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 기도할 때
고바야시 유카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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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유카, 민경욱 역, [죄인이 기도할 때], 소미미디어, 2021.

Kobayashi Yuka, [TSUMIBITO GA INORU TOKI], 2018.

가상의 법, 동해복수법을 내용으로 하는 고바야시 유카의 소설 [저지먼트](예문아카이브, 2017.)를 인상적으로 읽어서 소설 [죄인이 기도할 때]를 연속으로 읽었다. 공립학교에서의 폭력, 괴롭힘을 소재로 하는 사회파 미스터리인데, (우리도 우리지만) 일본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청소년의 자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어 점점 교묘하고 악랄해지는 범행을 고발한다. 여기에는 무관심한 가정, 무책임한 학교, 무능한 공권력이 있고... 가해 학생은 소년법 등으로 보호받지만, 피해 학생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유가족까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부조리한 상황에 쫓겨 자살할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다면 '11월 6일 복수의 날'에 증오하는 상대를 매장해버리고 죽자!(p.13)

주간지에 11월 6일의 저주... 라는 기사가 실린다. 중학교에서 폭력에 시달리던 S는 유서를 남기고 11월 6일에 자살한다. 다음 해 11월 6일에 S의 엄마가 자살하고, 그다음 해 11월 6일에 S를 괴롭힌 Y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열여섯 살인 도키타 쇼헤이는 한 학년 선배로부터 폭력과 금품 갈취를 당한다. 한계에 이른 상황... 주간지 기사를 떠올리며 자살을 결심하는데, 어차피 죽을 거라면 11월 6일에 가해자를 죽이고 나서 자살하는 것을 생각한다. 도시전설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11월 6일을 복수의 날로 만들어 수많은 복수극으로 학교폭력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날 피에로 복장의 페니에게 도움을 받는다.

시간이 흐르자 죽은 아들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왜 죽었지? 죽을 용기가 있었으면 뭐든 할 수 있잖아. 학교가 싫으면 전학을 가면 그만이다. 외국 유학이라는 길도 있다. 집에서 가정교사를 붙여 공부하면 되고, 왕따로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대안학교로 전학갈 수도 있었다. 선택지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그럼 부모로서 그런 선택지가 있다고 가르쳐준 적 있는가'라고 묻는 목소리가 울렸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구나......(p.92)

마흔다섯 살인 가지미 시게아키는 주간지 11월 6일의 저주... 기사의 피해 가족이다. 아들과 아내를 연이어 잃은 슬픔,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원한이 있다. 한순간에 가정은 붕괴되고... 그리움만, 학교 따위는 목숨을 걸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지 못한 후회만 남는다. 학교폭력 피해자 모임인 라이프세이프에 가입해서 활동하는데, 죽은 아들하고 연관된 피해자를 발견한다.

"사과해서 모든 걸 다 용서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만약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사과하면 모든 걸 용서해줄 거야?"

아버지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용서받을 수는 없어."

"아버지는 불륜을 저지르고, 어머니는 남자가 생겨 집을 나가고, 나는 아버지의 불륜 상대에게 짐짝 취급을 당하고. 만약 아버지 아들이 절망해 주으면...... 내가 자살해도 용서해줄 거야? 살인이라는 거, 타인만이 아니라고."(p.134)

괴롭힘을 당하는 당사자는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이다. 가정에서의 이해와 관심이 필요한데,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지 못하는 때가 있다. 살인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이지만, 극한에 달한 피해자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도키타 쇼헤이는 페니와 함께 가해자를 응징할 완전범죄를 공모한다.

어쩌면 나는 인간은 갱생할 수 있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특히 미성년이면 개선의 여지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게아키를 자살로 몰아넣은 학생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반성하며 사람에게 상처주는 일의 무서움을 평생 잊지 않고 살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한심한 생각을 했던 자신을 저주하고 싶어졌다.

물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고통을 깨닫고 반성하며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아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언젠가 누군가의 부모가 되면 그때는 깨달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음속에 강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웃기고 있네.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쳐야 한단 말인가. 녀석들에게 시게아키의 죽음은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의 나에게 묻고 싶다. 이 나라의 연간 자살자 수는 2만 명 이상인데 왜 자기 아들은 자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p.168-169)

가지미 시게아키는 인간의 갱생, 미성년의 교화를 기대하고 살았다. 하지만 현실은, 아들과 아내를 죽임으로 몰아넣은 가해자는 아무런 반성 없이 살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때의 사건을 자랑거리로 여기며 여전히 학교폭력과 괴롭힘을 일삼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시련, 악을 죽여 선량한 목숨을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요?(p.228)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검사도 판사도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폭력으로 아이를 잃은 유가족뿐입니다."(p.261)

날로 대담하고 경악스러운 학교폭력의 문제를 다루며 아주 극단적인 담론을 제시한다. 살인은 결코 해서는 안 되고,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임을 강조하면서도...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죽어야 하는가?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 를 묻는다. 극한의 상황에서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여야 하고... 누군가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유가족이 아니라 가해자여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전부 동의할 수 없지만, 수많은 청소년이 죽임의 상황에 몰려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소설로 말하는데, 부디 본인의 목숨만은 끊지 말아요!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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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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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이영미 역, [음의 방정식], 문학동네, 2016.

Miyabe Miyuki, [FU NO HOUTEISHIKI], 2014.

이제 슬슬 히가시노 게이고하고 미야베 미유키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반짝(?) 결심... 둘 다 나온 책이 많아서 따라가기에 벅차고, 읽을 때마다 시리즈와 재출간을 확인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소설 [음의 방정식]은 두 세계관의 충돌(교차? 크로스오버?)이 있는데, 행복한 탐정 시리즈의 사립탐정 스기무라 이사부로와 소설 [솔로몬의 위증](문학동네, 2013.)으로부터 20년이 지나서 주요 인물인 후지노 료코는 실제 변호사가 되어 등장한다.

이 등급 평가는 고등부에 올라가서도 답습되고 대학 진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세이카 학원 대학은 인기 이는 사립대지만 명문까지는 아니어서, 이른바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이곳에 진학하는 고등부 학생은 실은 대부분 B등급과 C등급이다. A등급 학생들은 다른 유명 대학에 진학한다. D등급은 거의 세이카 학원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년제를 포기하고 전문대나 직업학교를 택하는 학생도 많다고 한다.(p.14)

세이카 학원 중등부 3학년 D반을 대상으로 하는 '피난소 생활 체험캠프'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동일본대지진 후에 시작한 교육 행사로,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를 가정해서 하룻밤 동안 피난소 생활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참가는 희망자에 한해서이고, 사립학교답게 충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새벽에 한 남학생이 프로그램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유는 담임 교사의 선 넘는 무리한 진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학교는 진상을 조사하는데... 참가 학생 9명은 똑같은 목소리를 내고, 담임은 사실을 부인한다. 여기에 팽팽한 대립이 있다.

함정에 빠졌다고 호소하는 피해자의 결백을 입증하려면 왜 그런 함정이 생겼는지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피해자가 꺼릴 만한 사실을 들춰내면 된다.

"선생님, 저와 손잡으시겠습니까?"(p.60-61)

학생 측의 한 부모는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사립탐정 스기무라 이사부로를 고용한다. 담임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조난공동법률사무소를 찾아서 후지노 료코 변호사가 사건을 담당한다. 처음에는 반대의 위치에서 입장 차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기에 사립탐정과 변호사는 손을 잡고 정보를 공유한다. 두 주인공의 활약... 담임에 관한 평가는 열혈 교사로 찬사와 비난이 공존한다. 우등생의 성취감과 열등생의 소외감, 자랑거리와 비난거리가 오롯이 존재한다.

음의 방정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생과 학생,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 이끄는 쪽과 따르는 쪽, 억압하는 쪽과 억압받는 쪽의 조합부터 잘못되었고, 그러니 어떤 숫자를 넣어도 마이너스 답만 나온다.(p.116-117)

"이십 년 전의 나. 시기도 딱 이맘때쯤. 여름방학이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의 추억이에요?"

"네. 어떤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고 3학년들이 뜻을 모아 학교에서 모의재판을 열었어요. 저는 검사 역을 맡았죠."

...

"게다가 지금은 집에서 제가 더 세니까요."(p.128)

[솔로몬의 위증]에서 검사와 변호사 역을 맡았던 학생은 커서 결혼했나 보다. 미야베 미유키를 꾸준히 읽은 독자라면 스기무라 이사부로와 후지노 료코의 등장이 매우 반가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라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사회파 미스터리답게 일본의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분위기, 입시와 서열 제도, 사립학원의 인사 갈등, 중학교 3학년의 영악함, 교사의 잘못된 교육관... 등을 볼 수 있고, 이것이 얽히고설켜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유명 인물이 둘이나 나오면서 13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은 그들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사건도 어찌 보면 시시하고... 작가의 명성하고 비교해서 아쉬움이 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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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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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하루오, 김은모 역, [방주], 블루홀6, 2023.

Yuki Haruo, [HAKOBUNE], 2022.

2022 주간 분슌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2022 MRC 대상 1위

작년, 2023년에 출간한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추천은 유키 하루오의 소설 [방주]이다. 아무래도 비슷한 책을 즐겨 읽는 사람끼리의 입소문이기에 의무감과 기대감이 있다. 방주(方舟)는 글자 그대로 '네모난 배'이지만, 대부분은 '노아의 방주'를 떠올린다. 아주 오래전 산꼭대기에 3층으로 만든 배에는, 대홍수가 땅의 모든 것을 앗아갈 때 보존한 생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티브로 하는 클로즈드 서클물인데, 완성도는 매우 높다.

산속에 묻힌 이 화물선 같은 지하 건축물에서 탈출하려면 아홉 명 중 누군가 한 명을 희생시켜야 하니까.

우리는 희생양을 선택해야 한다.

아니면 모두 죽는다.

어떻게 할까?

아홉 명 중 죽어도 되는 사람은, 죽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건 그를 죽인 범인밖에 없다.

범인을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제한 시간은 앞으로 약 일주일.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살인범을 찾아내야 한다.(p.9-10)

일종의 폐허 탐험, 대학 등산 동아리 출신 선후배 7명은 깊은 산속에 있는 지하 건축물을 찾는다. 맨홀 아래의 시설물은 오래된 화물선 분위기이고, 지하 1층과 2층은 각 20개의 방이 있고, 지하 3층은 물에 잠겨졌다. 과격파 또는 신흥종교의 비밀 공간으로 예상하는,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만든 곳이다. 싸늘한 밤공기를 피해서 하룻밤 머무는데, 길을 잃은 가족 3명이 합류한다.

"즉, 철골을 제거하고 이 방의 닻감개를 돌려서 바위를 아래로 떨어뜨리면 되는 거지? 하지만 그러면 닻감개를 돌리는 사람이 여기에 갇힌다는 건가."(p.69)

새벽에 지진과 산사태로 이들은 모두 고립된다. 커다란 바위가 지하 1층의 입구를 막았는데, 지하 2층의 닻감개를 돌려서 바위를 떨어뜨릴 수 있으나 그러면 닻감개를 돌린 사람은 떨어진 바위에 갇힌다. 더구나 지하 3층의 물이 불어나고 있어서... 한 명이 목숨을 희생해야 나머지가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행 중 한 사람이 목 졸려 살해된다. 지진, 고립, 수몰, 살인이라는 일련의 사건... 우리 중 누군가는 범인이고, 범인이 닻감개를 돌리는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다.

결국 범인이 왜 비상사태가 발생한 와중에 살인을 저질렀느냐는 막연한 수수께끼만 우리 앞에 버티고 있다. 풀어낸들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은 수수께끼다.(p.106-107)

어쩌면 누가 지하에 남을지 선택하는 일이, 유야와 사야카를 죽인 것보다 훨씬 잔인한 살인일지도 모른다. 다만 꼭 누군가 한 명을 정해야 한다면, 살인을 저지른 자를 선택해야 한다. 괴롭지만 그것이 최선책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p.176)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죽는 사람과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죽는 사람, 어느 쪽이 더 불행한지는 남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겠지."(p.231)

모두가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굳이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누군가가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면, 범인이어야 한다는 합의는 올바른 결정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물은 점점 차오르고... 여기에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난다. 목이 잘린 시체, 대담한 범행... 연쇄살인 사건이다. 한정된 시간에 범인을 찾아야 하고,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그 과정이 치밀하고 논리적이다.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의 특징은? 외부하고 연락할 수 없는, 철저히 단절된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이어야 하고... 외부인의 소행이 아닌 정해진 숫자의 내부인 중에서 범인은 나름의 동기와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소설 [방주]는 웰메이드이다. 노아의 방주하고 비슷한 산꼭대기의 지하 3층 건축물은, 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물이 차오른다. 여기에서 연쇄살인의 동기는 분명하고, 이것을 밝히는 과정은 흥미롭다. 마지막 반전이 별점을 확~ 끌어올리는데,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한 충격이다. 일본 미스터리의 오락성이라는 측면에서 최고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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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로 양복점
가와세 나나오 지음, 이소담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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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세 나나오, 이소담 역, [이사부로 양복점], 황금시간, 2019.

Kawase Nanao, [Taylor Isaburo], 2017.

달콤한 힐링이 아닌 저항과 혁명에 관한 소설이다! 작가인 가와세 나나오는 패션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한다고 한다. 패션 디자인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이는데, 역발상 전략이었을까? [이사부로 양복점]은 코르셋을 소재로 한다. 코르셋은 여성의 허리를 조이는 기능성 속옷이고, 여성주의자에게는 억압의 상징이다. 그래서 여성 해방으로 탈코르셋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그런데 다시 코르셋을 입자는 괴이한 주장! 코르셋 혁명에 관해서이다.

내 인생은 앞으로도 쭉 변변찮을 것이 분명하다.

중학생 때 이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선 첫 번째 비극은 후쿠시마현의 어중간한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다.(p.8)

변변찮은 인생을 한탄... 몇 가지 이유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지나간) 후쿠시마현의 어중간한 시골 마을, 쓰다 아쿠아마린이라는 이상한 이름, 에로 만화를 그리는 엄마, 보잘것없는 외모와 가난한 현실 때문이다. 청소년기의 방황을 넘어서 대재난 이후 일본 사회의 무력감을 드러내고, 더구나 고령화와 지방 소멸의 문제하고도 연관이 있어 절망적인 분위기이다. 반전이 필요하다.

나는 낡은 보디에 입힌 고상한 코르셋을 바라보았다. 허리 부분을 과도하게 조였고, 몸에 맞춘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연출하기 위해 열 장 이상의 조각을 복잡하게 꿰맸다. 가슴에서 허리까지 오는 코르셋은 세로줄 무늬를 강조했고, 촘촘한 솔기 사이에 뼈대를 몇 개나 삽입한 것이 보였다. 저것은 고래수염이다. 가터벨트까지 갖춘 이 코르셋에는 18세기 로코코풍 기교가 한껏 발휘되었다.(p.22-23)

그런데 이사부로 양복점, 다 망한 시골 양복점에 여자 속옷이 등장한다. 호기심과 망측함으로 화제가 되는데, 낡은 보디에 입힌 고상한 코르셋은 18세기 로코코 양식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유일하게 (본의 아니게 여성 속옷에 관심이 많은) 아쿠아마린은 이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상류 계급의 상징이었던 코르 발레네의 가치를... 여성 복식은 투쟁과 번영의 역사이고, 양복점이 망한 이유는 시대에 맞물리지 못해서이고, 신상품으로 내놓은 코르셋은 예술의 경지이다.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 쓰다 아쿠아마린과 여든두 살의 재봉사 스즈무라 이사부로는 코르 발레네를 앞에 두고 깊은 대화를 나눈다. 어린 남자와 늙은 남자의 속옷 얘기는 우스꽝스러우며 경이롭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나는 82년이나 사회라는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안전지대에 앉아서 그저 순종하며 살아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간이 같은 체제 쪽에 서 있더구나. 남자로서 이 꼴이 한심하지 않니?"

"아니요, 그다지요."

"어리석기는! 한심하다고 생각해야지! 지금 당장 일어나야 한다! 화염병을 여자 속옷으로 바꿀 때야! 속옷으로 이 세상을 깨부술 순간이 왔어!"(p.53-54)

"남의 눈치 보지 마. 남과 비교하지 마. 의견을 억누르지 마. 네 인생을 너 이외의 누구에게도 맡기지 마."(p.79)

"어떤 천이든 방향이 있어. 거기에서 1밀리미터라도 벗어나는 순간 천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결을 거슬러서 억지로 완성하면 주름이 생기고 형태가 무너져서 결과적으로 옷이 인간에게 복수를 한다."

"옷이 복수를 한다니요......"

"몸의 중심선에서 옷감의 결이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옷을 입는 사람이 영향을 받아. 왠지 편하지 않고 당겨지는 것 같고 움직이기 불편한 느낌은 몸이 보내는 경고야. 재봉이 형편없는 옷은 뼈와 근육을 서서히 비틀어지게 하고 신경에도 영향을 줘. 내가 국가 첩보원이나 킬러였다면 옷을 무기로 쓸 거다."(p.81)

"숫자는 그냥 기준일 뿐이야. 인간의 눈은 세상을 늘 착각해서 보니까. 봉제물은 수치의 정확함보다 봤을 때의 정확함이 중요해. 직각 옷깃을 만들 때도 눈의 착각 때문에 안쪽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여. 직각으로 보이려면 몇 도쯤 바깥으로 내야 하는데, 대부분 수치에 지나치게 의존하니까 기계적으로 패턴을 그리고 끝이지."(p.85-86)

"원래 무모한 짓은 젊은이가 아니라 늙은이가 하는 법이야. 나이를 먹을수록 멍청해지니까. 나는 꿈과 보람을 위해서라면 벌이 따위 없어도 행복하다느니 하는 말은 개나 줘버릴 헛소리라고 생각해. 그런 건 인정받지 못했을 때를 위한 예방책에 불과해. 상품에 맞는 대가를 얻어야 혁명이 비로소 성공하는 거니까."(p.142)

그동안 변변찮은 인생이었다고 여기는 두 사람은 코르셋 혁명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갈고닦은 기술로 코르셋을 만들어 인생을, 세상을 바꾸려는데... 가족, 학교, 상공회(상인회), 부녀회, 지역 주민의 반대와 반발이 거세다. 미성년이라서, 노년이기에 이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은 매우 과감하고 도전적이다. 체제 저항과 혁명 정신 외에 작가의 옷에 관한 철학이 잘 드러난다.

"스팀펑크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지금은 다양한 요소가 뒤섞이고 분류되었거든요. 사람에 따라 해석도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그래도 바탕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시대예요. 이 한 세기에는 다양한 분야의 기술과 문화가 빼곡하게 채워졌으니까요."(p.169)

"지금 정했어요. 아니요, 제가 멋대로 정했어요. 이 가게의 테마를 '에버렛 자포니즘'으로 하겠어요."

"에버렛? 그건 또 뭐냐."

"양자역학으로 다세계 해석을 한 사람이에요. 이 세상이 다양한 순간마다 나누어져 수많은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이론이에요. 즉 일본에는 개국한 직후에 다시 쇄국으로 돌아간 평행 세계가 있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단순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화양절충(일본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의 조화)이 아니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만들어내겠다는 소리예요. 기모노와 코르셋을 조합한 필연성이나, 그걸 입은 사람들의 생활상 같은 거요. 이사부로 양복점에서 일본의 평행 세계를 만들 거예요."(p.204-205)

좋은 옷을 만들어 과거(리즈 시절)를 회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바꾸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켜... 인생을,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이지만,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생기고... 에버렛 자포니즘을 철학으로 멋진 코르셋을 만들어낸다. 어떤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 용기를 북돋는 소설이다. 패션 디자인으로, 그것도 코르셋으로 체제를 거스른다는 발칙한 상상은 아주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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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
사이조 나카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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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이조 나카, 이규원 역, [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 북스피어, 2019.

Saijo Naka, [MARUMARU NO IGA], 2017.

제36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와,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무슨 감동 공식이 있는 것인가? 살짝 유치하면서 뻔한 내용이지만, 뭔가에 홀린 듯이(공식대로 흘러가서)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에도 시대 1800년대 중, 후반을 배경으로, 3대가 경영하는 작은 과자점 난보시야(南星屋)에는 희비와 애환이 있다. 기억나는 일본 역사소설은 하무로 린의 [저녁매미 일기](비채, 2013.)인데, 쇼군과 농민 사이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무사의 이야기라면... 사이조 나카의 [오늘은 뭘 만들까 과자점]은 전통 과자를 만들어 파는 조닌(도시에 사는 상인이나 장인)의 이야기이다. 둘 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볼 수 있다.

카스도스

와카미도리

이가모찌

오오우쯔라모찌

우메가이

마쓰카제

난텐즈키

에도성 고지마치 6초메 뒷골목에 있는 과자점 난보시야는 매일 정오에 문을 여는데, 일각(2시간) 전부터 사람들은 줄 서서 기다린다. 작은 가게, 정해진 명물 과자는 없다. 단지 계절이나 명절하고 어울리는 과자를 내놓고, 주인장의 기분에 따라 그날그날 다른 과자를 만들어 판다. 명품 과자를 납품하는 어용 가게도 있지만, 난보시야는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먼... 재료를 선택하고 제조를 궁리하여 이문을 최소화하기에 서민이 즐겨 찾는 곳이다. 여기까지는 흔한 설정이다.

지헤에의 아명(에도 시대 무가나 화족 집안의 아이가 어릴 때 쓰던 이름)은 오카모토 고헤이지였다. 오카모토가의 차남이며 한 살 어린 고로가 삼남이다.

열 살에 무가 신분을 버리고 과자 장인의 제자로 들어간 것은 스스로 원해서였다. 같은 시기에 고로도 절에 들어갔다.

큰형이 오카모토가를 계승하였는데, 지금은 타계하고 큰형의 아들이 당주로 있다.

지헤에는 우에노 야마시타에 있는 과자점에서 10년을 수행하고 2년간 보은봉공(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주인이게 은혜를 갚기 위해 일정 기간 남아 일하는 것)까지 마친 뒤 에도를 떠났다. 기량을 닦기 위해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것은 과자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의 장인이나 거치는 과정이다.(p.16-17)

어머니는 신부수업을 위해 에도 성 내궁에 들어가 일할 때 주군의 성은을 입어 지헤에를 임신했다. 다행히 딸이라도 낳아 측실이 된다면 오카모토가에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오빠 구니에 역시 괜한 욕심을 부릴 사람은 아니어서 지헤에를 아들로 들여 오카모토가에서 키우기로 했다... 당시 친부는 아직 십대로 나이가 어렸고 쇼군직 상속을 앞두고 있었다. 구니에는 누이가 잉태한 아기가 친부의 쇼군직 상속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p.48-49)

이제는 환갑의 나이, 난보시야의 주인인 지헤에는 전대 쇼군의 서자라는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 유력 가문인 외삼촌 오카모토가의 차남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고모로, 사촌을 형제로 알고 살았다. 열 살이 되었을 무렵, 우연히 비밀을 알게 되고... 가문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무가 신분을 버리고 과자 장인이 되기로 한다. 5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과자에 진심인 그는 10년의 수행과 2년의 보은봉공을 끝내고도 16년 동안 숱한 지방을 돌아다니며 72권의 과자첩을 기록했다. 에도로 돌아와서 딸 오헤이와 손녀 오키미와 함께 여러 지방의 과자를 만들어 파는 완전한 상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고 여기던 출생의 비밀이 문제를 일으킨다. 과자로 연결된 현재와 과거의 사건은 아주 흥미진진하다.

태어났을 때 이미 곁에 없던 친부에게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다만 머나먼 존재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갑을 맞은 올봄, 지헤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뭐 하나 효도한 일이 없구나.(p.47-48)

스이노스케는 눈 깜빡이는 시간마저 아끼려는 양 지헤에의 손을 응시했다. 그 손이 빚어내는 것들 하나하나가 놀랍고 기뻤다. 한편 소년의 무구한 광채는 늙은 지헤에에게는 눈이 부실 정도여서, 그저 웃는 얼굴을 최대한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을 어느새 품게 되었다.

"무사는 무엇을 위해 있는 겁니까?"

스이노스케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전쟁 없는 요즘 세상에 무사에게는 어떤 역할이 있는 걸까요?"

"어떤 역할이라니...... 그거야......"하고 말을 꺼내 놓고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p.80)

"경단처럼 마음도 둥글게. 그게 요령이란다."

"하지만 이가모찌니까 까칠까칠해도 괜찮지 않나요?"

...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구나...... 이가모찌보다는 마루마루처럼 마음을 둥글게라고......"(p.134)

무가에서 태어나 과자점 주인이 된다. 여덟 살 고헤이지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행복에 겨운 동생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179)

얼마 전 옹이와 이야기할 때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그 저택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더 커다란 무엇, 바로 쇼군의 숨겨 둔 아들이라는 자신의 출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행에 나서서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던 것도 에도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p.221)

"마쓰카제를 팔던 가게 주인이 이걸 들고 진지하게 말하더군.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 같다고 말이야."

...

딸이 결혼하는 날은 부모에게 무엇보다 기쁜 날이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쓸쓸함이 사무치는 날이다.

"그래도 딸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조금쯤 쓸쓸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p.267)

아버지는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고헤이지에게는 사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친부인 이에나리에게도 친밀감은커녕 혐오밖에 느낄 수 없었다.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는지 구니에는 꾸짖는 투로 말을 이었다.

"주군은 너를 남몰래 걱정하고 계신다. 종종 내려 주시는 과자가 그 증거다."(p.288)

전대 쇼군의 7주기, 지헤에는 어린 시절에 다른 가문하고 다르게 유독 과자를 하사품으로 내려주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그때의 맛을 떠올려 카스도스를 만들었다가 곤욕을 치른다. 어느 무가 소년이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자기의 어린 시절이 겹치고, 잠시 손자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헤에는, 딸과 손녀가 드러내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살기를 원한다. 무가에서 태어나 대권과 가업을 포기하고 과자 장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과거가 나오고... 손녀 오키미는 다이묘 가문하고 혼담이 오가는데, 이것은 지헤에의 출생 때문에 자칫 모반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난보시야에는 고향의 맛을 간직한 과자가 있고, 끊임없이 펼쳐지는 희로애락이 있다. 즐거움을 나누고, 괴로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과자 장인은 과자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언짢은 일은 잊어버리고, 행복을 주는 과자... 무사의 칼보다 더 힘이 있는 과자의 이야기이다. 내일은 화과자라도 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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