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하늘연못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해지는 줄 모르고 놀다 하늘을 문득 보면 달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있곤 했던 기억, 있지 않을까.

“엄마, 달이 나 따라 오나봐.”

그렇게 중얼거렸을 법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형식부터 일상적인 범주를 탈피하고 싶어한다. 우선 한 페이지에서도 여러 단락으로 나뉘어진 독백체의 이야기나 의도적으로 반복되는 문장들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주목할 점은 소설의 서술자는 상당한 논리력과 통찰력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호오가 까탈스러운 낡은 오토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인물에 대한 철저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일인칭 시점의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이 작가는 이 범상치 않은 오토바이의 입을 빌어 할 말을 다 한다. 문학을 향한 외곬수적 면모(그는 23세 때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한 사람이지만, 후에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절하고 최저생계비로 오직 쓰고 싶은 글쓰기에 전념했다 한다)를 보이는 작가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 소설은 그의 독단적인 면모를 닮았다.


나는 젊고, 동시에 늙었다. 반세기에 걸쳐 살고 죽은 나는, 이제는 일일이 기수의 동의를 얻고 싶어 하는, 그렇게 지향하는 바가 천박한 자동 2륜차가 아니다. 그래, 나는 이지(理智)로 세상을 알 수 있는, 긍지에 찬 오토바이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1966년 마루야마 겐지가 등단할 때의 상황은 전위 문학 뿐 아니라, 전통적 사소설, 프로레타리아 문학 등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 전엔 오에 겐자부로나 가이고 다케시 다카하시 가즈미 등의 신예 작가들이 새로운 문학을 모색했지만 현대적인 언어 감각에 누구보다도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겐지는 미증유의 작가로 추대 받는것 같다. 역자도 그와 하루키를 대비하고 있지만 동시대에 경험한 학원 분쟁에 기인한 하루키의 이국적인 상실감은 모더니즘적 감각에 기댄 지극히 감상적인 상실에 불과하지 않나 싶다. (여담이지만, 강아지풀로 콧털을 간질이는 듯한 그의 초기 소설을 제외한다 쳐도, ‘해변의 카프카’ 이후 그의 감각이 더 이상 못 미더워졌다.) 

오토바이는 주인공과 그의 소꼽 친구인 여자와 동행하면서도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는 달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여자의 속물스러움에 만족하기도 한다. 이것으로 보아 서술자는 깊이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 즉물성을 대표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에 이지러짐과 차오름을 반복하며 인력으로 해수의 흐름을 관장하는 달이 있다. 오토바이, 즉 작가는 움직이는 자를 갈망한다. 그리고 끝내 원자력 발전소가 돔처럼 솟은 만사 무사태평하기만 한 어촌을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는 별 게 없다. 크게 보이는 것은 여정에서 스치듯 마주치는 다양하고도 추잡한 인간 군상들과 풍경, 갖가지 상황을 크로키하듯 감각적인 문체이다. 하지만 다혈질이며 냉소적인 오토바이의 눈에 비친 기수의 행동을 통한 심리 묘사와, 세상의 온갖 부정한 것과 인간 오욕에의 경멸에 찬 독기 어린 말들은 책읽기에만 얻을 수 있을 기분 좋은 충만감을 준다. 물론 자괴감을 동반하는 쾌감이겠다.


나는 한없이 흐르고 싶다. 그리고, 흐른다는 행위는 결코 엉뚱한 행위가 아니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나는 모든 것을 추월해 버릴 것이다. 큰소리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는 사내 대장부, 싫증도 내지 않고 천계를 운행하는 태양. 변천을 거듭하는 시대의 악의 빛과 정의의 그림자.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빠듯한 수입. 어둠의 바닥에 조용히 서 있는 자기 자신. 전국 순례 여행에 나선. 나이 40정도의 과부. 어디까지나 혼미를 거듭하는 세계 정세와, 거기 수반되는 어수선한 물정. 주머니란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채우고, 풍덩 물에 뛰어드는, 파산한 경영자. 나는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추월해 보이겠다.


특히 오래된 누대나 이륜자동차나 그것을 운행하는 사람들, 사마센을 연주하는 분칠한 인형들은 고압적인 자세를 견지하는데 이는 기득권의 특수를 천년만년 누리려는 정치 보수 집단을 비롯한 사회에 만연한 갖가지 보수성을 연상시킨다. 아무튼 그들은 도시로 간다. 생동하는 삶을 찾아서다. 하지만 도시에서도 오토바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찌는 듯한 더위에 싸인 아비규환의 거리. 여기에서 늘 만좌의 주목을 모으는 것은, 마(魔)의 고층 빌딩이다. 아마도 권력의 몇 분의 일인가를 장악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이 괴물 빌딩은, 발치에서 마치 개미처럼 움직이는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중압을 가한다.

그러나 녀석은 결코 감정을 겉으로 나타내는 일이 없고, 무턱대고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또, 유별나게 반골 정신에 찬 누군가가 녀석을 향해 강력하게 항변하는 일도 없다. 여기에는 사람 수만큼 인연의 실태래가 있다.

그것은 얽히고 설켜, 교우 범위가 무한히 확대되어 가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지만, 기실 그 실이 단단히 맺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이해타산이라는 칼날에 갈기갈기 잘린 그 실은,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하는, 기댈 만한 지기도 없는 사람들 곁을 스쳐 가는 바람에 공허하게 만든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한 사람 남김없이 움직이는 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살아 있는 몸과 죽은 몸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그들의 여정은 별 볼일 없는 인생처럼 짧게 끝나지만 삶 또한 그러한 것이 아니던가.

무언가 대단한 어떤 것을 기대하다가도 갑자기 ‘에이, 이게 아닌데.’ 하며 돌아서기도 하는.

소중한 상대가 떠나 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있고, 닳고 닳은 인간 군상에 실망하고 비판하다가도 끝내 거기에 물들고 마는.

모든 생동하려는 그들에게 작가는 속삭인다. '봐라, 달이 당신의 뒤를 쫓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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