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쓸쓸할까?
내일을 알 수 없으면서 내일을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쓴다.
오늘조차도 내 곁에 머물지 못하는데 ....
눈물이 났다.
징징거리는 사랑타령이 아니었음에도.
일상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나를 잊어가고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그저 잠깐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망증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날 알츠하이머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찾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에키와 에미코..
내가 있어줄께요.. 내가 있잖아요..
나는 사에키, 당신의 이름은?
끝내 잃어버리고 만 아내의 이름은 마지막으로 그가 만들었던
커피잔속에 존재한다.

우리와 함께 했던 시간을 잊지 마세요..
부장님과 함께 했었던 시간을 기억하겠습니다..
건네오는 한장의 사진들.. 그리고 그 아래의 이름들..
그 사진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병이 아니라해도 언젠가는 기억속에서 잊혀질 이름들인데
너무 빨리 잊혀지는 건 어쩌면 두려움일런지도 모르겠다.

잊혀지는 이름이 되기 싫어서
잊혀지는 얼굴이 되기 싫어서
얼마나 바둥거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잊혀져야 할 이름, 잊혀져야 할 얼굴..
그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을...

눈물이 났다. 가슴이 아파서..
끝내 울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에미코의 가슴앓이가 아파서..
무엇으로도 열 수 없었던 내 기억의 서랍장..
울고 있을 나의 지나쳐간 일상들이 서러웠다.
그남자 사에키와 그 여자 에미코.
그냥, 놓아버릴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속에는 무한한 사랑만 가득한 것을
나는.... 모르고 살아가는 거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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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song ..
Rivers of Babylon ..
Sunny ..
Daddy Cool ..

이 노래들은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후배녀석이 언니는 보니엠을 알죠? 하고 물었을 때
당연하지.. 학창시절에 보니엠 노래 들으면서 컸잖니..
그럼 보니엠 공연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래서 따라나섰던 길.
수원 야외음악당을 찾아 들어가면서 설레이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녀의 열창은 이어지고 스스럼없이 무대 아래로 내려와 관객과 호흡하던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저는 노예의 후예랍니다. Amazing Grace 는 그때 노예선의 선장이었던 사람이
너무도 미안한 마음에 신의 용서를 비는 뜻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죠..
숙연해지는 장내 분위기.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 오신 숙녀분들을 위하여 이 노래를 부릅니다 하고 말한 뒤에
Let it be...를 불렀다. 우아~ 미치겠다 정말..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아는만큼 따라 부르며 어설프지만 몸장단도 맞춰보았다.
대부분이 중장년층이었지만 함께 느끼는 그 분위기가 참 좋았다.
모두가 그 시절의 그 때를 생각하며 그 자리에 있었으리라..
후배녀석이 듣고 싶어하던 Happy Song은 끝내 불러주지 않았다.
앵콜을 그토록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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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쉽게 하기 : 풍경 드로잉 -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배운다! 스케치 쉽게 하기 4
김충원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산을 좋아하다보니 멋진 풍경을 많이 접하게 된다. 같은 산을 올라도 갈때마다 다른 표정을 지으며, 갈때마다 다른 언어로 속삭여주는 그 모습을 너무 좋아하는 까닭이다. 시간적인 여유를 많이 만들어내지 못해 여행을 접하는 기회가 많진 않았지만 유적지 답사를 자주 가는 까닭에 괜찮은 느낌을 주는 풍경을 만난적은 많았다. 그때마다 저 멋진 느낌들을 스케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림이라는 게 말처럼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닌지라 지레 겁을 먹고 멀찌감찌 떨어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사진찍기를 택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사진을 잘 찍는다는 건 아니다. 사진이란 것도 배워본 적이 없어 그냥 대충 보기 좋은 모습만 담아내려고 노력할 뿐. 사실 사진을 찍으면서도 내 손으로 스케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연필스케치를 하여 올려놓은 블로그라도 만나는 날이면 아예 거기서 멈춰 홀린듯 바라보기를 몇번...그러던 중 어느날 눈앞에 다가왔던 <스케치 쉽게 하기> 시리즈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어렵다. 풍경 드로잉을 접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한걸음에 멀리까지 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더더욱 한숨만 나온다. 인물 드로잉에서는 동그라미를 얼마나 많이 그렸는지... 풍경 드로잉을 슬쩍 살펴보다가 으악, 하고 말았다. 너무 어려워!

일단은 아들녀석 스케치북을 앞에 놓고 구도감각을 익힌다고 나와 있던 그림들을 열심히 따라그려본다. 역시 어렵다. 스케치의 시작은 구도이고, 구도의 생명은 조화와 균형이란 말이 무색해진다. 그러던 중에 두꺼운 판자나 플라스틱을 잘라내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ㄱ'자 틀에 관한 글을 보면서 당장 만들어 보았다. 음, 그래도 왠지 어색해!  수평과 수직 그리고 깊이라는 세가지 방향이 존재한다는 작업의 형태가 너무 생소하게 다가왔다. 설명해주신 글들을 따라가다보니 첩첩산중이다.

풍경드로잉을 잘하는 세가지 방법을 들자면 우선 주제를 파악해야 하고 두번째는 80%를 보고 20%를 그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첫번째와 마지막은 어느정도 이해를 하겠는데 두번째 주신 말씀은 영 다가오지 않았다. 그림에 문외한이니 어쩌랴...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 그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은 버려라... 그러자면 기초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너무 욕심을 부린채 달려들었던 나를 향해 채찍질을 한다. 우선은 여기 나와 있는 그림들을 하나씩 설명대로 따라해 보기로 했다. 정말 많은 연습이 필요하리라.

꼼꼼하게 읽으며 그림도 비교해가며 책장을 넘긴다. 보면 볼수록 너무 멋지다. 그림자 드로잉,색연필 드로잉,잉킹 드로잉,먹물 드로잉,네거티브 드로잉... 어쩌면 저리도 각자의 특성을 멋지게 표현해 낼 수 있는지 꼭 마술같다. 앞에 있는 대상을 먼저 그려야 한다는 밑그림 드로잉의 노하우를 알려주시는 대목에서는 눈이 동그래졌다. 나무 드로잉과 물가에서의 드로잉에 한참동안을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채색의 기법을 다루어주었지만 사실 거기까지는 욕심이 나지 않는다. 색연필을 이용한 채색부분에서는 조금 관심이 갔지만... 이번 시리즈에서도 역시 풍경드로잉 연습장이 따라왔다. 후루룩 훑어보니 앞쪽 본문에 나와 있던 그림들을 예제로 주었다. 되든 안되든 한번 해 볼 요량이다. 한걸음에 멀리 뛰려는 마음을 버린채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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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1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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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에 기록된 신비의 여인, 미실을 천오백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에 되살린 소설.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요녀로 전락하지 않은 자유로운 혼의 여인과 그런 여인이 가능했던 신라를 그린 작품이라던 <미실>을 나는 읽어보지 못했다. 세간의 말들처럼 그리 다가오지 않았던 느낌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김별아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입을 빌어서 또하나의 여인 <논개>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는 꼭한번 만나보리라 싶었다.

타고난 미색으로 당대 영웅호걸들을 녹여내고 신라왕실의 권력을 장악해 간 <미실>의 일대기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책광고문을 보면 이렇게 써있다. 현대와 같은 성모럴이 확립되기 전의 여성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그런 그녀가 <논개>를 앞세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논개, 모두가 다 아는 듯 누구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여인이라고. 과연 나는 어떤 불빛으로 그녀를 눈부시게 할 것인가? 라고...이 책을 쓰기 위해 참으로 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논개를 다시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진주기생이라고,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든 초개와 같은 여인일 뿐이라고 알고 있기엔 너무도 미안한 감정이 들게 했던 책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공이다. 작가의 손길속에서 논개는 충분히 빛을 발하고 있음이니... 

처음에는 그저 역사의 한줄기속에서 만나지는 하나의 과정쯤이려니 했다. 처음에는 그저 한여인의 이름을 빌어 작은 사랑이야기 하나쯤 만들어냈으려니 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내심 긴장하게 만드는 그 무엇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여자 <논개>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단순히 소설적인 면에서 재창조된 여인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녀, 논개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는 일도 어렵지만, 어쩌면 방대한 자료만큼이나 고착된 관념으로 자리 잡은 역사적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일이 더 어렵다던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편견이나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기에, 내가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줄을 알기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양반나부랭이의 늦둥이 딸로 태어난 아이. 아주 특이한 사주를 갖고 태어난 탓에 아비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낳았으나 결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고.. 그런 아이에게 아비는 이름을 지어준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난 아이.. 개의 달, 개의 날,개의 시에 개띠 조카를 얻었구나! 형수가 개를 낳았네, 개를 낳았어- 별 생각없이 내뱉던 동생의 혼잣말에서 뜻밖의 암시를 얻어 논개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아이..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주논개였다. 그토록 신비로운 사주를 가졌던 논개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노비가 아니었으나 노비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고 종내는 양반이었고 의병장이 되었던 최경회의 작은 마님으로 살다가 죽는 순간에 기적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논개.. 그녀는 결국 기생으로써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그녀를 진주기생 <논개>로서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작가 김별아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논개는 기생논개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며 타고난 천명을 어기지 않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자신을 낮추어 자신을 높일 줄 아는 여인의 기개, 세상의 흐름을 감각으로 읽어내며 결코 그 흐름의 물살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여인의 총명함, 높고 낮음을 평하지 않으니 이 또한 사람을 사람으로써 대접할 줄 아는 인간으로서의 한 여인인 논개를 말하고 보여주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사랑함에 주저하지 않고 사랑을 지킴에 망설임이 없던 논개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게 전해져 왔다. 또한 그 어린 여인을 사랑해 주었던 노익장의 최경회란 사람에게 다시한번 마음을 열게 된다.

책속에서 여지없이 만나게 되는 역사의 한자락속에서 나는 다시한번 가슴 답답함을 느낀다. 아귀같은 군상들이 탁상공론만 일삼는 대목들은 언제 보아도 신물이 난다. 수많은 의병장들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어지는 군상들의 이름은 듣기도 보기도 싫어진다. 이 책속에서 논개는 없다. 다만 그 논개를 만들어내기 위한 배경만이 빼곡하다. 그 배경들이 있기에 논개는 더없이 밝게 빛나고 있는건지도 모를일이다. 반대로 논개만을 앞세웠던 설정이었다면 논개가  저리 빛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개... 아이를 낳았다는 사투리 '놓았다'에서 논자를 따고 사갑술의 개를 따와 논개라는 이름이 되었다지? 그 아비는 또 이렇게 말했었다. 귀한 자식일수록 천한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속에 눈이 온다.  사납게 숨구멍을 틀어막으며 짓쳐 드는 물속에서도 이팝나무 꽃마냥 너즈러지는 그것을 본다. 짧은 생애의 기억이 휙휙 지나간다. 고단하다. 애달프다...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던 소설의 첫장면과 물속으로 뛰어들기 직전의 마지막 장면을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그리도 애절한 심리묘사를 보여주고 있는지 책을 읽는 내 가슴속이 다 아련해져 왔다.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한가지 바램을 가져본다. <논개>가 TV드라마를 통해 다시 태어났으면 하는...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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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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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도대체 이런 글을 쓴 작가가 누구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책날개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작가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천재 작가라고 되어 있었다.  이 시대 최고의 천재작가....  철창 너머 어둠이 보고 있다, 누구를? 누가 누구를 보고 있다는 말일까? 책을 읽으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정말 지독히도 역겨운 표현들과 장면들이 생각났다. 마치도 TV의 잔혹한 단막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장면들을 묘사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도로 끌어낸 건 아닌가 싶었다. 내가 과히 좋아하지 않는 단편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편 하나 하나마다 전해져오는 공포감이나 전율은 참으로 놀라웠다. 인간의 내면적인 것들이 얼만큼을 내려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마음이 어디까지 내려가야 바닥을 칠 수 있는가 실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긴장하게 되는 책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나도 긴장을 하면서 책장을 넘겼음으로...

SEVEN ROOMS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공포는 잔혹스럽기까지 하다. 이유도 모른체 끌려와 사각의 방에 갇혀버린 남매에게는 죽음에 관한 어떤 정의조차도 정립되어져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일곱개의 방이 있고 그 방의 순서대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차라리 담담해지던 남매의 모습.. 공포란 것은 이미 다가와 앞에 서 있을 때보다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을 때가 더 무섭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미 닥친 상황보다는 다가올 상황에 더 힘겨워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심리가 그 안에 녹아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떠한 상황이 된다해도 선택이란 것은 따라다닌다.  이미 선택되어진 것들과 선택되어져야 할 어떤 조건들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가 만약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중간지점에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쉽게 말하면 이승과 저승의 세계에 한쪽씩 발을 들여놓은 채로 두개의 세상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이미 죽어버린 엄마의 세계와 아빠의 세계 사이에 서 있으면서 양쪽의 소통역할을 하게 된 아들..  그 아들을 통해 미약하나마 사랑을 나누었던 엄마와 아빠는 아들을 통한 싸움을 끝으로 소통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 역시 아들의 선택에 의해서.. (어떤 선택이었든 그 선택은 선택하는 자의 입장이 우선적으로 개입하게 되어있다.)  두번째 단편 SO-far 를 통해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했다.

"뭔가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저의 마음은 비명을 지릅니다. 이 몇이고 되풀이되는 고통을 견디며 남은 시간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일까요. 그럴거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마음 없는 인형이고 싶었습니다" - 양지陽地의 시詩 편에 나오는 말이다.  또하나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난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인조인간에게는 눈물과 마음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인간답다. 인간이기를 원했던 하나의 인조인간이 자신을 만들어주었던 인간옆에 묻히고 싶어 또다른 인조인간을 만들어냈다는 설정 자체가 신비롭게 느껴지던 이야기였다. 정말 우리의 속내는 그럴까?  좋아하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이 두려워 차라리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마음없는 인형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가끔씩은 아마도... 그럴수도 있겠지만...

말하는데로 이루어지는 신의 말,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우화가 떠올랐다. 결국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끝나버리고 마는.. 원하는 대로 말만하면 이루어지는 주인공은 딱하다. 좋지 않은 상황하에서만 그 주문을 외워대는 까닭에 자신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니.. 마이다스의 손을 가졌었다던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앞에 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아주 묘하게 비틀어 놓았던 마지막 단편,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 편을 읽으면서 아하, 그럴수도 있겠군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하게 된다. 이미 작가의 의도대로 그의 잔혹한 세계속에 빠져버렸던 것일까?  시체로 집을 지었던 이야기(차가운 숲의 하얀집)나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이상스런 상황(혈액을 찾아라), 과거를 감추기 위한 교묘한 살인의 현장(Closet)등  자의반 타의반으로 끌려다니며 만났던 잔혹스런 현장속에 내가 머물렀던 순간들을 되돌아 보았다. 만약 이 책의 단편들을 화면으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미련두지 않고 TV를 꺼버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공포스럽다기 보다는 그만큼 잔혹스럽고 왠지 역겨운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주 특이한 세계를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든다. 투명한 어둠과의 조우라는 역자후기글처럼 한바탕 진흙탕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랬었군, 작가가 영상 작가로 활동중이었군...그래서 뭔가를 보고 있는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거였군... 참 어렵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잡아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이 책을 읽었다는 것 자체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복잡한 느낌들을 역자후기글을 통해 빌려보자면 이렇다.
예를 들면 오싹해서 피부에서는 소름이 돋는데, 동시에 가슴이 죄어드는 애절함과 함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느낌. 서늘한 불길함 한복판으로 생겨나는 안도. 절망감 속의 평온.직접 읽는 것 외의 방법으로는 느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을 체험한다는 거서은 그 자체가 진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역자후기글에서>

아주 신비로운 책여행이었음은 확실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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