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국사 - 수정증보판
존 킹 페어뱅크.멀 골드만 지음, 김형종.신성곤 옮김 / 까치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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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가 읽은 것은 수정증보판 이전의 판이라는 것을 밝힌다)

전 세계 1/4이라는 엄청난 비율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우리 나라와 예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친숙한 국가, 과거 역사에서 우리 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강대국이었던 나라, 이제는 지구상의 몇 안되는 공산국가, 지금은 우리 나라보다 경제 수준이 떨어지지만 무한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 등이 내가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다.

그러면  오랜 역사적 시간동안 세계 수준으로 비교해 보아도 초강대국이었던 중국의 어제는 어떠했으며, 왜 그 자리를 잃고 현재의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는지, 어떤 특성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며 현재는 어떤 과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이 책은 중국사에 접근하고 있다.

광대한 영토ㅡ하지만 주변 세계와 고립된ㅡ를 지니고 많은 인구를 부양해야 하며, 범람하는 황하나 양자강 등의 물을 다스려야 하는 것을 과제로 했었던 이 나라의 지도자들, 그러한 제반 상황과 조건들로 인해 강력해질 수 밖에 없었던 황제의 권력, 그를 보필하고 간언하는 층인 유교 지식인들인 신사층, 몇 천년 동안 중국의 기반 사상이었던 유교 문화 등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저자는 중국의 기층 의식을 통찰하고 그것을 역사적 특성에 적용한다. 놀라운 것은 (중국사에 문외한인 내가 봤을 때는) 이러한 특성을 중국의 가까운 과거와 오늘인,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시대에도 적용하여 분석한다는 것이었다.

과거 왕조시대의 역사는 역사적인 시간의 길이에 비해 비교적 간략하게 특성 중심으로 다루어졌고, 청말 근대화의 시기부터 신해혁명,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시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다뤘는데, 중화민국 시기를 다룰 때는 왜 국민당이 실패하고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나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그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이 느껴졌다고 하면 오버이려나;).

읽는 내내 느낀 것은 저자 페어뱅크는 역시 학자이구나, 라는 생각이었다(당연하지!-ㅁ-;). 학자의 태도로 주제에 꼼꼼하고 일관성있게 접근하여 이 책에는 전체적 통일성이 완벽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중국의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겸허하면서도 애정어린 충고를 내리는 부분이 매우 맘에 들었다.

[중국이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역사적인 대세라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자유선거, 대의제 정부, 법률에 의해서 보장되는 인권을 갖춘 서양적인 형태의 민주주의로 중국을 이끌 것이라는 결론으로 비약시켜서는 안 된다.

...(중략)...

또한 우리 같은 국외자들이 인권의 절박한 필요성에 대해서 중국에 충고를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이 안고 있는 대중매체의 폭력이라든가 마약문제나 총기남용과 같은 문제들을 적절하게 통제하여 모범을 보일 수 있을 때까지는 중국이 좀 더 우리를 닮아야 한다고 강요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중국 사회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들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문제를 깊이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p.543]

중국사의 명저라고 일컬어지는 이 책에 대해 딴지 몇 가지만 걸고 끝내도록 하자.

첫번째. 초기 왕조시대를 다룰 때 나오는 지도에서 계속 거슬렸던 부분인데 한반도까지 중국의 영역에 포함시켜서 나타내어져 있는 것.

두번째. 중국의 기층 의식인 유교에 대해서 분석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동양 철학을 서양인의 분석적인 관점으로 보면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쓴 웃음이 나왔다. 유학에 대한 깊은 이해라기보다 서양적 과학적 관점으로 유학 및 불교 등에 접근하여 분석한 내용들은 상당히 낯설고 조금은 충격적이면서 이질감이 들었다고 할까.

세번째. 계속 거슬렸던, 영어 번역체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문장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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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인터넷에서 페미니스트들에게 질문하는 법

인터넷에서 페미니스트들에게 질문하는 법

권김현영 / 언니네 운영위원/한국성폭력상담소 정보사업부
sidestory101@empal.com

여성주의 사이트인 <언니네>는 ‘여성주의 지식놀이터’라는 게 있다. 올 8월에 개장하여 벌써 2500여 개의 질문과 고민들을 나누고 있는데, 최근 이 지식놀이터에 몇몇 남성들이 올린 질문들 때문에 회원들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일이 있었다. 질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단 질문하는 방식을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그 방식에서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 정말 대답을 듣고 싶다면, 이 정도는 지켜주었으면 한다.

첫째, 일단 질문자가 왜 궁금해하는지에 대해 맥락적으로 설명하라. 레포트 때문인지 아니면 시비를 걸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저 호기심인지 등 질문자의 의도와 맥락이 파악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입장에 대해 대답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당신 이번 헌법소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라고 묻는다면, 어디 신문사에서 나왔는지 본인의 입장은 무엇인지 먼저 들어본 다음에 대답하게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왜 그걸 묻는지 설명하는 것은 질문하는 사람의 기본 예의이다.

둘째, 페미니스트들은 단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편견을 버려라. “페미니스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페미니즘은 단일하지 않다”“나는 나만을 대표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네티즌 중 일부 남성들은 자신이 모든 남성 혹은 일반 평균 남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남성이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곧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기호로 사용되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이 페미니스트 대표가 되어 대답하는데 부담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셋째, “다른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남성임에도 다른 여성을 대변해서 말하지 말라. 여성들 간의 차이는 남성과의 연관 속에서만 의미화된다. 예를 들어 가족 안에서의 어머니, 아내, 딸과 같이 혹은 남성섹슈얼리티에서 ‘성모’와 ‘창녀’처럼 말이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속적 연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과정이다.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순간 남성들은 다른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하는데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 정도를 지켜주면서 묻는다면, 이전보다는 훨씬 정중하고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리플을 다는 몇몇 참을성 없는 네티즌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어찌됐건 간에 원고료를 주거나 강의료를 받지도 않는데 일일이 그 질문들에 대답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대중을 상대하는 운동이므로 자신 역시 설득해보라고 말하고는 하는데... 알겠다. 알겠는데, 당신을 설득하는 것보다 다른 남성들이 저지른 각종 나쁜 짓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바쁘고 힘들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 출처 : 진보네트워크센터 - 네트워커(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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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의 코트 - 사라진 시베리아 왕국을 찾아서
안나 레이드 지음, 윤철희 옮김 / 미다스북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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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샤먼의 코트》라는 신비로운 제목의 이 책은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면 안 될 책이다. 《샤먼의 코트》에는 '샤먼'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러시아 짜르 체제 하와 소비에트 연방 시대를 겪으면서 시베리아에 존재하는 민족들이 겪어온 수난과 탄압, 민족적 정체성과 그들의 현재에 대한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지리 시간에 툰드라가 펼쳐져 있는 한랭 지대라고 배웠고, 러시아의 사상범들이 유배된 황량한 인상만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시베리아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런 우리의 통념에 무색하게도 다양한 전통과 문화를 갖고 있는 민족들이 시베리아에 존재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과 가장 먼저 접하게 되었던 타타르족,  러시아 제국에 최초로 통치받고 탄압당해 전통 문화의 명맥이 거의 끊어진 한티족, 몽골족의 한 뿌리인 부랴트 족, 혹독한 불교 탄압을 당한 투바족, 소비에트의 잔재가 남아있는 사하족, 사할린의 아이누족과 니브히족 등등...

원주민들의 땅과 알래스카를 개척(?)했던 미국의 발전을 모방하려는 러시아의 정책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천연 자원의 이점 때문에 이들은 물질적, 문화적, 종교적 탄압을 당하게 된다.  저자는 '현재 시베리아 민족들의 샤머니즘의 상태가 러시아 통치 하에 있는 시베리아 민족들의 정체성의 척도'라는 가정 하에 광활한 시베리아의 도시들을 탐사하지만, 그들의 샤머니즘은 거의 파괴되었거나 '민족 문화 연구'라는 명맥하에 겨우 유지되고 있을 뿐, 생생한 샤머니즘의 현장을 찾는 일은 가물에 콩나듯한 일이었다. 

러시아인과 피가 섞이고, 문화가 섞이면서 정체성을 점점 잃어가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뿌리를 알고 있는 그들의 현재의 모습은 매우 안타까웠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 중 하나는 한티족의 언어를 복원시키려는 올가 교수의 이야기이다. 한티어는 동사가 매우 풍부하지만(전체의 80%가 동사) 추상명사는 드물다고 한다. 예를 들면 '통나무 위에 앉다', '그루터기 위에 앉다', '흙 위에 앉다'를 뜻하는 동사가 모두 각기 따로따로 있다고 한다. 하지만 '풍부'라는 추상명사를 지칭하는 단어는 따로 없어, '산딸기가 많다'라는 식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하지만 한티어를 쓰면 무시당하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오늘의 한티족은 러시아어만 알고 있으며, 한티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70~80대의 나이든 사람들의 일부일 뿐이라고 하니, 올가 교수의 노력이 가상하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에 서글펐다. 저자가 어떤 한티족 노인과 나눈 다음의 대화는 그 서글픔을 더욱 배가시킨다.

["지금도 한티어 할 수 있어요?"

"내가 우리 말을 못할 이유가 뭐야? 그건 우리 모국어인데 말야! 당신도 영어를 말하잖아! 우리 말로 말을 주고 받을 상대가 없어서 그렇지, 못 할 이유는 없어!"   본문 p.111.]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역사는 한(恨)의 역사이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탄압을 받았지만, 우리의 언어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새삼 감사함을 느낄 정도였다(우리 민족도 많은 문화적 전통의 명맥이 끊기기는 했지만). 소비에트에 의해 투바의 라마 사찰이 파괴되고 불교가 탄압당하던 1930년대를 저자에게 증언한 한 투바족 노파의 이야기에서 뿌리깊은 그녀의 한을 느낄 수 있었다.

[불상이 있던 자리에 누군가가 제물을 바칠 탁자를 설치해 놓았다. 이빨 빠진 접시에는 동전과 안전핀, 물에 젖은 담배가 담겨 있었다. 뎀빅은 노간주나무 가지를 갖고 왔다. 그녀가 바람을 피해 가지에 불을 붙일 수 있도록 나는 코트를 벌려 주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향해 달착지근한 연기를 가볍게 흔들어댄 후 탁자로 몸을 돌려 절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친 그녀의 얼굴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봐요, 젊은 처자, 사람들이 정말 이런 이야기를 읽고 싶어할까?"

"그럼요."

"그렇다면 정말 좋네, 젊은 처자."       본문 p.185-186.]

러시아와의 역사적 관계, 수난과 탄압의 역사, 원주민들의 현재의 모습을 취재한 이 책은, 내가 모르는 시베리아의 어제와 오늘에 관해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야만 할 것이지만, 나는 읽는 내내 예상보다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역사와 상황에 대해 가슴으로 소통할 수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취재하는 시베리아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들에 대한 애정을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나 다를까,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영국 친구들에게 내 책에 대한 얘기를 하면, 그들은 러시아의 황량한 동부를 탐험하려 든다면서 나의 대담무쌍함에 깜짝 놀라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우쭐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대부분의 시베리아 도시를 방문하면서 얻은 짜릿함은 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에 런던의 쇼핑몰에 들어설 때 느꼈던 흥분만큼 크진 않았다. 아마도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솔직한 태도라고 칭찬해 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거대한 시베리아의 수난과 한의 역사를 직접 발로 취재한 저자의 입에서 그것을 '런던의 쇼핑몰'과 비교하는 따위의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를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저자는 센세이셔널한 기대를 가지고 시베리아를 취재한 것인가? 역시나 영국인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잘 드러내 주는 대목이 아닐까? 그녀는 오리엔탈리즘적인 기대에 젖어 시베리아를 취재했지만, 그들은 (각 민족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는 문명의 스침에 동화되어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저자는 '실망한'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별점을 세 개밖에 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만난 원주민중 하나인, 에벤족의 후예인 대학원생 나타샤(러시아의 이름이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올리며 글을 맺는다.

" '나는 소련 사람이예요'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편했어요. 하지만 내 입으로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건 나한테 어울리는 카테고리가 아니죠. 그런데 내가 러시아인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러시아의 국민이 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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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지음, 함유선 옮김, 루이 조스 그림 / 밝은세상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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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보들레르의《악의 꽃》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두 작품이 현대를 열었다.' 라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거의 교과서의 공식처럼 내 머릿 속에 박혀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 작품 모두 읽어보지 못했다. 《보바리 부인》은 3분의 1가량 읽다가 다른 책이랑 바람을 피우게 되는 바람에 중도하차 했었고(조만간 다시 읽어볼 계획이다), 《악의 꽃》은 딱히 거부감이 들었다기보다는 원래 외국 시를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다른 출판사에서 편찬된 책이 한 권 집에 굴러다니는 데도 펼쳐 보지도 않았다.

여기서 잠시 딴 길로 새자면, 내가 외국 시를 읽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이상 번역본을 읽을 수 밖에 없는데, 타 문학 장르도 그러하지만 특히 시는 운율, 심상,  이미지 등 단어 하나하나와 그것들의 배치가 많은 함축성을 지니고 있는 장르이므로 번역이라는 것 자체가 어쩔 수 없지만 시를 훼손시킨다는 느낌 때문이다. 나는 외국 시의 번역본을 읽으면 우리 나라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만큼의 감흥이 와 닿지 않는다. 학창시절, 푸슈킨, 워즈워스, 랭보의 시가 각각의 다른 번역에 따라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 것을 경험한 이후로는 외국 시에는 손도 대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집에 굴러다니던 보들레르의 《악의 꽃》(다른 출판사에서 편찬된 것)을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내가 왜 새삼 이 시집을 읽게 되었느냐 하면, 시집의 디자인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하하.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이 책은 “이리 와서 나를 가져요, 호호호~”하고 나를 유혹하고 있었고 나는 그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_-;

사실, 책에 삽화가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 속에서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과 감동이 삽화가의 손을 거친 결과물을 봄으로 인한 선입견으로 좁아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삽화는 크게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분위기와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디자인면으로 본다면 오히려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

그럼 처음으로 접한 보들레르의 시에 대한 감상은 어떠했느냐. 사실주의니 뭐니 하는 것은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므로 일단은 빼놓고. 전체적으로 퇴폐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열정과 환희가 엿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몇 개만 이야기하면, 〈시체〉,〈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적〉,〈올빼미〉,〈고통의 연금술〉등등등. 다시 읽으면 와닿는 작품의 목록이 다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 개인적으로, 외국 시인의 시집을 번역하여 내놓을 때는 원문도 함께 옆에 수록해 놓는 것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그렇다고 뭐 원문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내 젊음 한갓 캄캄한 뇌우였을 뿐,

여기저기 눈부신 햇살이 뚫고 비쳤네.

천둥과 비가 그리도 휘몰아쳐

내 정원에는 빨간 열매 몇 남지 않았네.

 

나 지금 사상의 가을에 닿았네.

홍수가 지나가면서 땅에

묘혈처럼 커다란 구멍을 파놓았으니,

삽과 갈퀴 들고 다시 긁어모으리.

 

누가 알리,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이

갯벌처럼 씻긴 이 흙 속에서

신비한 생명의 양식 찾을지?

 

오 고통이여, 고통이여! 시간은 생명을 좀먹고,

이 보이지 않는 원수는 우리 심장을 갉아먹어

우리가 흘린 피로 자라고 강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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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뭉크 다빈치 art 1
에드바르드 뭉크 지음, 이충순 옮김 / 다빈치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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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프리즈'를 구현하기 위해 애썼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 한 때 그의 작품에 나는 열렬하게 빠져있었다. 내 일생 간절한 소원 중 하나는, 노르웨이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서 그가 그린 그림을 직접 내 눈으로, 아니 시각이라는 감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와 그 작품들과의 존재연관을 맺으며 영혼으로 가슴깊이 받아들이며 체험하게 되는 그러한 경험을 해 보는 것이다.

삶의 열정, 사랑, 성(性), 죽음 등 인간 본질적 삶을 다루겠다며(그 유명한 〈생 클루 선언〉에서 알 수 있듯이...) 결연히 선언하고 그것을 구현한 뭉크. 서양미술관련 교양서적들을 주로 다루는 출판사 '다빈치'에서 출간된 《뭉크뭉크》는 이 대작가의 일기, 편지, 단편 소설, 우화집, 미술작품들이 실려있어 뭉크의 팬이라면 정말로 입맛다시게 되는 책이다.

하지만 구성은 칭찬해줄 만해도, 내용에서는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다. 왜 그가 한창 '생의 프리즈'의 모티브로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던 시기가 아니라 빠리 3년 체류기간 시절의 미공개 일기를 실어놓았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개 일기가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출판되었던 것도 아니고...-_- 아무튼, 이 대작가의 작품을 느끼기에는 미흡한 소위 '미공개 일기'와 편지들은 좀 더 선별을 하고 수록했어야 한다. 뭉크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에는 상당히 역부족인 내용들이다. 고흐의 편지들을 엮은 강렬했던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와 상당히 비교된다.

아담과 이브 신화를 모티브로 삼은 듯한 삽화를 곁들인 우화집 〈알파와 오메가〉는 섬뜩하면서도 광적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설정과 인간 애욕과 유혹에 대한 내용이어서 대만족이었다.

아래는 책에 실린 두 개의 단편 소설 중 하나인〈하얀 고양이〉의 일부와, 〈생 클루 선언〉의 일부를 발췌한 것. 이 짧은 단편 소설 〈하얀 고양이〉의 후반부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물씬 풍겨나기는 하지만 아래 발췌한 부분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서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생 클루 선언〉은 뭉크 스스로 예술 방향을 설정한 중요한 선언이다.


에드바르드 뭉크, 《멜랑콜리》,유채, 1891.

 

뭉크의 단편 〈하얀 고양이〉 中

...(전략)...

나는 아틀리에에 앉아 있고, 따뜻해진 공간으로 햇살은 떨어지고, 고양이는 햇빛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정말 안락함이 지배하는 순간이다.

나는 생각의 산책을 떠났다. 나는 노도 키도 없는 작은 보트에 타고 있다. 나는 바닥에 누워서 흔쾌히 물결 가는 대로 배가 움직이도록 내버려뒀다.

나는 키와 돛이 있는 배를 타고서 조정을 해가며 바다의 심연을 재보려고 애썼다. 물론 몇 번 전복되기도 했고, 몇 번은 수심이 얕은 바닥에 닿기도 했지만 역시 역풍 앞에서 돛단배로는 무리였다.

이제 점점 더 거세지는 풍랑에 내 배를 내맡겼다. 어디론가, 나는 인도되었다. 그 무엇으로.

...(후략)...

 


에드바르드 뭉크, 《병든 아이》, 유채, 1885-1886

 

생 클루 선언문 초안

...(전략)...

루마니아에서 온 가수들이 등장했다. 사랑, 증오, 동경 그리고 화해의 무대였다. 감미로운 음악은 무대의 다양한 색채들과 하나로 녹아들어갔다. 이 모든 색채들, 무대 장식인 초록의 야자수와 청회색의 바다. 루마니아 사람들의 화려한 의상 색들이 청회색 연기 속에서 아른거린다.

그 음악과 색채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생각은 가벼운 구름을 타고 그 감미로운 선율을 따라 환희와 광명의 소리 세계로 들어갔다.

나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그것이 아주 쉽게 이루어지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술을 부리듯 내 손 안에서 창조되어질 것 같다. 그래 두고보면 알 것이다.

아주 건강하게 드러난 한쪽 팔과 갈색의 강해 보이는 팔을 가진 한 남자의 둥글게 솟은 가슴 위로 젊은 여인이 머리를 파묻고 있다.

그녀는 눈을 감고서 그 남자가 길게 늘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입을 살짝 벌린 채 귀기울이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본 것을 그대로 형상화할 것이다. 그래 푸른 빛의 연기 속에다가.

이 순간만큼은 그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은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어 있는 수천의 세대 구성원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신성하고 힘있는 사람을 보게 되고, 교회 안에서처럼 머리를 들어 우러를 것이다. 나는 이런그림들을 시리즈로 그리고 싶다.

남자들은 책을 읽고 여자들은 뜨개질을 하는 그런 실내 정경들은 더 이상 그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살아있는 생생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숨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그런 모습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후략)...

 


에드바르드 뭉크, 《생명의 춤》, 유채,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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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01-2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려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별로 칭찬을 안 하셨네요. 그럼 혹시 뭉크에 관한 다른 좋은 책이 있을까요?

IshaGreen 2005-01-2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뭉크 관련 책은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많이 읽어보진 못했어요.
이거 말고 열화당에서 나온 《에드바르트 뭉크》라는 얇은 책이 있는데,
뭉크의 직접적인 저술이 수록된 책은 아니구요, 그냥 해설서 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책이 뭉크의 작품을 이해하게 되는 데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책도 뭐, 사서 읽기는 조금 아깝긴 해도 우화집〈알파와 오메가〉라든지
뭉크의 짧은 단편들이 실려 있어 읽을만하긴 합니다^^
작품만 보고 싶으시다면 서문당에서 나온 도판집을 보는 것도 괜찮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