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처음 뵈었던 순간부터 해맑고 아름다운 미소에 반했었다. 그래서인지, 한번도 직접 뵌 적이 없지만 매우 그리운 분인 프란치스코 교황님.






천주교인은 아니지만, 교황님의 청렴함과 선한 영향력, 강단 있는 지도력과 진중한 포용력을 생전 흠모하고 깊이 존경하였기에 애도하는 마음으로 장례 미사도 생중계로 끝까지 지켜보았고 자서전까지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무보수로 사목하시며 교황으로서 수임하신 전 급여를 기부하신 것은 물론이고 평소 청렴과 검소, 나눔을 실천하시어 선종 당시 남기신 전재산이 100유로에 불과한 것은 이미 큰 화제가 되었으며, 보수적인 가톨릭의 수장으로서 여성, 동성애자, 전쟁난민 등 소수자에 대한 포용력과 세계 평화를 위한 범종교적인 화합을 강조하신 것도 파격적 행보의 연속이었다. 


이책엔 ‘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으나 교황 본인 업적에 대한 회고록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교황의 일대기가 조금씩 서술되기는 하나, 전반부 절반 가량은 차라리 제국주의와 신대륙으로의 이민, 제 1,2차 세계대전,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독재와 학살로 얼룩진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적 근현대사를 조부모님 세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수집한 증언문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걸맞게 프롤로그는 1927년 이탈리아 이주민들을 싣고 아르헨티나로 향하다 대서양에 침몰한 소위 ‘이탈리아의 타이타닉’ 마팔다호의 비극으로 포문을 연다. 베르골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 가문의 선조들도 마팔다호에 승선할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이를 피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구전 전승은, 1차세계대전과 굶주림 및 가난을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 중에 사망한 무수한 동족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서 이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살아남은 자로서 응당 받아들여야 할 인류애와 소명의식의 근원을 형성한다. 이 생은 누군가 역시 누려야 마땅하나 박탈당한, 하마터면 나의 선조들도 그럴 뻔했던, 따라서 내게는 은총으로 받은 생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전쟁의 참상을 들려주셨습니다. 공포와 고통, 두려움, 그리고 사람을 철저히 외롭게 만드는 전쟁의 헛됨을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적진 사이에 피어난 형제애의 순간들도 들려주셨죠. 양쪽 참호의 보병들은 모두 농부였고, 노동자였으며, 일꾼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기에, 서로 몸짓과 표정으로, 또는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상대방의 말로 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담배 한 개비, 빵 한 조각,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철저히 비밀스러워야 했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행위를 지휘부가 알면 가차없이 처벌했고, 심지어 총살형에 처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병사들끼리의 접촉을 막으려고 지휘부가 자기 군대의 참호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병사들은 깨달았습니다. 적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가까이서 보니, 선동 선전물이 떠들어 대던 그런 흉측한 괴물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저 자신들처럼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친 눈빛에는 같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고, 같은 진창 속에서 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한 이탈리아 가수가 노래했듯이 “마음은 똑같은데 다른 색깔의 군복을 입었을 뿐” 이었습니다. (중략)


“지휘부는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전진하라!,’ ‘불가능합니다!’, ‘상관없다! 그래도 전진하라!’ 완전한 광기였다. 명령을 내리는 자들은 멀리 안전한 곳에 있었다.” (중략) “절대 바닥나지 않는 탄약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본문 40-42쪽




이책의 전반을 가로질러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쟁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범죄이자 살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강조하며, 우리가 그저 한줄의 역사 또는 뉴스로만 접하는 전쟁과 파시즘의 잔혹한 참상이 한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를 어떻게 말살하는지,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사목하면서 만났던 여러 형제자매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기록한다. 마치 ‘이들을 잊으면 안된다’라고 강조하듯, 역사가와 같은 사명감마저 읽힌다. 대놓고 소명의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1-3차 세계대전이나 (교황은 가자지구 전쟁, 러-우크라이나 전쟁, 수단 내전, 핵무기 위협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시대를 3차 세계대전으로 정의한다) 마팔다호의 침몰 등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참상이라며 경각심을 일깨우고, 전 세계인이 항상 깨어서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소명 의식으로 전 지구적인 연대를 이루어야 함을 영적 지도자로서 촉구하고 있다. 




2022년 초,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제3차 세계 대전이라는 먹구름이 참상의 무대로 뻗어나가더니 점차 전지구적 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서 스스로 독립을 선포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2월 24일 새벽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전쟁은 유럽의 심장부를 강타했고, 투키디데스 이후 24세기 만에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찾아왔던 ‘역사의 종말fine della storia’이라는 헛된 기대마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보유 자체만으로도 비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 핵무기들의 실존적 위협이 눈앞의 현실이 된 것입니다.


본문 411쪽



그는 ‘핵무기들’은 ‘보유 자체만으로도 비윤리적’인 ‘실존적 위협’이며 ‘비겁함’이라고 분명히 하며, 이는 ‘이성의 명백한 실종’ 때문이라고 엄격하게 진단한다. 기술 만능주의와 무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탐욕의 현대문명이 브레이크 없이 달려서 결국 위기에 놓인 이 시대에, 신앙인이 해야 할 일은 낡은 독트린에 갖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나가 범종교적으로 지구의 환경과 평화를 위해 함께 협력, 진리, 정의의 원칙으로 힘써야 함을 역설한다. 이는 그저 종교적인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 본인이 2019년 남수단 대통령 및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전쟁을 멈춰달라고 그들의 발에 입맞춤을 한 일화는 이미 유명하며, 2021년에는 이라크에서 무슬림 시아파 최고 종교 지도자 대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알시스타니와 만나 “강대국들이 전쟁의 논리를 버리고 이성과 지혜의 길을 택하도록 함께 촉구”하는 역사적 회동을 이루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마주한 참상 앞에서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여러 차례 천명한다. 2014년 한국 방한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노랑색 세월호 배지를 착용하자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고 한다. 이에 교황이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이란 없다”고 대답했다는 일화 역시 화제가 되었던 바 있다.


한국 방한 당시 세월호 배지를 착용하고 미사를 집전하시던 모습



우리는 갈등을 부정하지 않고, 숨기지 않으며, 무시하지 않고, 외면하지도 않습니다. 갈등을 억누르면 더 큰 불의를 낳고 불만과 좌절이 쌓이게 되며, 이는 결국 개인이든 집단이든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리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가 결코 서로를 겨누는 무기나 장벽에서 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진정 지속 가능한 평화는 생명을 앗아가지 않고, 죽음을 낳지 않으며, 정의를 가꾸고, 기술 만능주의와 무분별한 이윤 추구의 문화에 굴복하지 않는 경제에서 비롯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사람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 (갈라 6,7 참조)입니다.

모든 전쟁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이 꽃피우려면 인간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 문명이 죽음과 파괴를, 두려움과 불의를, 그리고 절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입니다. 이 변화는 가장 힘없는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서 시작해,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와 피조물을 지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와 모든 민족의 권리를 지켜 내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는 마음으로 증오의 깊은 샘을 메워야 할 때입니다.


본문 428-429쪽



책 전체를 아울러 교황의 언어는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깊은 성찰을 지녔으며, 인문학적, 철학적, 문화적 소양의 깊이가 심오한 한편 그의 태도는 진솔하고 겸허하며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기존 남성적인 문명의 파국이 세계 대전과 기후위기문제로 나타난만큼,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소수자를 감싸안는 것도 교회의 역할임을 강조한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에서 일어난 아동 성 학대 및 범죄에 대하여 가해자 사제들의 성직자 신분을 박탈하는 데에도 서슴없었다. 미래에 교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그의 인도에는 신학적으로는 파격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깊고 풍부한 철학적 성찰이 돋보인다. 



성직자들이 여성이 누구인지, 여성의 신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는 결코 교회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큰 죄악 중 하나는 교회를 ‘남성화maschilizzare’한 것입니다. 


본문 308쪽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새로운 사제 양성 과정에 여성 평신도와 수도자들의 참여를 모든 방법으로 장려하는 일입니다. 이는 신학생들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여성이 신학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내고, 교회 기관의 책임있는 자리에서 일하며, 공동체를 이끄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곳에서는 특히, 여성들에게 예정된 모든 기회가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이를테면 피상적인 세속적 개혁이 아닌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이시며, 더 나아가 어머니”이신 하느님을 더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309-310쪽





전쟁la guerra이라는 단어는 여성형 명사이지만 결코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머니들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본문 427쪽





얼마 전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 구스타프 말러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전통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전통은 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씨를 지키는 일이다.”

전통은 박물관처럼 보존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은 미래를 비추는 등불입니다. 자꾸만 과거의 잿더미로 돌아가려는 것은 근본주의자들의 그리움일 뿐, 전통의 참뜻은 아닙니다. 전통은 오히려 나무가 늘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하는 든든한 뿌리와 같습니다.


본문 162-163쪽





전통은 조각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조각상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전통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전통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좋았던 옛날’에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세르가 지적하듯이,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모든 면에서 꼭 아름답기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길을 걸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시대의 요구를 읽어 내는 지혜를 함양하고, 성령의 창조적 지혜로 그것들을 채워가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실천 속의 식별로 나타납니다.


본문 358쪽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는 기업인이나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오염시키는 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으면서, 교황이 이혼한 여성이나 동성애자를 축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비난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는 교회가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한 반대 입장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본문 35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교황은 인류의 강력한 정신적 동력인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이책의 제목도 ‘희망하라Spera’이다), 이로서 어떤 기적을 인류가 이룩했는지를 강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를 그저 장밋빛으로 미화하고 현재를 종말론적 ‘관습적 탄식’으로 ‘아름다운 옛 추억’에 매달리는 것 또한 반그리스도적인 태도로서 경계한다. 



희망은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직접 겪고 만지는, 지극히 구체적인 체험입니다. 세속적인 차원의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계에서는 이제 인간이 지닌 이러한 특성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생존 본능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질병과 맞서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로는, 이는 인간이 지닌 가장 복잡한 능력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뇌는 사회적 관계와 언어, 사고방식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화학적 수용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최근 연구들은 신뢰와 기대, 긍정적 전망이 우리 몸속의 수많은 분자를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마치 약물처럼 작용하여 같은 생화학적 경로를 활성화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희망은 단순한 환상이나 막연한 기대가 아닌, 실제로 작용하는 약이자 치료제인 셈입니다. (중략)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이를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중략)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굳건한 믿음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로마 8, 35.37.)


본문 438-439쪽




















5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교황의 언어는 깊이있으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씌였으며 활자도 큼직하여 부담스럽지 않다. 밑줄 그을 구절이 너무 많아 고르기 곤혹스러웠다. 적고나서 보니 너무 진지하게만 썼는데, 덧붙이자면 콘클라베 후일담 및 소소한 유머스러운 이야기와 교황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도 풍부하게 읽을 수 있다. 오늘 후임 교황인 레오 14세의 즉위 미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이분도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평화의 메신저로서의 의지를 천명하고 계셔서 다행이다.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표어)’, 주님 품에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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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등 대표작들은 이미 섭렵했으나, 작가님의 이번 노벨문학상 계기로 초기 장단편들도 모두 건드리고 싶어져 구매한 한강 작가 작품집들이다. 


 

































하룻밤만에 한강 작가님의 2002년작 <그대의 차가운 손> 을 탐독했는데 역시나 잔상이 강렬하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의 작품을 관통하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육체와 이에 종내는 저항하게 되는 지점의 광기어린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유미주의적 표현력으로 승화하여 묘사하였다.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ㅡ소화해내야만 하며ㅡ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62쪽



손은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었다. 오직 한 가지,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을 제외한다면,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정교했다. 잔주름과 손톱, 가느다란 핏줄과 뼈의 잔가지들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동안 내가 혼을 불어넣어 빚어냈다고 믿어왔던 어떤 형상들보다 강렬하게 그 손은 실재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을, 숨결을 훔쳐 감쪽같이 내 것으로 만든 듯한 전율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 속에는 혈관도 근육도 뼈도 없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그 손에서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섬뜩했고, 차가웠으며, 비인간적이었다. 


-91쪽



그녀는 멍하니, 마치 지상에서 가장 낯선 물건을 보듯이 쌀밥을 내려다보았다. 쌀밥에서는 흰 김이 너울너울 피어올랐다. 그녀의 침묵과 저녁의 정적 위로 흰 김은 끝없이 높이 오르려 했고, 채 오르기 전에 찬 공기 속으로 흔적 없이 흩어졌다. 고요한 춤과도 같이, 비명과도 같이, 쓸쓸한 노래와도 같이. 숨결과도 같이. 침몰하고 또 생성되는 집요한 생명과도 같이,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 젊음, 더럽혀지지 않은 유년과도 같이. 무섭게 투명한 물, 더욱 투명한 시간과도 같이. 우리의 입술을 다물게 하는, 적요만 남게 하는 시간과도 같이. 


-153쪽



봄꽃들은 퇴색한 채 떨어지거나, 떨어진 뒤에 퇴색했다. 천천히 나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었다. 나는 철저히 내 과거 안에 있었고,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 기록이라는 습관은 은밀히 매력적이어서,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끊이지 않고 병행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실제의 삶과 이 기록 사이에 가로놓인 쓸쓸하고 단호한 침묵을 나는 느꼈고, 아마도 글 쓰는 사람들의 우울이나 염세는 그 지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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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 내 최애 한국 소설가.


기존 소설 작법의 문법을 파괴한 해체적이며 실험적 글쓰기로 탄생한 마치 무수한 파편같은 문장들의 집합체와 같은 그의 독특한 작품속에서, 파편들이 생채기를 내며 흐르는 의식 사이 왠지 뼈가 시린내가 물씬 풍기는 피폐한 문장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자살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죽음에도 이유가 없듯 자살에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기술의 발전으로 생각을 읽어낼 수 있게 되더라도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자살하고 싶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릇처럼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 당한 폭력보다도 더 큰 폭력을 스스로 행사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복수의 방식이었다.

-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연대기>, 31-32 쪽 - P32

손을 닦았는데도 땀과 크림과 비누가 뒤섞인 미세한 냄새가 났어요. 그런 냄새에도 이름이 있을까요. 내게는 의미나 상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내게는 이름이 필요해요. 구체적인 이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이름이. 모든 것의 모든 이름이. 나는 집 안을 둘러보았어요. 여전히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먼지 몇 점이 부유하고 있었어요. 내가 모든 것의 개수를 세려고 하게 된 이유가 그때 처음으로 궁금해졌어요.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그 처음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개수를 세고 다니지는 않았던 거예요. 존재하다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을 때부터 셀 수 없는 것들을 세려고 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이름을 알려고 했던 거예요.
-한유주, 식물의 이름, <연대기> 83-84쪽 - P83

그건 도트였다. 도트 하나로는 아무런 의미로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했다. 도트가 작을수록, 그리고 도트가 많을수록 해상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는, 해상도가 높은 글을 쓰라고 했다. 수강생 하나가 정물화나 인물화, 풍경화 를 그리라는 말이냐고 물었다. 너는 반구상화나 추상화에 도 해상도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네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너는 해상도를 초과한다.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아 야만 한다.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려고 네게 다가간다. 어 느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너를 통과한다. 나는 너를 계속해서 통과하고 있다. 너는 몇 개의 도트로 이루어져 있는가.
- 한유주,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연대기> 144쪽 - P144

삼각형의 욕망은 사각형이 되었다가 원이 된다. 나의 욕망은 선이다. 나의 욕망은 선이 되어 너에게로 수직 상승한다. 나는 구체적인 소설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소설 쓰기 수업을 수강한 이유는 너를 보기 위해서다. 내 욕망에는 매개자가 없다. 내 욕망은 곧장 너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어제는 오늘이 되었고 오늘은 내일이 되겠지만 나는 현재를 살 뿐이다. 나와 시간은 영원히 평행선을 그린다.
-한유주,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연대기> 152-153 쪽 - P152

나는 언어를 낭비하고 싶다. 나는 언어를 경제적으로 운용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는 언어를 탕진하고 싶다. 어떤 의미를 적확한 한두 단어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묘사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너.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너. 대단히 구체적인 주어로 자리하는 너. 나는 너를 설명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다. 맥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본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 저녁 하늘에 수많은 색이 있다. 저 색들을 하나씩 분리하는 일. 황혼. 어스름. 저물녘. 땅거미. 여명. Crepuscule.



-한유주,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 <연대기>, 218-21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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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ed, I’ve been eager to explore genuine meaning beyond specific languages—a concept reminiscent of Plato’s ‘idea’ that we can never fully grasp. 



Sometimes, this quest leads me to deep pessimism. I particularly grappled with this when I was creating novels in my twenties, feeling frustration and agony over the inconsistencies between meanings and the random structures of words, including phonemes and sounds, used by different people from different backgrounds, social classes, or personal particular experiences accumulated throughout their lives, even among those who speak the same language.  For example, to me, ‘love’ encompasses the meaning of ‘humanity,’ ‘willingness to dedicate’ and ‘philanthropy’, but many people tend to reduce it merely to ‘sexual relationships’ driven by mischievous hormonal impulse, which I still find hard to accept. This disconnection was difficult for me to bear, and I grew frustrated with the arbitrary links between meanings, sounds, and words. I often created several protagonists in my novels who developed acquired aphasia due to their feelings of betrayal and mistrust regarding g this randomness in meaning and language.















After reading Han Kang’s *Greek Lessons,* I decided to stop writing on my own. The work offers stunning insights into the primitive anti-language realm of the unconscious mind, which lies hidden beneath the structured, language-driven human consciousness. Her protagonists tenaciously attempt to reveal inconsistencies of their world, often pushing themselves to extremes in their struggle against cognitive—and sometimes physical—violence. They drive themselves into ruthless self-experimentation to confront the contradictions of the world around them in this process. She articulates the topic I had been trying to explore with such intense beauty in her poetic prose. 


It felt perfect, and I no longer felt the need for my own work on this topic, although I still love my novels! lol



 © 2024 Isha Green. All rights reserved. 





The terror was still only vague, the pain hesitant to reveal its burning circuit from the depths of silence. Where spelling, phonemes and loose meaning met, a slow-burning fuse of elation and transgression was lit.

- P10

The night is disturbed.
The roar of engines from a motorway half a block away makes incisions in her eardrums like countless skate blades on ice.
The lily magnolia, lit by the glow from the street lights, scatters its bruised petals to the winds. She walks past the voluptuous blooms straining the branches and through the spring night air, which is thick with an anticipatory sweetness of crushed petals. She occasionally raises her hands to her face, despite the knowledge that her cheeks are dry. - P13

There is evil in this world, and it causes the suffering of innocent people.
If God is good but unable to redress this, he is impotent.
If God is not good and merely omnipotent, and does not redress these things, he is evil.
If God is neither good nor omnipotent, he cannot be called God.
Therefore the real existence of a good and omnipotent God is an impossible fallacy. - P29

Your eyes widen when you are genuinely angry. Your thick brows rise, your lashes and lips quiver, and your chest heaves with every breath you gasp. As soon as I returned the pen, you hastily scrawled in the notebook:

In that case, my God is both good and full of sorrow. If you are attracted to such nonsensical arguments, one day your own real existence will become an impossible fallacy. - P30

That when the most frail, tender, forlorn parts of us, that is to say our life-breaths, are at some point returned to the world of matter, we will receive nothing in recompense.

That when the time comes for me, I don‘t see myself remembering the full range of the experiences I‘d accumulated up to that point only in terms of beauty.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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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마블빠로서 #어벤져스엔드게임 을 기대하며 쓴 글인데 딱히 게재할 플랫폼을 찾지 못해 그냥 여기에 올린다. (아직 안 본 분은 없겠지만 인피니티워 및 전작들의 스포일러 많음)



곧 어벤져스 원년 멤버들의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다. 전 세계가 타노스에게 이를 갈고 있기에, 우리의 히어로들이 타노스를 어떤 전술로 어떻게 이기냐에 대한 관심과 추측이 각종 커뮤니티, 인터넷 매체와 유투브 등에서 난무하고 있지만 그건 감독들이 알아서 잘할 테니 아묻따 믿고 감상하고 싶고, 그보다는 도대체 어떤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그릴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그 이유에 대해 길게 주절거려보고자 한다.


해피엔딩보다는 잘 만든 비극 혹은 열린 결말을 좀더 좋아하는데, 특히 영화가 (물론 케바케이지만) 해피엔딩인 경우 “오, 사이다~” “개존잼!” 하고 극장을 나와서 길어야 하루 이틀 더 되새기면 끝으로 곧 잊히곤 했지만, 비극이나 열린 결말의 작품은 여운이 오래 남아 곱씹어보며 사유를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1년 내에 본 영화 중에서 플로리다 프로젝트, 『쓰리 빌보드어벤져스: 인피니티워와 같은 작품들을 거의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경우 몇몇 장면을 떠올리면 과장이나 섣부른 판단 및 자의적인 해석 없이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그려졌던 주인공들의 비극이 생생하게 떠올라 아직도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린다. 이런 수작을 두고 관음증 변태적인 영화가 미장센 운운하며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니 아직도 화가 난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위선적인 영화이다. 내러티브적으로는선함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작 영화에서 긴 시간을 할애하여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소위액션이라고 일컫는 폭력, 전투, 파괴, 살인 장면이고 관객은선함혹은정의를 명분으로 대리 만족하며 이를 즐기러 극장에 가는 것이니까. 물론,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 에서 소개했던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마냥, 정교한 사회와 도덕 시스템에 촘촘히 얽혀 폭력성을 맘놓고(?) 발휘하기 다소 힘든 현대인들에게 일견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 의 저작 『악마 같은 남성 Demonic males』 에서도 지적하듯이, 영장류 수컷의 폭력성은 DNA에 뿌리 깊이 새겨져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지성이라는 무기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고 잔혹하게 진화하였고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왔다. 내재된 폭력의 본성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축적되다 급물살을 타고 임계점에서 폭발하며 전세계적,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사건들이 굵직굵직한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니, 퍽이나 후진 옛날 이야기다.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등으로 유명한 세계적 석학 스티븐 핑커 가 제시하는 통계와 성찰에 의하면 통념과 달리 인간 사회는 점점 선해져 폭력과 전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소수자들이 점차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세계는 어떻게 다양성을 지니고 혐오 사회에서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느냐와 대한 화두를 놓고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씨름하고 있다. 핑커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넓게 보면 영장류 전체, 좁게 보면 호모 사피엔스에 내재된 폭력성을 발휘하려는 욕망까지 깡그리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초적 폭력성을 발산하는 방식은 시대적 흐름과 영화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타고 좀더 건전한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이드id는 전쟁과 폭력, 살인을 스크린을 통해 즐기고 있다. 초자아superego가 마음 속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하며 죄책감을 덜어주어 가볍게 즐기기 더욱 좋다. 이 명분을 부여하는 복잡한 작업을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다소 유치한 장르였던 슈퍼 히어로물을 수준 높게 만든 것이 #케빈파이기 산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큰 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는 것을 힘들어해 슈퍼히어로물을 극혐했던 나까지 팬으로 만들었으니. 최근엔 슈퍼 히어로 영화 장르의 문법만 빌려와서 더욱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스릴러물(『캡틴아메리카: 윈터솔져』), 인종문제(『블랙팬서』), 청소년 성장물(『스파이더맨: 홈커밍』), 유쾌한 가족 드라마(『앤트맨과 와스프』), #페미니즘(『캡틴마블』)까지.















『인피니티워』는 작년 2018년 한해 동안 영화 팬들에게 큰 충격과 배신감을 선사한 작품이다. 결국 악이 승리했으며 정의의 사도인 어벤져스는 명분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변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의 광팬으로 10번 정도 관람했다. 당분간은 후속작인 엔드게임 없이 이런 결말도 그냥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너무 좋아했다.




일단 액션 영화로서의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인물이 30명 가까이 나오는데 불협화음 없이 잘 어우러지고, 불필요한 대사는 단 한 줄도 없다. 정교하게 짜인 모든 대사와 상황 설정은 각 인물들의 개성, 가치관과 내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복선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부조화일듯했던 인물들의 앙상블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며 그 접점에서 고도로 계산된 유머가 빵빵 터진다. 악인의 일대기에 효과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서, 흉측한 보라색 괴물을 관객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만들었다. 콧대 높으신 각종 영화제에서 홀대 받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향후 100년 동안 손꼽힐 명작 중 하나가 되리라고 예상한다. 배드엔딩으로 유명한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국의 역습』과 『시스의 복수』 가 그러하듯이.














앞서 말했듯이 후속작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 동안 관객들을 몰입시키기 위해 도대체 히어로들에게 어떤 명분을 부여해줄까?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에서는 히어로들이 갈등으로 쪼개지고 서로 전술도 공유되지 않은 채 시작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처참하게 당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야기와 예고편에서 암시한 바로는 히어로들은 심기일전 중이며 남은 명분은 이제 복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복수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타노스는 이제 자신의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고 명예도 물욕도 없이 오두막에서 쉬고 있는데? 감독은 관객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초점은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일 텐데복수는 루소 형제가 그간 작품들에서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절대로 아니다(아이러니하게도 ‘avengers’는 복수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전작에서도 복수심에 눈이 멀었던 자들은 다 실패했었다. 1: 타노스 손에서 인피니티 건틀릿을 빼기 전에 연인 가모라를 잃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고 희대의 트롤러가 되어버린 스타로드. 2: 역시나 니다벨리르에서 힘들게 새로운 무기 스톰브레이커를 만들어 와 놓고도 아스가르드인들과 동생 로키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실패한 토르(감독 코멘터리에서 밝히기로도 도끼날을 타노스의 가슴에 꽂으며 타노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토르는 복수의 희열을 즐겼다고 한다). 괴로워하며 타노스는 말한다. “, 실수한 거야. 내 머리를 노렸어야지.” 그리고 있는 힘을 그러모아 핑거 스냅, ! 인류의 절반이 먼지가 되며 상황 종료.



『인피니티워』에 이어서 『엔드게임』에서도 보여줄 핵심 키워드는 타노스와 캡틴 아메리카의 가치관 싸움이라고 예상해 본다. 타노스는 비용·편익 분석을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양적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의 21세기적 후계자이자 맬서스 인구론의 실제적 집행자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칸트의 정언 명령의 충실한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인피니티 워를 본 관객들이라면 타노스에게 이길 뻔 했던 몇 가지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어차피 절반이나 다 죽을 거 마인드 스톤의 소유자인 비전을 좀만 더 일찍 죽였다면 몰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스타로드가 이성을 잃지 않아 건틀릿을 타노스의 손에서 벗기는데 성공했다면? 스타로드가 가모라를 일찍 죽였다면 소울 스톤은 아예 찾지도 못했을 텐데. 토르가 좀더 냉정하게 타노스의 머리를 노렸더라면? 뒤의 두 가정은 히어로들의 인간적이며 불완전한 면모와 복수심의 무용함을 보여줬다면, 앞의 두 가정은 비용 편익 분석적으로 보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나 최악을 막기 위해 차선책으로 절반을 죽여도 괜찮다는 타노스의 가치관과 진배 없는 섬뜩한 가정이다.















『인피니티워』에서 두 가치관의 격돌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된 기차 비상 선로에서의 도덕적 딜레마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무고한 1인을 고의적으로 살해하여 5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살인은 정당한가?” 세계 기아 문제 전문가인 장 지글러 는 유명한 저작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기근이 인구를 조절한다는 맬서스 이론에 대해자신들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자들의 전형적인 유럽적·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라며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를 의식했는지 감독들은 영리하게도 타노스를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실행하는 자로 묘사되며 스톤만 챙기면 전투를 멈추고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사라진다. 그는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랜덤으로 공평하게 절반만 죽인다’.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심지어 타노스 자신도 랜덤으로 살아남은 쪽에 속한다고.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놓기』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가 존중되는 존재자로서 생명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캡틴은 칸트 철학의 수호자이다. 『시빌 워』에서는 소코비아 협정에 반대하며 지성적인 존재로서 자율적인 의지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칸트의 도덕 철학의 핵심 정신을 실천한 바 있다. 『인피니티워』에서도 역시 그는 비전이 자신을 죽이라고 하자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We don’t trade lives(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결과론적인 비용 편익 분석으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정의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생각이며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캡틴은 졌고, 동료들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참혹한 와칸다 전투 현장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황망한 표정으로, 처음으로 신을 찾는다. 이보다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캡틴은 자신의 정의를 고수할 수 있을까? 지난 10년 간 캡틴의 여정을 그린 6편의 영화를 지켜보면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반드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 그 신념을 멋지게 그려낼 것인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개봉을 남겨두고 가장 흥분되는 지점은 두 가지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과, 캡아는 도덕 판단을 비용 편익으로 분석하며 생명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한 방 날려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은 얼마나 멋질까?!


 © 2019 Isha Green.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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