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하늘연못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해지는 줄 모르고 놀다 하늘을 문득 보면 달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있곤 했던 기억, 있지 않을까.

“엄마, 달이 나 따라 오나봐.”

그렇게 중얼거렸을 법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형식부터 일상적인 범주를 탈피하고 싶어한다. 우선 한 페이지에서도 여러 단락으로 나뉘어진 독백체의 이야기나 의도적으로 반복되는 문장들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주목할 점은 소설의 서술자는 상당한 논리력과 통찰력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호오가 까탈스러운 낡은 오토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인물에 대한 철저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일인칭 시점의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이 작가는 이 범상치 않은 오토바이의 입을 빌어 할 말을 다 한다. 문학을 향한 외곬수적 면모(그는 23세 때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한 사람이지만, 후에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절하고 최저생계비로 오직 쓰고 싶은 글쓰기에 전념했다 한다)를 보이는 작가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 소설은 그의 독단적인 면모를 닮았다.


나는 젊고, 동시에 늙었다. 반세기에 걸쳐 살고 죽은 나는, 이제는 일일이 기수의 동의를 얻고 싶어 하는, 그렇게 지향하는 바가 천박한 자동 2륜차가 아니다. 그래, 나는 이지(理智)로 세상을 알 수 있는, 긍지에 찬 오토바이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1966년 마루야마 겐지가 등단할 때의 상황은 전위 문학 뿐 아니라, 전통적 사소설, 프로레타리아 문학 등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 전엔 오에 겐자부로나 가이고 다케시 다카하시 가즈미 등의 신예 작가들이 새로운 문학을 모색했지만 현대적인 언어 감각에 누구보다도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겐지는 미증유의 작가로 추대 받는것 같다. 역자도 그와 하루키를 대비하고 있지만 동시대에 경험한 학원 분쟁에 기인한 하루키의 이국적인 상실감은 모더니즘적 감각에 기댄 지극히 감상적인 상실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여담이지만, 강아지풀로 콧털을 간질이는 듯한 그의 초기 소설을 제외한다 쳐도, ‘해변의 카프카’ 이후 그의 감각이 더 이상 못 미더워졌다.) 

오토바이는 주인공과 그의 소꼽 친구인 여자와 동행하면서도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는 달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여자의 속물스러움에 만족하기도 한다. 이것으로 보아 서술자는 깊이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 즉물성을 대표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에 이지러짐과 차오름을 반복하며 인력으로 해수의 흐름을 관장하는 달이 있다. 오토바이, 즉 작가는 움직이는 자를 갈망한다. 그리고 끝내 원자력 발전소가 돔처럼 솟은 만사 무사태평하기만 한 어촌을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는 별 게 없다. 크게 보이는 것은 여정에서 스치듯 마주치는 다양하고도 추잡한 인간 군상들과 풍경, 갖가지 상황을 크로키하듯 감각적인 문체이다. 하지만 다혈질이며 냉소적인 오토바이의 눈에 비친 기수의 행동을 통한 심리 묘사와, 세상의 온갖 부정한 것과 인간 오욕에의 경멸에 찬 독기 어린 말들은 책읽기에만 얻을 수 있을 기분 좋은 충만감을 준다. 물론 자괴감을 동반하는 쾌감이겠다.


나는 한없이 흐르고 싶다. 그리고, 흐른다는 행위는 결코 엉뚱한 행위가 아니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나는 모든 것을 추월해 버릴 것이다. 큰소리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는 사내 대장부, 싫증도 내지 않고 천계를 운행하는 태양. 변천을 거듭하는 시대의 악의 빛과 정의의 그림자.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빠듯한 수입. 어둠의 바닥에 조용히 서 있는 자기 자신. 전국 순례 여행에 나선. 나이 40정도의 과부. 어디까지나 혼미를 거듭하는 세계 정세와, 거기 수반되는 어수선한 물정. 주머니란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채우고, 풍덩 물에 뛰어드는, 파산한 경영자. 나는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추월해 보이겠다.


특히 오래된 누대나 이륜자동차나 그것을 운행하는 사람들, 사마센을 연주하는 분칠한 인형들은 고압적인 자세를 견지하는데 이는 기득권의 특수를 천년만년 누리려는 정치 보수 집단을 비롯한 사회에 만연한 갖가지 보수성을 연상시킨다. 아무튼 그들은 도시로 간다. 생동하는 삶을 찾아서다. 하지만 도시에서도 오토바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찌는 듯한 더위에 싸인 아비규환의 거리. 여기에서 늘 만좌의 주목을 모으는 것은, 마(魔)의 고층 빌딩이다. 아마도 권력의 몇 분의 일인가를 장악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이 괴물 빌딩은, 발치에서 마치 개미처럼 움직이는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중압을 가한다.

그러나 녀석은 결코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는 일이 없고, 무턱대고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또, 유별나게 반골 정신에 찬 누군가가 녀석을 향해 강력하게 항변하는 일도 없다. 여기에는 사람 수만큼 인연의 실태래가 있다.

그것은 얽히고 설켜, 교우 범위가 무한히 확대되어 가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지만, 기실 그 실이 단단히 맺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이해타산이라는 칼날에 갈기갈기 잘린 그 실은,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는, 기댈 만한 지기도 없는 사람들 곁을 스쳐 가는 바람에 공허하게 만든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한 사람 남김없이 움직이는 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살아 있는 몸과 죽은 몸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그들의 여정은 별 볼일 없는 인생처럼 짧게 끝나지만 삶 또한 그러한 것이 아니던가.

무언가 대단한 어떤 것을 기대하다가도 갑자기 ‘에이, 이게 아닌데.’ 하며 돌아서기도 하는.

소중한 상대가 떠나 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있고, 닳고 닳은 인간 군상에 실망하고 비판하다가도 끝내 거기에 물들고 마는.

모든 생동하려는 그들에게 작가는 속삭인다. '봐라, 달이 당신의 뒤를 쫓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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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제목이 대부분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닌데 화장이 火葬이 아니라 化粧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하기 쉬워진다. 작품의 광고대로 적절한 반전은 식상한 결말을 벗어나려 하며, 대사 또한 재치 있어 나름의 신선함을 준다. 탁구경기를 보듯 톡톡 받아치는 언어들. 하지만 그런 점들만이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이 주 전에 본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 쓴다는 것은 대국적인 뼈대만이 추려진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동시에 세부적인 심리 묘사나 세세한 무대 장치들은 잊었다는 말도 된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인물들의 특징적인 표정 등이 간혹 떠오르는 것도 고마울 뿐이다.

무대를 보며 특이하게 느낀 점은 유리문을 통해 비친 인물(여자)의 동작을 통한 상황 표현과 회상 장면에서의 '여자'가 무대 안으로 순간순간 뛰쳐 나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다는 점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로는 회상 장면이 쉽게 연출되겠지만 연극에서의 제약으로 인해 그런 설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혹은 심리 묘사를 표현한 의도였을까.

노통의 소설은 아직 못 읽어 봤지만, 연극에 생략되었을 수많은 유려한 대사들을 확인하기에 필요한 독서는 즐거울 듯 싶다.


김포 공항도 그렇겠지만 공항은 다음 목적지를 향한 이동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배경이 되는 공항은 서로 간 타인임을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설정인 듯 하다. 이런 공간에서 낯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할 때 우리는 의아심부터 일 것이다.

 ‘저 사람이 내게 무슨 목적으로?’

혼자임이 전제된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타인의 존재는 불안과 함께 오히려 짜증이 나는 법이다. 어쨌든 나리타 공항에서 그들은 그렇게 만난다. 낯선 남자, 즉 ‘적’은 어릴 때부터의 폭행에 관한 일화를 늘어놓기 시작하고 ‘나’는 듣기 싫은 이야기를 강요받는다. 하지만 어릴 때의 사소한 일로 자행되는 살인, 스무 살 무렵의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살인을 이야기하는 ‘적’을 보며 ‘나’는 경악하고 그 곳을 떠나고자 하나 무의식중에 점점 그의 이야기에 매료된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의심하고 반목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가 일방적으로 ‘적’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나’에 대해 엄청 빠삭하게 꿰고 있는 야비한 적의 공략을. 게다가 ‘적’은 상황에 따라 거짓을 교묘하게 둘러댈 수도, 살인을 교사(巧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철저히 ‘나’의 관점이다.


이런 가정을 해 보자. 가령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그나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말을 무의식중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으로라도.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예컨대 우린 현실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치정극을 벌이고 싶진 않은 거다.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은 충분히 선정적이기는 하나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아까로 되돌아가서- 이토록 인간의 선택이란 극히 미약하고도 현실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선택이 불가하다면 내 안의 악마는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한다면 ‘나’는 그녀를 죽이고 함께 죽는 게 나을까, 그녀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게 나을까. 두 가지 상황에서 우린 갈등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적’은 정신적 쾌감을 위해 후자를 원한다. 이것으로 볼때 내 안의 ‘적’은 굉장히 솔직하지만 위험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모범적이고 소심한 ‘나’는 전자를 선택하게 되고 공황 상태에 빠진다. 왜냐하면 ‘적’을 실컷 조롱하던 ‘나’는 자신의 말에서 무언가 커다란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 살인 충동은 ‘적’이 아닌 ‘나’의 머릿 속에서 수십 번 자행되었고 살인 또한 나의 우발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애석하게도 '나‘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스스로의(혹은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위 -가장 무르고 연약한 부위-가 공략되었다는 말일 게다. 폭력의 피해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약한 아킬레스건을 가해자에게 들켰는지 모른다. '나'도 언어로 끊임없이 '적'의 치근거림을 당하며 이 점은 폭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피해자인 ‘그녀’ 또한 순진하게 ‘적’을 따라가다 두 번이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어쨌든 무방비상태로 자신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적'으로 인해 '나'는 당황해하며 우왕좌왕한다. 이 점은 '여자'도 마찬가지다. 친구로 오인하고 초대한 남자가 예전 자신을 능욕했던 사람이란 걸 안 순간 여자는 몸서리치게 되지만 두려움에 살인할 용기까진 없다.

이 작품은 폭력성을 통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혹은 현실)을 꿈꾸게 해준다. 인간의 상상(혹은 현실)에서 폭력은 달콤하고, 음울하며 자극적이지만 지극히 사적이며 주관적으로 평가되는지도 모른다.

신문의 사건・ 사고란을 펼쳐 보더라도 본래보다 더 미화되거나 추하게 평가되는 것은 세상의 잣대이고 독자들에겐 결국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한번 찌르면 세상이 열 번 찔러 시체를 토막내 매장해 버리는 식이다. 혹은 자신이 죽이고도 골백번을 죽었는데 사람들은 아예 상대조차 해 주지 않는다.

“당신은 허공을 향해 말을 하고 있군요.” 그런 일을 애초에 없었다는. 뭐 그런 식이다.

“뭐가 이래?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 피해자인 ‘나’는 이렇게 말하며 결국 공항에 남겨진다.


인간은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동시에 그대로의 ‘적’을 드러내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지독히 두꺼운 위장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교묘한 언어든, 기억 상실이든, 시간의 경과든 간에.

‘적’은 ‘나’의 죄책감을 되살리기 위해 살인 이야기를 했음에 틀림 없고 결국 나와 함께 죽게 된다. 악마적 본성은 자아를 잃을 때만 함께 죽는다는 파국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주위에 널린 '공항'에서 마주치게 될 ‘적’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하긴 분명 승산 없는 싸움이겠지만 말이다. 싸늘한 시신이 된 나는 사람들 사이에 별 주목을 받지도 못한 채 잊혀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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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

얼마간의 기대를 하고 본 영화였기에 아쉬움과 반가움이 반반이었다. 소설다운 격한 반전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듯 천천히 일상을 이동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 작품이 영화가 아닌 소설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싶었다. 그리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들여다보며 다소 불쾌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나의 삶이고 주위 어느 누군가의 삶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것들이 새삼 적나라하게 나열되고 이야기된다는 것에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여자가 되는 이유.

를 떠올렸다. 감독이 말하기를 제목에 붙은 여자, 라는 수식어는 딱히 이유가 없었다지만. 지루하다시피 나열되는 주인공의 행동을 보자니 어떤 경험을 떠올렸다.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면 주위가 반대 방향으로 되었던 기억을 말이다. 달팽이관 같은 전정기관이 우리 몸의 위치 감각이나 평형감각을 담당한다면, 정혜라는 주인공은 어떤 경로로 인해 그게 손상되었을지 모르겠다고. 그리하여 비틀비틀 세상과 소통하려 하지만 그녀에게 진심으로 손 내밀려는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같이 일하는 우체국 직원들의 관심사는 남편 몰래 피는 담배나 소소한 맥주 안주거리 같은 삶이고, 또한 그에 안주하려는 삶이다. 그래서 옛 연인이나 친척이나 동료들에게 혹은 구둣가게 점원에게 그녀는 ‘이상한 사람’이 돼버린다. 아마 그게 제목에 여자가 들어가는 당위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캐릭터에 여성성을 부여하는 것뿐 아니라 지병처럼 늘상 마음 한 언저리가 아픈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진부한 상징이지만.

칼은 본래의 효용도 있지만 상해의 용도로도 쓰인다. 상처에 쉽게 노출되는 인간은 동류의 인간을 쉽게 알아본다. 그것은 정혜가 술집에서 데려온 남자를 위로하는 장면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남자가 과도를 바로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듯 그녀 역시 칼날에 쉽게 베이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일상적이었다가 역시 일상으로 환원된다. 중간 중간 삽입되는 회상 장면은 심리의 원인을 캐내려기보다는 슬쩍 보여주는데 그친다. 아마 그것은 주인공에게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의식 깊숙이 있는 떼내지 못하는 또 하나의 그녀이며, 그런 점에서 긍정을 암시하는 듯 보이는 결말도 옛폭행의 앙금을 쉽게 상쇄하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아마 주인공이 어느 날 사과칼을 들고 다시 삼촌을 찾아가더라도 지금 그녀는 남자를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하고, 홈쇼핑에서 김치를 배달해 먹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비록 사회의 편견에 적극적으로 맞서지도 못하며, 강한 메시지도 불쑥 내밀지 않지만 삶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여자, 정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참 착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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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과학도에게 그날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상대성 이론을 일반인에게 어떻게 설명하실래요?”

그랬더니 그는 쌍둥이 이론을 펼쳐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 설명이 뭔가 추상적이면서도 장황히 느껴졌는데, 이유는 본인이 지극히 평범한, 과학의 문외한이었음에 다름 아니겠다.

그런 나 역시 영화를 보기 전에도 ‘나비 효과’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도 개념 정도는 이해했지만, 그건 어쩌면 ‘카오스 이론’이나 ‘상대성 이론’을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일지 모른다.

요컨대 '나비 효과'의 기본 플롯은 가정과 선택의 문제이다. 이러한 점은 ‘슬라이딩 도어즈’를 연상시키지만 그닥 해피엔딩을 애써 추구하려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며, 회상을 통한 기록으로 실마리를 찾아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메멘토’를 떠올리게도 한다. 스스로에겐 그만큼 머리를 쓰게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고마운(?) 영화였으며, 다큐멘터리가 아닐 바에야 영상물의 기본 자질이 재미라면 상당히 흥미롭게 본 작품이기도 했다.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러한 의문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가령, 정신병자가 아닌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면? 어린 시절의 추한 기억들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현재가 아닌 그녀와 한번이라도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이런 의문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엄청난 파급으로 다가온다. 행복한 대학생이 또다른 인생의 방해꾼을 만나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포르노를 찍는 나쁜 어른에게 일침을 가할 수는 있어도 이미 연인은 죽게 돼버리는 식이니까 말이다. 혹 연인을 구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희생자가 되어 불구의 삶을 산다거나 친구에게 여자를 빼앗겨버리는 식이다. 이 얼마나 부조리한 현실인가. 완전한 해피엔딩은 고전 소설이나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허무하다.

인생의 정점에서 돌아볼 때 과연 얼마나 행복을 자각할 수 있을까. 아마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허나 미각을 느끼는 인간의 미뢰가 짠맛만 희미하게 감지하는 노년에도 인생의 굴곡을 바꾸려 몸부림 친 젊은 날을 과연 거시적으로 성찰하게 될까, 하는 부분에선 회의적이다.

아니, 오히려 작은 단맛들을 무미하게 지나치게 되고 말지는 않을까.

그러나 나는 주인공처럼 허겁지겁 현재를 일기장에 기록하지는 않겠다.쓰레기와 같은 현재 때문에 미래를 바꾸려 안간힘 쓰다가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정신 병자가 되어 방치될지 모를 일이다.

쓰레기는 본인이 손수 치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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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대로 쥴이라는 독일인 남자와 짐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의 이야기다. 영화를 느끼기 전에 먼저 프랑스어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구사되는 언어란 걸 통감했다. - 덕분에 자막을 따라 가지 못해 되감기를 몇 번을 해야 했다. - 통념적으로 프랑스 영화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있긴 하지만, 영화는 형이상학적이거나 그닥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제 삼자의 나레이션 때문일까. 어떠냐하면 밥 먹고 물 마시듯 자연스레 술술 이야기하는 식이다. 오히려 좀 통속적인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 사랑을 영화는 다루고 있다. 덧붙이자면 오래된 흑백영화이며 누벨바그를 표상한 영화라 한다. 누벨바그는 자유롭게, 혹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카메라와 거친 편집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프랑스의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평론가로 활약하던 장 뤽 고다르, 프랑스아 트뤼포 등이 대표적인 감독이다. 여기서 내가 흑백이란 것을 굳이 명시하는 이유는 화면색이 주는 명징한 간결함, 혹은 맹목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스크린이 흑과 백으로밖에 표현되지 못했듯 주인공의 - 특히 여자주인공의 삶을 대하는 맹목성, 혹은 사랑이라는 정의 내리기 불명확한 명제를 보는 맹목성이다.

극단적인 열정을 경계하면서도 은밀히 동경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캐릭터에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또한 그 만큼 공감하리라 본다.

어쨌든 칼라로 편집되었다면 이러한 생각의 공백 없이 오히려 밝고 경쾌하게 느껴졌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은 주인공 둘의 죽음으로 끝나긴 하지만.

일차세계대전이 발발할 시기를 배경으로 친구 쥴과 짐은 조각상을 닮은 여인 까트린을 사랑하게 되고 까트린은 쥴과 결혼해 아이를 낳지만, 정체되고 고인 것을 싫어하는 까트린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끊임없이 찾는다. 둘 사이에 나타난 짐은 그녀와 사랑을 약속하지만 질투와 함께 동반되는 증오로 서로는 믿음을 잃게 된다. 지겨울 정도의 질시와 애증을 반복하는 둘 사이를 나약하게 바라보는 쥴, 셋은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지만 쥴은 짐과 까트린을 실은 차가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게 된다.

자막이 다 올라간 뒤에도 멍해 있었다. 도대체 감독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가 답답했다. 앞서 내용이 어렵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리 만만하게 볼 영화도 아니었다.




(자유로운) 사랑은 존재하는가


여주인공인 까트린은 사회나 개인에게 가해지는 구속과 억압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여자다. 셋이서 자유연애에 관한 연극을 보고 쥴이 소위 결혼한 여자의 정숙함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 '볼테르는 말했지. 여자는 자연스러워서 지겹다고. 젊은 여자는 괴물, 예술의 살인자, 작은 요부, 멍청함과 타락함의 결정체'란 말을 하자 반발하듯 보여지는 까트린의 행동이 이를 증명한다. 그녀는 두 남자의 구태의연함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강물에 뛰어드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녀의 결혼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쥴과 결혼했어도 그는 그녀를 진정 소유하지 못하며, 까트린 역시 다른 남자와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맨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행동은 오히려 당연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산 우리 관점에서 볼 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역시 인정해야 한다.

한편 그녀가 삶에서 사랑의 부재를 못견뎌 하는 참을성 없는 광인이라 쳐도, 우리 자신을 관조해 본다면 무의식적이든 자의든 머릿속에 차고 들어앉은 관념이 한둘 있을 것이고, 그 중 하나가 사랑임을 말하는 데 감히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순환과 그 가벼움


영화 중간쯤 까트린이 노래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소용돌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카메라로 세 주인공을 번갈아가며 빙글빙글 잡아준다. 또한 그 노래말에서 나타난 삶은 - 혹은 인간이 산다는 것은 - 가볍게 얼크러져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녀는 반지를 끼지 않은 손이 없었네. 팔찌도 몇 갠지 셀 수가 없어. 그래도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난 마법에 걸린 듯 했어. 그녀의 눈동자는 오팔. 날 매혹했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타원형. 운명적인 여자. 우린 키스로 만났어. 그리곤 모든 게 엉망이 됐지. 행복하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지. 각자 서로의 길을 간 거야.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난 또다시 그녀를 만났어.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어. 난 한참을 보고야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어. 그녀의 신비한 미소를 보고서야. 예전보다 더 많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어. 난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셨어. 알콜이 들어가자 긴장감이 사라지더군. 난 너무 많이 마셨어. 난 그녀의 손길에 잠을 깨었어. 우린 키스로 만났어.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그래도 우린 다시 시작했어. 난 다시 한 번 그녀를 보았어. 역시 그녀의 미소는 빛이 났어. 당신이 키스할 때도 왜 난 당신이 그리운가. 당신이 돌아오면 왜 싸늘해지는가. 우린 함께 우리의 길을 간다네. 인생이란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돌고 돌아. 만났다 헤어지고. 만났다 헤어진다네.'


세 명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궤도에 따라 순환한다. 엇갈리지만 이는 조율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쥴은 까트린을 놓지도 잡지도 못하며, 짐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이고 평이한 연인을 택한다. 까트린, 그녀는 가눌 수 없는 열정을 안고 그 대가로 짐과의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의 방식대로라면 삶은 창조할 가치 있는 그 무엇이며, 사랑 또한 쉬임 없이 돌아야 마땅한 것이겠다. 마치 영화 곳곳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배경으로 시원스레 굴려 가는 은륜처럼.

펄떡대는 순수한 광기들의 죽음. 낡고 퇴색해지는 삶의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음은 아집일까. 비록 삶이 그렇다는 걸 묵인하면서 말이다.

다시 보는 이 영화, 그래서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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