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지음, 함유선 옮김, 루이 조스 그림 / 밝은세상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보들레르의《악의 꽃》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두 작품이 현대를 열었다.' 라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거의 교과서의 공식처럼 내 머릿 속에 박혀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 작품 모두 읽어보지 못했다. 《보바리 부인》은 3분의 1가량 읽다가 다른 책이랑 바람을 피우게 되는 바람에 중도하차 했었고(조만간 다시 읽어볼 계획이다), 《악의 꽃》은 딱히 거부감이 들었다기보다는 원래 외국 시를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다른 출판사에서 편찬된 책이 한 권 집에 굴러다니는 데도 펼쳐 보지도 않았다.

여기서 잠시 딴 길로 새자면, 내가 외국 시를 읽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이상 번역본을 읽을 수 밖에 없는데, 타 문학 장르도 그러하지만 특히 시는 운율, 심상,  이미지 등 단어 하나하나와 그것들의 배치가 많은 함축성을 지니고 있는 장르이므로 번역이라는 것 자체가 어쩔 수 없지만 시를 훼손시킨다는 느낌 때문이다. 나는 외국 시의 번역본을 읽으면 우리 나라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만큼의 감흥이 와 닿지 않는다. 학창시절, 푸슈킨, 워즈워스, 랭보의 시가 각각의 다른 번역에 따라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 것을 경험한 이후로는 외국 시에는 손도 대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집에 굴러다니던 보들레르의 《악의 꽃》(다른 출판사에서 편찬된 것)을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내가 왜 새삼 이 시집을 읽게 되었느냐 하면, 시집의 디자인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하하. 서점에 진열되어 있던 이 책은 “이리 와서 나를 가져요, 호호호~”하고 나를 유혹하고 있었고 나는 그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_-;

사실, 책에 삽화가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 속에서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한한 상상과 감동이 삽화가의 손을 거친 결과물을 봄으로 인한 선입견으로 좁아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삽화는 크게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분위기와 전체적으로 잘 어울리는 느낌이라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디자인면으로 본다면 오히려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

그럼 처음으로 접한 보들레르의 시에 대한 감상은 어떠했느냐. 사실주의니 뭐니 하는 것은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므로 일단은 빼놓고. 전체적으로 퇴폐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열정과 환희가 엿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몇 개만 이야기하면, 〈시체〉,〈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적〉,〈올빼미〉,〈고통의 연금술〉등등등. 다시 읽으면 와닿는 작품의 목록이 다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 개인적으로, 외국 시인의 시집을 번역하여 내놓을 때는 원문도 함께 옆에 수록해 놓는 것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그렇다고 뭐 원문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내 젊음 한갓 캄캄한 뇌우였을 뿐,

여기저기 눈부신 햇살이 뚫고 비쳤네.

천둥과 비가 그리도 휘몰아쳐

내 정원에는 빨간 열매 몇 남지 않았네.

 

나 지금 사상의 가을에 닿았네.

홍수가 지나가면서 땅에

묘혈처럼 커다란 구멍을 파놓았으니,

삽과 갈퀴 들고 다시 긁어모으리.

 

누가 알리, 내가 꿈꾸는 새로운 꽃이

갯벌처럼 씻긴 이 흙 속에서

신비한 생명의 양식 찾을지?

 

오 고통이여, 고통이여! 시간은 생명을 좀먹고,

이 보이지 않는 원수는 우리 심장을 갉아먹어

우리가 흘린 피로 자라고 강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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