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난 군대에 가기 전까지 독서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을 사기 위해 자발적으로 서점에 간 적이 없다는 의미다. 동시에 군대에선 독서를 제대로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시에 독서의 즐거움을 깨닫고 가리지 않고 많은 책을 읽었었는데, 특히 유명한 논객들의 책을 많이 봤다. 홍세화, 진중권, 박노자, 강준만, 고종석 등의 책을 주로 읽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날 키운 8할은 그 때 읽은 책들의 저자들이다. 그 중 고종석은 특히 각별하다. 복거일이 고종석에게 개인의 자유를 알려준 스승이라면 내겐 고종석이 집단의 무서움을 알려준 스승이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에 둘러싸인 한국 사회에서 독서 한 번 안 하며 사회가 일러준 길을 충실히 따라온 나였다. 그랬던 내가 당시 고종석의 <서얼단상>, <자유의 무늬>등을 읽으며 여성, 동성애자 등 소수자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권이란 단어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중학교 사회시간에 천부인권을 배우긴 했지만, 당시 인권과 천부인권은 다른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일보도 안 보고 그가 낸 언어관련 서적엔 별 관심이 없었던지라 고종석을 잠시 잊고 살았다. 그리고 얼마 전 고종석의 <바리에떼>를 읽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난 잠시나마 군대로 되돌아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종석의 생각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군 시절의 추억들이 <바리에떼>를 통해 뿜어져 나온 것이다.(지금도 난 그 당시 읽었던 진중권의 <엑스리브리스>나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박노자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을 보면 군 시절의 추억에 사로잡힌다.) 고종석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열정도 떠올랐다. 내 안에 있던 기존의 낡은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이 존재함을 알았을 때 느꼈던 충격,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을 내 안에 굳건히 건설하고자 다짐했던 열정을 <바리에떼>속에서 다시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그의 글을 읽으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언제 부턴가 내 모든 생각은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는 없다는 사실이 진리다’란 말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다녔었다. 나는 ‘~주의자'들이 싫었으며 진보나 보수의 가치를 신처럼 숭배하는 이데올로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네 말도, 네 말도 다 맞다’는 황희정승의 답답한 말을 곱씹으며 모든 교조화된 모든 급진적 운동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여성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계급과 인종 문제를 경시했던 초창기 미국 여성 운동가들을 비판하는 식으로 말이다. 단순한 사안이라도 이데올로기에 맞춰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일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진보건 보수건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생각이 그러하다보니 회색분자란 비판도 받고 보수적으로 변했단 이야기도 들었다. 내가 쓴 글을 읽은 한 친구는 ‘네 글은 뭘 주장하려는지 모르겠다.’며 ‘그래서 네 글은 재미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이것도 저것도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식으로 글을 쓰니 글이 너무 약하단 의미였을 게다. <바리에떼>를 읽으며 알게 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고종석 때문이었다.  

 
<바리에떼>에 나타난 그의 글들을 보는 순간 알게 됐다. 고종석은 “남한의 일부 운동세력이 북한을 높이 평가하는 바로 그 이유가 내게는 북한을 위험스럽게 보아야 할 이유가 됐다.”며 집단주의(민족주의)를 비판한다. 또 그는 “불확실한 방향으로 치닫는 집단적 열정이 낳을 수 있는 파멸적 결가가 두려웠다”며 교조적 방식의 운동에 의문을 제기한다.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줄이는 것, 열정의 사슬을 자유로써 끊어내고 광신의 진국에 의심의 물을 마구 타는 것”이라고도 한다. 내가 확실한 주장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은 결국 5-6년 전 고종석이 내게 전달해준 생각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하던 고민들은 고종석이란 큰 강에서 흘러나온 지류였던 셈이다.
 
이처럼 난 <바리에떼>를 읽으며 추억에 잠기기도, 또 내 고민의 원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균형을 잃지 말자며, 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내 정체성을 조금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아마 고종석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S; 하지만 그가 하는 호남 이야기만큼은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지역주의 공포가 있어서인지 난 ‘호남 민심’어쩌고 하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진다. 결국 지역주의란 근거를 없애기 위해선 호남 민심이란 단어조차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걸 없애는 것이 반드시 호남인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P.S 2: 복거일의 <죽은 자를 위한 변호>에 대한 그의 반론은 나중에 따로 그에 관한 글을 써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좀 더 고민한 후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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