳이 없다. 그리고 시즌 내내 슬럼프와 겹쳐 악몽에 시달린다. 그때의 일구는 오심인가? 오심이 아닌가?

 

  마운드에 있는 투수보다 내가 더 잘 던졌다. 체력이든 정신력이든 무엇하나 모자란 것이 없었다. 그날의 사건만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격렬한 세월을 보내며 이날을 기다려왔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무조건 "퇴장!"을 외쳤다. 작가는 세심한 글솜씨로 두 남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던지는 자의 처지에서 그리고 바라보고 판정을 내리는 자의 처지에서... 과거 이 둘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었던 것인가?

 

  소설은 메이저리그라는 무대에서 팩트와 픽션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야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제공한다. 심판, 선수, 감독, 언론에 대한 상황묘사는 두말할 필요 없이 탁월하고, 야구의 매력을 한층 고조시킨다. 작품에 대한 불만은 없으나, 다만 번역이 조금은 깔끔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누쿠이 도쿠로, 이기웅 역, [후회와 진실의 빛], 비채, 2012. 

Nukui Dokuro, [KOKAI TO SHINJITSU NO IRO], 2009.

제23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인생에는 연습이 없으므로 하루하루가 결승전이고 승부처이고 선택의 갈림길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아니,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인생은 항상 더 나은 삶을 바라보고 욕망에 사로잡혀 살기에 후회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학교 다닐 때에 조금만 더 공부했더라면, 첫사랑에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진로를 선택할 때에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 비교하여 어떻게 달라졌을까? 누쿠이 도쿠로의 [후회와 진실의 빛]은 연쇄 살인을 해결해가는 형사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설은 경찰 조직-연쇄 살인-트릭과 반전을 통하여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미스터리 구조 속에 '후회'라는 인간 내면의 심리와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피범벅으로 쓰러져 있는 여성. 잘려 나간 집게손가락. 난도질한 칼. 여성을 덮쳤으리라. 격렬한 통증. 목숨을 빼앗긴다는 원통함. 그런 느낌들이 마치 자기한테 일어난 일인 양 온몸을 휩쓸었다.(p.10)

 

  살인사건 조사에 중요한 요소는 현장, 감별, 유류품 이 세 가지다. '현장'은 탐문에 의한 수사, '감별'은 피해자와 관련된 데이터 수집, '유류품'은 증거물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를 담당하는 각각의 팀 외에,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사안을 조사하는 역할로 '특명'이 존재한다. 수사본부에 투입된 인원은 이 네 가지 임무에 배당된다.(p.59)

 

  어느 겨울밤, 도쿄의 한적한 곳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순찰하던 관할 파출소 경찰에 의해 전신이 난자되어 피범벅으로 쓰러진 여성이 발견된다. 기동수사대는 현장 주변을 탐문하고, 사건의 심각성으로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어 경시청 수사1과 형사들이 투입된다. 세부적인 분담으로 시신의 부검과 유류품에 대한 정밀 감식이 이루어지고, 피해자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가 수집된다. 특이한 사항은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절단되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우선 맨 처음에는 '단지(斷指) 살인마'라는 정통적인 이름이 제안됐다. 그러나 '단지'라는 말에 실린 목가적인 울림 때문에 얼빠지게 들린다는 댓글이 다수 달리며 각하되었다. 이후로도 '도쿄 난도질 살인마 잭'이라든가 '인체 절단 살인마', '토막 살인마' 등의 이름이 게시판을 시끄럽게 만들었지만 어느 것이나 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러다가 하나, 시선을 끄는 게시물이 있었다... 그 이름은 '손가락 수집가(蒐集家)'였다. '수집'에 '收集'이 아니라 구태여 '蒐集'이라는 글자를 가져다 쓴 점에서도 세련된 센스가 느껴졌다.(p.213)

 

  감상의 즐거움을 맛본 이후로는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이 더는 허명이 아니게 되었다. 이름 따라 간다는 말이 있듯이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을 지어 준 이에게 지금은 감사했다.

  이제 이렇게 되고 나니 역시 더 갖고 싶었다. 겨우 세 개만으로는 수집이라 하기 힘들다.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손가락 세 개만으로는 부족했다...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손길을 쉬어서는 안 된다.(p.402)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또다시 손가락이 절단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언론은 낌새를 알아채고 수사 공개를 요청하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중에 희생자와 관련된 유력 정치인은 압력을 행사한다.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공간에서는 사건의 글이 게시되고, 심지어 '손가락 수집가'라는 호칭과 함께 다음 범행이 예고된다.

 

  작품은 '경찰소설'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주민 신고가 들어오면, 관할 파출소로 연락되어 경관이 순찰한다. 사건이나 범행이 발견되면 현장은 즉시 통제되고, 기수대가 신속히 투입되어 목격자를 확보하고 주변을 탐문한다. 몇몇 관리관은 현장을 점검하고 그들의 판단으로 수사본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특별'이나 '합동'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특별수사본부는 경시청 수사1과에서 나온 형사와 기수대 또는 관할 경찰서 형사가 2인 1조로 편성되어 세부적인 분담이 이루어지고, 각각의 임무를 통해서 수집된 단서는 수사회의를 통해서 하나로 조합된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수사의 방향을 수정하고, 추리하는 이러한 과정이 매우 세밀하여 오히려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를 잃고, 불구가 된 아들을 안고 망연자실해 있던 와타비키를 구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도 언젠가는 늙는다. 이제는 다이키를 쉽게 안아 주지도 못한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도우미의 힘을 빌려야 하리라. 다이키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이 낡은 집도 뜯어고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하다.

  출세하고 싶다. 와타비키는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는 추태도 마다하지 않고 출세를 갈망했다.(p.53)

 

  어떡하다가 이런 관계가 되어 버린 걸까. 지금까지 수없이 되뇌어 온 의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태도가 잘못된 걸까. 하지만 사이조는 결혼한 후로 가능한 한 아키호의 바람을 이뤄 주려고 노력해 왔다. 물론 매일 일찍 퇴근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면 들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아키호는 남편이 집에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출세, 안정적인 수입, 그리고 남 보기에 부러워할 만한 근사한 남편. 아키호가 사이조에게 바란 것은 이 세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결혼 당시부터 아키호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생활을 이어 가는 사이 어느샌가 아키호의 바람은 그 세 가지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이조와의 결혼 자체가 아키호를 바꿔 버린 원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수없이 고민해도 아키호와의 결혼은 실수였다는 결론에 이르러, 사이조는 우울해졌다. 그 유일한 결론을 애써 외면하며 지속해 온 6년간의 결혼생활.(p.341-342)

 

 

 

  이전에 읽었던 경찰소설... 이혼한 삼십 대 초반의 기동수사대 여성과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은 중년의 베테랑 남성 수사관이 한 조로 편성되어 활약하는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시공사, 2007.), 한때는 잘나가는 경시청 형사였으나 아내를 잃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지역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형사를 다룬 오기와라 히로시의 [소문](예담, 2009.) 등과 마찬가지로... 누쿠이 도쿠로의 글에서도 경찰이라는 직업의 특수성, 과중한 업무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현실, 부서 간의 경쟁과 반목, 진급과 출세를 위한 야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경찰의 사명과 사건 해결의 본질, 그리고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은 인생을 작가는 어둡고 무거운 필치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스피드한 전개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약간의 아쉬움이, 세밀한 전개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커다란 만족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 아라키 노부요시, 사진을 말하다 1
아라키 노부요시 지음, 백창흠 옮김 / 포토넷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아라키 노부요시, 백창흠 역,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 PHOTONET, 2012. 

Araki Nobuyoshi, [TENSAI ARAKI SHASHIN NO HOUHOU by Nobuyoshi Araki], 2001.

 

  어린 시절의 꿈은 미술을 하고 싶었다. 전공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판화의 까끌까끌한 질감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한 번의 작업으로 여러 장을 찍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물론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사진의 취미'이다. 더구나 환경이 디지털로 변화하여 약간의 조작만으로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있어서 흠뻑 빠져들었다. 아마추어의 열정은 카메라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났고, 빛 좋은 날씨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진 감상이라는 고상한 습관을 갖게 했다. 그리고 기기적인 조작과 예술적인 표현을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일반적으로 카메라의 작동 원리와 촬영의 기본(기술)적인 부분을 배우기 위해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아마도 열의 아홉은 바바라 런던, 짐 스톤, 존 업튼이 공저한 [사진학 강의(제9판)](포토스페이스, 2008.)을 이야기할 것이다. 사진의 메커니즘과 표현에서의 응용기법, 사진의 평가와 시각적인 인식의 방법, 현대 사진의 감상... 등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이 집약된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사진의 구성과 표현에서 가장 도움을 받은 책은 한겨레 신문사 곽윤섭 기자의 [이제는 테마다](동녘, 2010.)이다. 수많은 생활 사진가를 만나며 사진에 대한 비평과 조언을 해온 기자는 선, 면, 대비, 패턴, 프레임, 부분과 전체, 공감각, 오감, 상징, 색, 일상, 추상... 등을 통해 사진의 테마를 말하고 있다.

 

 

 

 

 

  한 가지 테마를 주제로 하는 사진은... 1982년부터 '제주도'를 테마로 하여 셔터를 누르고, 1985년 섬으로 내려가 2002년에 갤러리 두모악을 만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故김영갑 사진가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 2003. http://www.dumoak.co.kr/), '가족의 일상'을 테마로 사진을 모은 모리 유지의 [다카페 일기①, ②](북스코프, 2009. http://www.dacafe.cc/), 그리고 '점프'를 테마로 하는 인터넷 공중 부양 소녀(http://yowayowacamera.com/)... 이러한 흥미로운 촬영은 나의 사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고, '테마'와 '패턴'이라는 의미를 깊이 각인시켰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눈부신 형광 분홍색의 표지로 시선을 끄는,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이라는 야릇(?)한 제목을 가진 또 하나의 사진 책... 아라키 노부요시는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이성과 감정의 사이에서... 일본의 에로티시즘을 찍는 사진가이다. 그가 말하는 사진의 세계는 어떠한 곳일까?

 

  맨몸으로, 몸으로 찍어야 합니다. '사진 찍으러 왔습니다'가 아니라 거리에 녹아들었다는 느낌이어야 합니다. 염탐꾼이 되든가,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일부러 드러내든가,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어중간한 모습은 좋지 않습니다. 낚시하러 가는 차림의 조끼, 특히 주머니가 여러 개 여기저기 달려 있는 조끼를 입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차림으론 사진을 못 찍습니다!(웃음) 긴자 거리에서 찍을 때와 신주쿠 거리에서 찍을 때는 복장을 다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15-16)

 

  나쁜 사진이 나온다는 건 결국 찍는 사람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습이 부족한 거지요. 그만큼 사진에는 자기 자신이 속속들이 드러납니다. 정말 사진을 하다 보면 자기가 탄로 나니까 두렵기도 합니다.(p.19)

 

  사진을 하는 사람은 촬영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우스갯소리로 수전증을 막기 위해 술과 담배를 끊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안정된 자세는 셔터 스피드를 확보할 수 있고, 그만큼 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천재 사진가의 조언은 어깨의 자유로움만이 아니라, 몸의 자유로움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 사진을 위해 사진가가 배경에 흡수될 것인지, 아니면 튀어나올 것인지... 그리고 사진의 결과는 카메라 때문이 아니라, 사진가 때문인 것을 알려준다.

 

  사진은 일종의 인터뷰입니다. 인터뷰라는 것이 상대로부터 무엇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사진은 인터뷰와 똑같습니다. 표현이 아닌 표출. 그러니까 상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무엇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p.37)

 

  (방적공장에서) 처음엔 어째서 자신을 찍는 걸까 의아해하던 공장 노동자가, 자기 사진이 걸린 사진전을 보고는 "마에스트로!"하고 외쳤어요. '어쩌면 내가 이렇게 멋있었나?' 하며 사진을 보고 자신에게 취해버린 거지요. 나는 인간의 존엄을 찍는 거예요.(p.131)

 

  그래서 역시 사진가는 마지막에는 포트레이트로 가는 거예요. 애써 여자의 알몸을 찍었지만, 마지막에는 얼굴만 찍는 거죠. 밀착인화를 보면 그래요. 밀착을 보면 거기가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해서 찰칵 하고 넓적다리를 벌리게 하고 한가운데를 말이죠. 하지만 그 뒤에 보면 마지막엔 얼굴이에요. 젖가슴도 등장하고 음모도 있어요. 그렇지만 마지막은 얼굴인 거에요.(p.129)

 

  가장 관심을 두고 읽은 부분은 '포트레이트'(인물)이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찍기 위해 사진을 시작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며 어느 순간부터 모델 촬영을 가거나, 꽃을 찍거나, 사물을 찍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꽃은 불평하지 않는다." 때문이다. 인물 촬영은 가장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진과 사진에 나오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성향은 천차만별이라서...;; 예전에는 무조건 카메라의 성능을 과시하며 쨍한 사진을 찍었는데, 제대로 드러난 얼굴의 잡티 때문에 거북해하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괴짜 사진론은 더 나아가 인터뷰를 하듯이 장점을 끌어내는 촬영을 조언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찍으라고 조언하고, 모델을 제대로 알고 얼굴 촬영하기를 조언한다.

 

  예를 들면, 라이카는 소리도 렌즈도 대상에 스며들어가는 느낌이에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대상이 침투해오는 것 같은 카메라입니다. 이른바 명기(名機)지요.(p.43)

 

  인생이라든가 행복을 찍기에는 역시 라이카가 적합해요. 상냥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사람에 대한 건, 결국 자애라는 말로 통할 텐데 라이카가 그 '애지중지'라는 말에 꼭 들어맞는 렌즈고 셔터 소리이고 스타일이죠. 전에도 얘기했지만 라이카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스며들어가요.(p.53)

 

  그리고 모든 사진가의 로망인 라이카 예찬...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은 어느 천재의 허세나 괴팍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진솔함과 담백함으로 대화하는 글이다. 사진의 '테마'와 '패턴'보다는 아라키의 '섬세함'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고, 사진가의 '열정'보다는 카메라와 한몸이 되어 살아가는 '물아일체'의 모습이 보였다. 일본 에로티시즘의 대표자이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전혀 야하지 않게 들렸고... 유럽에서 일만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전시하고, 썩은 필름을 인화하여 자연이 만들어준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것을 통해 부유함과 여유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한 가지는 그래도 사진과 관련된 책인데, 중질지 이상으로 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미색지에 수록된 사진은 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매우 아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키 글, 오하시 아유미 그림, 권남희 역,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비채, 2012. 

Murakami Haruki, Ohashi Ayumi, [OOKINA KABU, MUZUKASHII ABOKADO_MURAKAMI RADIO2], 2011.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대다수 이등병이 그렇듯이 세상과 분리된 낯선 환경에서 모든 것에 새로 적응해야 하는,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억압된 시기였다. 부대 내 창고를 정리하다가 선반과 벽 사이의 틈에 뭔가가 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권의 책, 표지는 낡아서 제목을 알아볼 수 없는... 혹시, 야설(?)인가? 누군가가 숨겨놓은 야한 소설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만큼 자극이 필요했고, 욕망의 분출을 원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니 뚜렷하게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라고 쓰여 있었다. 절망과 허무로 가득한 20대 군인의 마음에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는 어떠한 감동이나 여운이 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원래의 위치에 책을 꽂았다. 그리고 잠시의 망상을 잊고 고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하루키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채 5분이 못되어 끝이 났다.

 

 

  두 번째로 만난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였다. 하지만 첫인상의 실망 때문일까? 아니면 여전히 메마른 정서 때문일까? 한 마디로 작품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후로는 골수 신봉자가 나타나 어떠한 예찬을 해도, [1Q84]가 돌풍을 일으키며 서점가를 점령해도... 취향의 차이로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일부러 외면했다. 그리고 오쿠다 히데오의 열광적인 팬이 되었다.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2012 서울국제도서전을 기회로 [잡문집]과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의 에세이 두 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동안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는 것을 목표로 책을 펼쳐 들었다.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뭐, 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어깨 힘 빼고 비교적 편안하게 이 일련의 글을 썼습니다.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p.6-7)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삼 년에 걸쳐 [1Q84]를 탈고한 후에, 에세이에 대한 관심으로 <앙앙>(anan)이라는 잡지에 연재했던 '무라카미 라디오' 한 해분을 모은 것이다.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라는 느낌으로 소설가가 쓰는 52개의 에세이는 오하시 아유미가 만들어낸 감상적인 동판화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채소의 기분 / 햄버거 / 로마 시에 감사해야 해 / 파티는 괴로워 / 체형에 대해 / 에세이는 어려워 / 의사 없는 국경회 / 호텔의 금붕어 / 앵거 매니지먼트 / 시저스 샐러드 / 이른바 미트 굿바이 / 올림픽은 시시하다? /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 궁극의 조깅코스 / 꿈을 꿀 필요가 없다 / 편지를 쓸 수 없다 / 오피스 아워 / 생각 없는 난쟁이 / 여어, 어둠, 나의 옛 친구 / 서른 살이 넘은 녀석들 / 오키프의 파인애플 / 마치 표범처럼 / 이제 그만둬버릴까 /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 택시 지붕이라든가 / 딱 좋다 / 신문이란 무엇? /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 달밤의 여우 /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합니까? / 타인의 섹스를 비웃을 수 없다 / 책을 좋아했다 / 휴대전화라든가 병따개라든가 / 캐러멜마키아토 톨 / 맛있는 칵테일을 만드는 법 / 바다표범의 키스 / 장어집 고양이 / 유리집에 사는 사람은 / 그리스의 유령 / 일 인분의 굴튀김 / 자유롭고 고독하고, 실용적이지 않다 / 커다란 순무 / 이쪽 문으로 들어와서 / 아보카도는 어렵다 / 슈트를 입어야지 / 뛰어난 두뇌 / <스키타이 조곡>을 아십니까? / 결투와 버찌 / 까마귀에게 도전하는 새끼고양이 / 남성작가와 여성작가 / 준 문 송 / 베네치아의 고이즈미 교쿄

 

  글을 통해서 하루키의 삶을 따라가 보면... 용두사미식의 대화를 좋아한다. 채소 중심으로 식사한다. 사소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는데 남들보다 시간이 걸린다. 수동기어로 운전을 즐긴다. 행사와 스피치와 파티가 가장 고역이다. 자바 현에서 개최하는 풀마라톤에 가끔 참가한다. 잡지에 에세이를 연재하지만, 에세이 쓰기는 어렵다. 의미 없는 말장난이나 별거 아닌 시시한 발상을 글로 쓰길 좋아한다. 독창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서비스는 마음에 오래 남는다. 앵거 매니지먼트를 한다. 외국에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싶은 경우, 시저스 샐러드를 주문한다. 신뢰하지만 신용하지 않는다. 실제 올림픽에는 진짜 피가 흐르는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오른손잡이여서 왼손잡이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은 잘 모른다. 유진 코스 외에 가장 좋아하는 조깅코스는 교토의 가모가와 강변길이다.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편지를 쓰자 라는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일기도 쓰지 못한다. 창작에서 가치 판단의 확고한 기준이란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다. 어지간히 필요하지 않은 한 쓴 책을 다시 읽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쯤 사소한 자설(自設)을 지니고 산다. 서른 살이 넘어 달라진 거라면 소설가가 되어 생활을 일신한 것이다.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린다. 파인애플을 보면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생각난다. 야구에 끝없이 투덜거리면서도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야구를 보고 스포츠 뉴스를 체크하고 틈이 나면 진구 구장에 가 완두콩을 안주 삼아 생맥주를 마신다. 인생, 앞날은 알 수 없다. 서른 살 때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고 작가로 데뷔했다. 바다 수영이 좋아서 한 해에 한 번은 철인3종경기에 나간다. 책에 사인하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이따금 사인회를 한다. 자신을 절대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뉴욕타임스 북리뷰>를 읽기 위해 일요판을 사러 간다. 섹스에서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질이다. 열세 살 때부터 LP판을 모으고 있다. 여름에 덴마크의 뮌 섬에서 마리안느 아주머니가 기획하는 문학제에 참가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오랫동안 불편했다. 한 권 한 권에 애착이 있고, 전력을 다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불만인 곳이나 미숙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슬란드는 아주 흥미로운 곳이어서 기회가 있으면 또 가고 싶다. 십 대 시절에는 무엇보다 책을 좋아했다. 중고교 시절 동안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서른 살에 작가라고 불리게 된 뒤로는 뭔가에 홀린 듯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맥주는 캔으로 마시는 것보다 병으로 마시는 편이 훨씬 맛있다. 캐러멜마키아토는 아직 마셔본 적이 없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바 같은 것을 칠 년 정도 경영했다. 아오야마 '바 라디오'의 블러디 메리는 역시 마셔볼 가치가 있다. 바다표범 오일은 무척 비리다. 좋아하는 가게는 대체로 머잖아 모습을 감춰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죄다 스타벅스 천지다. 사전에 실려 있는 예문이나 속담 외우는 걸 좋아해서 그런 게 있으면 옆에 있는 종이에 재깍재깍 메모해둔다. 남의 번역을 읽다 보면 직업병인지 오역이 신경 쓰인다. 어느 장소에서 '여긴 안 좋은걸'하고 느낄 때가 가끔 있다. 부부끼리 음식 취향이 다른 것은 아주 귀찮은 일이다. 십오 년째 이 인승의 수동 기어 오픈카를 타고 있다. 독자를 염두에 두기 보다는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아보카도는 어렵다. 자유직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슈트를 입을 기회가 거의 없다. 세상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할 대단한 사람이 있다. <스키타이 조곡> 음반을 가지고 있다. 푸슈킨의 단편을 읽은 뒤로 버찌는 완전히 좋아하는 과일이다. 젊은 시절에 누가 말려도 넘어야 할 벽이 있으면 꼭 기세 좋게 시비조로 덤벼들었다. 일본 서점의 소설 코너에 가면 '남성작가'와 '여성작가'로 구분된 경우가 많다. 인생에서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음악이 있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p.219)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키의 잔잔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인생을 살아오며 경험으로 깨달은 교훈이 있고, 작가로서 글쓰기의 고충과 내면의 고백이 있으며, 번득이는 재치로 웃음을 주고, 감동적인 서술로 눈물을 짜낸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소박함으로 마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글과 어울리는 동판화는 여운으로 남아 마음에 새겨진다.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이전의 소화불량이 말끔히 치유되는 느낌이다.

 

  책을 읽으며 불연 듯 일어난 몇 가지 충동... 하나는 하루키의 삶을 따라 해보고 싶은 충동, 다른 하나는 하루키의 작품을 필사해 보고 싶은 충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루키의 에세이를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몰아친다.

  나도 이제 슬슬 나이를 먹는 것일까? 하루키의 소소한 일상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