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의 코트 - 사라진 시베리아 왕국을 찾아서
안나 레이드 지음, 윤철희 옮김 / 미다스북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샤먼의 코트》라는 신비로운 제목의 이 책은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면 안 될 책이다. 《샤먼의 코트》에는 '샤먼'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러시아 짜르 체제 하와 소비에트 연방 시대를 겪으면서 시베리아에 존재하는 민족들이 겪어온 수난과 탄압, 민족적 정체성과 그들의 현재에 대한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지리 시간에 툰드라가 펼쳐져 있는 한랭 지대라고 배웠고, 러시아의 사상범들이 유배된 황량한 인상만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시베리아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런 우리의 통념에 무색하게도 다양한 전통과 문화를 갖고 있는 민족들이 시베리아에 존재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과 가장 먼저 접하게 되었던 타타르족,  러시아 제국에 최초로 통치받고 탄압당해 전통 문화의 명맥이 거의 끊어진 한티족, 몽골족의 한 뿌리인 부랴트 족, 혹독한 불교 탄압을 당한 투바족, 소비에트의 잔재가 남아있는 사하족, 사할린의 아이누족과 니브히족 등등...

원주민들의 땅과 알래스카를 개척(?)했던 미국의 발전을 모방하려는 러시아의 정책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천연 자원의 이점 때문에 이들은 물질적, 문화적, 종교적 탄압을 당하게 된다.  저자는 '현재 시베리아 민족들의 샤머니즘의 상태가 러시아 통치 하에 있는 시베리아 민족들의 정체성의 척도'라는 가정 하에 광활한 시베리아의 도시들을 탐사하지만, 그들의 샤머니즘은 거의 파괴되었거나 '민족 문화 연구'라는 명맥하에 겨우 유지되고 있을 뿐, 생생한 샤머니즘의 현장을 찾는 일은 가물에 콩나듯한 일이었다. 

러시아인과 피가 섞이고, 문화가 섞이면서 정체성을 점점 잃어가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뿌리를 알고 있는 그들의 현재의 모습은 매우 안타까웠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 중 하나는 한티족의 언어를 복원시키려는 올가 교수의 이야기이다. 한티어는 동사가 매우 풍부하지만(전체의 80%가 동사) 추상명사는 드물다고 한다. 예를 들면 '통나무 위에 앉다', '그루터기 위에 앉다', '흙 위에 앉다'를 뜻하는 동사가 모두 각기 따로따로 있다고 한다. 하지만 '풍부'라는 추상명사를 지칭하는 단어는 따로 없어, '산딸기가 많다'라는 식으로 나타낸다고 한다. 하지만 한티어를 쓰면 무시당하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오늘의 한티족은 러시아어만 알고 있으며, 한티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70~80대의 나이든 사람들의 일부일 뿐이라고 하니, 올가 교수의 노력이 가상하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에 서글펐다. 저자가 어떤 한티족 노인과 나눈 다음의 대화는 그 서글픔을 더욱 배가시킨다.

["지금도 한티어 할 수 있어요?"

"내가 우리 말을 못할 이유가 뭐야? 그건 우리 모국어인데 말야! 당신도 영어를 말하잖아! 우리 말로 말을 주고 받을 상대가 없어서 그렇지, 못 할 이유는 없어!"   본문 p.111.]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역사는 한(恨)의 역사이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탄압을 받았지만, 우리의 언어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새삼 감사함을 느낄 정도였다(우리 민족도 많은 문화적 전통의 명맥이 끊기기는 했지만). 소비에트에 의해 투바의 라마 사찰이 파괴되고 불교가 탄압당하던 1930년대를 저자에게 증언한 한 투바족 노파의 이야기에서 뿌리깊은 그녀의 한을 느낄 수 있었다.

[불상이 있던 자리에 누군가가 제물을 바칠 탁자를 설치해 놓았다. 이빨 빠진 접시에는 동전과 안전핀, 물에 젖은 담배가 담겨 있었다. 뎀빅은 노간주나무 가지를 갖고 왔다. 그녀가 바람을 피해 가지에 불을 붙일 수 있도록 나는 코트를 벌려 주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향해 달착지근한 연기를 가볍게 흔들어댄 후 탁자로 몸을 돌려 절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친 그녀의 얼굴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봐요, 젊은 처자, 사람들이 정말 이런 이야기를 읽고 싶어할까?"

"그럼요."

"그렇다면 정말 좋네, 젊은 처자."       본문 p.185-186.]

러시아와의 역사적 관계, 수난과 탄압의 역사, 원주민들의 현재의 모습을 취재한 이 책은, 내가 모르는 시베리아의 어제와 오늘에 관해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야만 할 것이지만, 나는 읽는 내내 예상보다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역사와 상황에 대해 가슴으로 소통할 수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취재하는 시베리아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들에 대한 애정을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나 다를까,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영국 친구들에게 내 책에 대한 얘기를 하면, 그들은 러시아의 황량한 동부를 탐험하려 든다면서 나의 대담무쌍함에 깜짝 놀라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우쭐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대부분의 시베리아 도시를 방문하면서 얻은 짜릿함은 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에 런던의 쇼핑몰에 들어설 때 느꼈던 흥분만큼 크진 않았다. 아마도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솔직한 태도라고 칭찬해 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거대한 시베리아의 수난과 한의 역사를 직접 발로 취재한 저자의 입에서 그것을 '런던의 쇼핑몰'과 비교하는 따위의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를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저자는 센세이셔널한 기대를 가지고 시베리아를 취재한 것인가? 역시나 영국인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잘 드러내 주는 대목이 아닐까? 그녀는 오리엔탈리즘적인 기대에 젖어 시베리아를 취재했지만, 그들은 (각 민족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는 문명의 스침에 동화되어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저자는 '실망한'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별점을 세 개밖에 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만난 원주민중 하나인, 에벤족의 후예인 대학원생 나타샤(러시아의 이름이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올리며 글을 맺는다.

" '나는 소련 사람이예요'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편했어요. 하지만 내 입으로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건 나한테 어울리는 카테고리가 아니죠. 그런데 내가 러시아인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러시아의 국민이 될 수 있었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