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만든 여자 1
신봉승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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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이야기가 어찌 흘러가든간에 세조의 며느리 한씨였다가 나중에 인수대비로 불리워지게 되는 여인이다. 그러자면 우선 한씨의 아들 성종의 배경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다. 남편인 의경세자가 죽고 사가로 나갔던 세자빈 한씨. 그녀의 큰 아들이 바로 월산대군이고 둘째 아들이었던 자산군이 바로 성종이다. 어리다는 이유로 왕세자가 될 수 없었던 월산대군처럼 예종의 적장자였던 제안대군 역시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왕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성종을 생각하면 계유정난의 주인공들부터 시작해서 앞뒤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름이 많다. 역사를 바꾸기 위해서 필요했던 건 대의와 명분에 따라 앞장설 수 있었던 신하들이었기 때문이다.  태종과 세조가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근원은 바로 신하들의 결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의와 명분이야 만들고자하면 뭔들 못만들까?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대의명분이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인 경우가 많은 듯 하다. '耳懸鈴鼻懸鈴'..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성종이 있었음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성종의 어머니이자 수양대군의 며느리였던 한씨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중에 그 여인을 인수대비라 부르게 되니  우리에게는 가장 익숙한 호칭이 아닌가 싶다. 수양대군이나 한명회의 정치권력에 자신의 의지와 야심을 끼워넣었던 여인..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했던 게 그 여인의 정치행보 속에 담긴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쩌랴, 그 시대는 드러내놓고 여인을 말하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다보니 내게는 한 여인의 행보를 따라간다기보다는 시대를 이끌어갔던 인물들 곁에서 슬쩍 슬쩍 곁눈질하는 듯한 여인의 모습만이 보여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굳이 여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남자들의 주변을 맴도는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속의 여인은 솔직하게 말해 어떠한 울림도 내게 전해주지 못했다. 거기에 있었다,라고 하는 존재감만이 느껴질 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종대에는 궐내에 내노라하는 위치에 머무는 여인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그 여인들을 머물게 하기 위해 창경궁을 지었을까?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수렴청정을 했던 세조비 정희왕후가 있었고, 제안대군의 어머니이자 예종의 계비였던 안순왕후도 있었다. 거기다 성종의 생모인 소혜왕후(인수대비)까지... 그러다보면 여인들의 입김이 당연히 거셀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성종의 여인들과 연산군의 여인들까지 합친다면 가히 여인들의 천국이라 할만한 시기다. 내 생각에 '왕을 만든 여자'라는 책의 제목은 단순히 왕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한 과정만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왕으로 즉위한 뒤에 어떤 왕으로 살게 되는가 하는 것도 왕이 만들어지는 과정일 수 있는 까닭이다. 성종의 뒤를 이었던 연산군을 들여다보라, 여인의 힘이 어떤 왕을 만드는가를 알 수가 있음이다. 그러니 그런 모든 면을 통해 여인의 힘이 느껴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바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일전에 읽었던 <난설헌>이 떠올랐다. 역시 여인의 이야기였던 까닭이다. 그런데 그 책에서는 너무 여인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아서 주변의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빈약하지 않았나 하는 글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글쓰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평론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니 이렇다하게 할 말은 없겠으나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면 차라리 여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렇게까지 들춰낼 수 있는 여인들의 역사는 없었을 터, 극작가라는 저자의 이름속에 내재되어진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이 책의 흐름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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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신 - 죽음도 불사했던 강직한 선비들
고제건 지음 / 리드잇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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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의 우의를 표현하는 말중에 管交라는 말이 있다. 변함없는 우정을 말할 때 흔히 쓰는 말이긴 하지만 좀 더 속깊이 살펴보면 단순한 우정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믿어준다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상대방을 믿을 수 있다는 강직함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이 사자성어의 유래만 살펴보더라도 나를 믿어준다는 말과 나를 알아준다는 말은 정말 큰 의미를 지닌 듯 하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三顧草廬를 했을 때 제갈공명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나를 알아주니 내가 그를 따라나선다던... 뜬금없이 웬 사자성어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믿음이라는 말에 앞서 나를 알아준다는 말이 먼저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책속의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노라는... 한편으로는 영웅이 될 수 있었으나 영웅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한풀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작은 느낌을 책장을 덮으면서도 지울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하며, 그만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 이 책속의 인물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움을 불러기도 한다. 알아주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이라는 말은 사실 허울좋은 말에 불과하다. 그 한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자신의 능력이 평가되어지는 까닭이다. 강태공처럼 낚시줄이나 드리우고서 何歲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직언(直言),직신(直臣), 직설(直說) 이다. 주제속에 보여지는 인물은 우리가 열심히 배우고 익혔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 퇴계 이황, 사암 박순, 성호 이익, 매월당 김시습, 다산 정약용, 고운 최치원, 연암 박지원, 교산 허균, 백호 임제, 어우당 유몽인... 그야말로 내노라하는 이름들은 다 모였음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권력의 뒷편으로 밀려났거나 밀려나고자(?) 했던 사람들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나를 알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거나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지키시게. 나는 나 나름대로의 세상을 살다가겠네" 라는 말로 권력의 길을 외면했거나,  "나의 소망은 모든 사람들이 양반이 되는 것" 이라거나 "서자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소서" 라며 백성들의 삶조차도 끌어안으려 했던 사람도 있다. (소제목에 인물의 성격이나 특징을 담은 듯하다) 그들은 책속의 말처럼 철저한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때를 잘못 만나서? 시절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인생을 살았던 셈이다.  백호 임제편에서 잠시 등장했던 일화가 있다. 밤새 술을 마시고 말을 탔는데 시중들던 하인이 한쪽 신은 가죽신이고 한쪽 신은 짚신이옵니다, 했다. 그가 이렇게 답했다한다.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왼쪽에서 보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그게 무슨 탈이냐?"  따지고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딴지를 걸고 싶어졌다. 耳懸鈴鼻懸鈴이다. 저 편한대로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쯤일까? 남이야 뭐라하든 나는 나 편한대로 살겠다는 말이 아니고서야...

 

그래, 어찌되었든 直言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말은 듣기에 나쁘지만은 않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보이는 현실도피적인 성향보다 호방하면서도 명쾌하고 드높은 기상을 지녔다는 그 표현이 왠지 껄끄럽다. 정말 그랬을까?  해봤자 안된다는 현실도피적인 마음이 더 크지 않았을까?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좀 더 크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하는 말이다. 세상의 이치를 깨치고,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찾아내는 것이 학문이라고 했다던 퇴계 이황의 말처럼 실용학문이 좀 더 일찍 우리의 역사속에 자리매김을 했더라면.. 이런 생각을 한번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책속의 인물들은 좋게 말해 허울보다는 실제적인 삶에 초점을 맞췄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랬기에 치졸한 명분싸움에서 저만큼 물러서 있고자 했을 것이다. 퇴계를 존경했다는 성호 이익.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회개혁을 주장했다는 그가 관념적인 당시의 학문 풍토를 비판하고, 경세치용적인 경학을 주장했다는 말은 새삼스럽다. 다 읽고나니 책속의 인물들이 실제로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진다. 그들이 어떤 뜻을 품고 살았든, 후세의 평가가 어떻든, 나는 다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알 뿐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들의 인생여정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잠깐씩 등장하는 단면이 그들의 삶 전부는 아닐테니.. <어우야담>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한마디가 큰 울림을 남긴다. 그들은 정말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하며 살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오래전의 사람이니... - 제비가 지저귈 때마다 '知之謂知之 不知謂不知 是知也'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구절로,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를 의미한다. -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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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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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그래서 군자라는 말인지 소인이란 말인지... 평가는 나의 몫이다. 군자로 보거나 혹은 소인으로 보거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군자냐 소인이냐를 따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다음말이 영 거슬린다.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아야 군자라는.. 그래서 나는 감히 생각한다. 소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결단코 군자는 아니었다고. 군자다운 면모를 읽지 못했다. 저자가 그렇게 유도했을까? 역사에 관한 평가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차이를 달리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자의 말에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곤 했었다. 이 시대의 눈으로 보지 않고 마치 내가 그 오래된 역사의 현장속으로 들어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아무래도 먼저 읽은 <윤휴와 침묵의 나라>가 주었던 여운이 이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된 듯 하다. 윤휴와 송시열의 대립구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던 윤휴의 그 말이 이제사 가까이 다가온다. 목차를 훑어보면 그다지 많은 책장을 넘겨보지 않아도 저자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본래의 의미를 잃고 조선이라는 나라에 와서 새롭게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 주자학의 폐단은 조선의 성리학이 왜 禮學으로 가야만 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어찌 감히 농민들이 사대부를 넘보랴, 농민을 잃을지언정 사대부를 잃을 수는 없다, 와 같은 소제목들이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결국 禮學의 목적이 저거였구나 싶어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어진다. 백성은 없고 사대부만 있던 나라가 조선이었다. 왕조차도 그들과 같은 반열이라고 생각하고자 했던 그들의 속내를 비추고 있다.
 
북벌에 대한 효종과 송시열의 두 마음.. 그야말로 겉과 속이 달랐던 신하의 두 마음.. 그 뜻이야 어찌되었든 형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의 북벌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면 실패와 성공을 떠나서라도 조선의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소헌세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죽지만 않았다면. 그가 제대로 왕위에 올라 자신만의 정치를 펼쳤다면... 모두가 사리사욕에만 눈멀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결과였다. 그렇게나 뜨거웠던 예송논쟁의 끝에 무엇이 남았는가?  한시대를 오로지 상복에 관한 일로 소비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지?  그토록이나 忠孝의 禮를 떠받들었던 그들이 왕에게 상복을 1년 입혀야 하는지 3년 입혀야 하는지를 놓고 한 시대를 떠들었다는 말이다. 실속은 오로지 사리사욕이었으니 밖으로는 그렇게 형식과 허울만을 가지고 떠들어댈 수 밖에 없었을 터다.  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스승만 알고 임금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아버지가 중한가 스승이 중한가를 따져야 했다는 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를 되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송시열이라는 이름이 안고 있는 많은 의미가 궁금했었다. 그가 어떻게 조선의 역사속에 그토록이나 많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지 궁금했었다. 국익(國益)보다는 당익(黨益)이 앞선다 라는 부분에서 많은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씁쓸함만이 남았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지금의 사대부들마져 그들과 똑같다는 거다. 어쩌면 그리도 판박이인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 이래저래 씁쓸하기만 하다.

 

한국사의 최대 금기,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300년 전 인물의 실체.. 책표지의 말은 정말 무서운 울림을 내게 전해주었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더욱 알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기에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일까? 분명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을 儒學, 그러나 중국에도 없는 儒學이 조선에 있었다. 조선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 자신의 학문을 내려다보면서 주자는 흐뭇했을까? 다시 되뇌여본다. 군자와 소인에 대해.. 옛말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은 자만이 군자라는 호칭에 어울릴 것이다. 아주 오래전 우연히 찾아가게 되었던 대전의 우암공원을 떠올린다. 다시한번 찾아오리라 했던 그곳의 남간정사는 잘 있는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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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 개정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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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읽어야 할 책', '적나라하되 천박하지 않은', '불편하되 무시할 수 없는' 신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 이 책을 말하고 있는 소개글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본다. 지금 세상에서 이런 내용의 책을 누가 그렇게 불편해할까?  이전에도 많은 책이 종교나 그들의 경전에 관한 왜곡을 짚어냈다. 이미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일텐데도 '불편하지만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한 걸 보면 아직도 종교의 어깨너머에 숨겨진 그 무엇이 더 있다는 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잘 읽힌다. '창조'에 관한 부분만 뺀다면 그다지 속도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느정도 각오한 일이긴 하지만 수시로 반복되어지는 이야기조차 쉽게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면 종교가 저지르고 있는 사악함이 지금의 세상속에 셀 수 없이 많이 보여지고 있다는 말일테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믿음'이라는 말에 빠져드는 것일까? 왜 그럴수 밖에 없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책이 제공해주고자 하는 듯 하다.

 

종교는 인류가 겁에 질려 울어대던 유아기에 생겨났으며, 우리가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지식욕을(그리고 위안과 확신 등 유아적인 욕구들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유치한 방법이다.(-101쪽)

 

사실 우리가 종교에 빠져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인간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연속에서의 인간은 개미만큼의 크기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개미보다도 더 작은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그 나약함을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너무나도 고차원적인 이야기 같다.  굳이 책을 통해 살펴보지 않아도 종교가 왜 생겨났는지, 누가 어떻게 종교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에게 죄를 저질렀는지 알 사람은 다 안다. 너무나도 단순한 힘의 원리가 거기에 숨어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처음 종교가 생겨나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그 바뀐 세상 역시 원천적인 힘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아직도 휘둘리고 있는 탓에 우리는 정말 하릴없이 그 '믿음'이라는 허울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어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의 신비로움은 이미 옛이야기에 불과하다. 종교라는 테두리가 없어진다면 인간은 어쩌면 공황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 그럴까?

 

믿음이 개인의 선택이 된 지금 신자들의 행동은 그들 자신이 알아서 할 문제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강제적인 방식으로 종교를 주입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도 신경쓸 필요 없다. (-146쪽)

 

중요한 건 처음이나 지금이나 종교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지독한 아집과 고집에 빠져 독선의 늪에서 허덕인다. '진정성'도 없고 입만 벌리면 새어나오는 그들의 '진리'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그들의 하는 양을 보라, 어쩌면 그리도 자신들이 내세우는 교리와 똑같이 이기적인지.... 저자의 말처럼 믿음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말은 백퍼센트 옳다고 본다. 나 역시 어떤 식으로든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솔직히 신경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근래에 스스로가 교인임을 선뜻 밝히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늘 변해야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늘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순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자가당착 自家撞着이라고하면 너무 심한 말일까?

우리는 정결하고 선택받은 소수, 다른 이들은 모두 저주받았네.

지옥에는 당신이 들어갈 자리가 충분해. 우리는 북적이는 천국을 원하지 않네. (-339쪽)

조지 엘리엇의 <애덤 비드>에 묘사되어 있는 풍자글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리도 완벽한 표현처럼 들리는지...

 

종교는 아무리 유순하게 굴더라도 결국은 '전체적인' 해법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해법에 따르면, 믿음은 어느 정도 맹목적이어야 하고, 사람들은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의 모든 측면을 더 높은 존재의 영원한 감시에 맡겨야 한다. 이 끊임없는 감시와 복종은 대개 무한한 앙갚음의 형태를 띤 두려움에 의해 더욱 강화되며, 사람들에게서 항상 최고의 품성만 끌어내지는 않는다. (-362쪽)

 

또 흥분하고 말았다. 종교이야기가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감정적이 되고 만다. 어쩌면 내가 종교에 대해 무지렁이라서 그러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종교는 마음을 앞세운 '믿음'이라는 의미보다는 '필요에 의한 소통이나 교류'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진실된 마음으로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이어야만 내세울 수 있는 게 '종교'요 '믿음'은 아닐 것이다. '사적'이거나 '공적인'것의 구분이 없어야 하는 게 '종교'요 '믿음'은 아닐 것이다. 어쩌다가 우리의 힘겨운 마음을 보듬어주어야 할 종교가 이렇게 변질되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이 책대로 말한다면 종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와 함께 교회에 가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과 가까이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던 내 이웃의 목소리는 아직도 나를 아프게 한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상상 속의 것이든 진짜이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진리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만약 하느님이 오른손에는 모든 진리를, 왼손에는 비록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꾸준히 부지런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감춰 쥐고서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왼손을 택할 것이다. - 고트홀트 레싱,<안티 괴제>-

 

 책을 읽고나서 나는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나이가 들면 나도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던 오래전의 다짐을. 책장을 덮기전 답답한 나의 마음에 한줄기 바람처럼 느껴졌던 문구가 있었다. 만약 하느님이 오른손에는 모든 진리를, 왼손에는 비록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꾸준히 부지런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감춰 쥐고서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왼손을 택할 것이다.. 라는 말이다. 어쩌면 서로를 향한 배려와 마음도 없이 '믿음'이라는 말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종교를 가졌다는 게 일종의 부적처럼 느껴지는 세상은 되지 않기를 기원해본다. /아이비생각

 

"메시아는 오시지 않는다. 심지어 전화도 하지 않을 것이다!" -2001년에 나온 이스라엘 히트곡 (-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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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호스
마이클 모퍼고 지음, 김민석 옮김 / 풀빛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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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 달랐을 뿐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다지 특별한 의미는 없어보인다.  말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시점과 다를바가 없었던 까닭이다. 이것이 실화라면?  실화였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기적같은 우연이 일어난다는 게 놀랍고 신기한 일일테니... 무언가를 진정으로 가슴가득 원한다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뭐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멋진 일이긴 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음을 다한 참사랑의 댓가쯤일까?  사람과 동물 사이의 교감이 이루어내는 감동은 작지 않다. 그만큼 순수한 사랑이 필요했을테니. 시점을 바꿔 말을 또하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와 비슷한 주제들은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의인법의 위대함이다..

 

한쪽 손에는 휴지를 준비하라는 자극적(?)인 뒷표지의 말보다는 그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었다는데에 더 큰 유혹이 느껴진다. 어떻게 그렸을까 궁금해진다.  이 내용은 차라리 영화로 만나보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동물을 주제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게 쉽진 않겠지만 그런대로 멋진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거라고 나름대로 기대감이 생겨난다. 평범한 듯 하지만 두어군데 가슴 찡한 울림을 전해주는 장면이 그려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짐수레를 끌며 보통의 농장생활을 하던 말 조이가 어느날 갑자기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고 그런 조이의 눈을 통해 전쟁의 아픔과 고통이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운좋게도 조이 주변사람들은 하나같이 동물애호가들이다. 어쩌면 그리도 말에 대한 사랑이 독특한지... 얻고자하는 바를 위한 하나의 장치겠지만 그런 상황이 조금은 작위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문득 얼마전에 읽었던 <아버지의 길>이 떠오른다. 똑같이 전쟁의 참상을 그리고 있는 탓이리라. 주체가 말이었을 뿐이지 조이 또한 그 남자와 같이 국적을 달리하며 전쟁을 치루니 하는 말이다. 영국인의 말이었다가 독일인의 말이었다가 다시 프랑스인의 말이 되기도 한다. 결국 영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조이의 여정만이 끝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의 길과 달랐을 뿐이다. 영화속의 장면이었다면 그 완충지대에서의 조이가 상당히 멋지게 그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다보니 양쪽으로 쳐진 철조망 사이에 서 있게 된 조이. 그 말을 향해 서로 이쪽으로 오라며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어대던 병사들의 모습. 그러다가 끝내는 조이를 데려가기 위해 양쪽에서 한사람씩 뛰어나와 서로가 서로를 마음으로 보듬어안는 그 장면이 내게는 가장 뭉클했다. 서로 믿기만 한다면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얼마든지 풀 수 있다는 그들의 말이 내게는 커다란 울림을 전해주었다. 동전던지기로 조이의 거취를 정하던 그들처럼 상황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크게 부풀려 문제를 만들어내는 건지도 모르는 일일거라고...

 

완충지대,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 사람과 사람사이의. 어쩌면 조이의 역할이었을지도 모를 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이비생각

<이 글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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