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에서 올해 봄까지 이 불온해 보이는 소설들을 사랑했었다. 꿈은 자본주의 사회의 훌륭한 부품인데, 꿈이 곧 혁명으로 치부되는 사회라니. 나는 사랑과 혁명 사이를, 삶과 죽음 사이를 유랑하다 흔들리던 추가 멈춘 듯 갑자기 정지했다. 계절이 두 번 지났다. 어느새 어떤 계절이 가장 좋으냐는 물음에 명확히 답을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가 되었다. 나이 탓이다. 봄이면 봄이, 여름이면 여름이, 가을이면 가을이, 겨울이면 겨울이 좋은 건 모든 계절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계절마다 추억할거리가 적지 않은, 적지도 많지도 않은 다소 오만한 나이 탓이다. 이미 많은 가능성을 잃었지만 또 수 개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모호함에 갈팡질팡하는 때. 과거에 심취한 책등을 쓸어내리면 최초의 계절에 내려앉은 의지가 만져진다. 꿈으로 써내려간 현실은 절망과 의지의 경계를 넘나든다. 더없이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로 그려졌지만 현실의 황홀을 말하지는 못한다. 어느 날 비로소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그들은 털어놓을 것이다. 고백은 가닿지 않고 시간은 정처없이 흘러간다. 미처 꺼내지도 못한 마음은 실패한다. 다시는 그날이 오지 않는다. 한 번 뿐이고 각자 다르다.


그럼에도 시대와 제도의 틀에서 결코 벗어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나라는 사랑과 혁명을 동의어로 여긴다. 사랑은 조용히 혁명하고, 진실은 추억에 갇혀 경련한다. 아무도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사실에 다가갈수록 진실을 알게 될수록 더욱 선명하고 견고해지는 붉은 덩어리. 성애는 끈적대지만 애착은 역동적이다. 탐함의 미학 앞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환상적 리얼리즘. 감출 것 없는 비밀들 틈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서러운 욕망도 있다. [물처럼 단단하게]의 두 주인공은 경계, 가치, 금기를 뛰어넘어 몸을 섞는다. 시도때도 없이 어떤 환영 속에서 뒤엉키는 몸과 몸, 영혼과 영혼이 애닳토록 강렬하고 숨가쁘게. 운명에 지배된 자들의 외침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쿠코츠키의 경우]를 혁명의 축소판, 가족이라는 이름의 진혼곡으로 읽는다. 억압과 불통이 소비에트 체제 하의 쿠코츠키 가족에게 미친 영향과 소박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탄생과 소멸, 세대교체와 연대책임의 뜨거움으로 그려내고 있다.





 














[열세 걸음]에서 국가는 절대적이다. 국가가 가난과 존엄을 해결하지 못하자 좀비같은 인민들이 새장 안에서 목숨을 다한다. 교사 팡푸구이는 턱도 없이 적은 봉급과 시도때도 없는 야근에 의한 피로누적으로 교단에서 쓰러진다. 팡푸구이의 불행은 정부가 지배를 견고히 할 재도약의 기회로 이용된다. 매일 밤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내 투샤오잉의 절규는 기절했다 깨어났을 뿐인 팡푸구이를 진짜 죽은 사람으로 내몬다. 살기 위해 죽음, 그 역설의 아이러니. 산 자를 죽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부정(不正).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미친 욕망이 비열할수록, 고독이 짙을수록 문장은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미덕과 악덕,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경계를 뒤흔드는 모호함. 세련된 성적 환희로 표현된 처절함. 영웅을 원하는 사회의 대참사.



산아제한정책으로 인한 폐해는 혐오스럽다못해 부당하고 허황하다. 원제 蛙, [개구리]는 실제 산부인과 의사였던 고모를 모델로 1971년부터 실시해온 산아제한정책의 실상과 울분을 1인칭 화자의 시선으로 해부하는 작품이다. 개구리는 강한 생식력의 상징으로, 모옌의 고향인 중국 가오미 둥베이 향의 토템이라고 한다. 인구수와 경제력의 극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서 치욕과 울분을 견디며 죽어간 여자들과 빛을 보지 못한 채 색종이 잘리듯 잘려나간 티끌만한 생명. 침묵할 수 없던 소설가는 이 희생과 폭력의 시대를 편지글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생명과 목숨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시계(視界)로 삼는다. 





지상                  

                 

       -황학주


여기는 이상하다 이상하게

한 사람씩 온다

다시 올 일 있을까 싶다

나란히 신발 벗을 때는

모르지만

이상하다 이상하게

한 사람씩 나간다

모텔 같다

여기는 물감냄새가 난다는 게 문제지

사랑만 필요했던 

연인들이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

시간의 종업원이 똑똑똑 노크를 하거나

전화벨을 울려주기까지 하는 곳

슬픈 것은 사랑을 보는 모텔 주인의 생각이며

거기서 나온 인테리어 솜씨일 뿐

이상하고 또 이상해도

여기서 서화를 그릴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나는 가고

당신은 오는 것을 잊는다 해도





이 쓸쓸한 기운. 못미더운 계절. 스며드는 불안. 잔잔한 고독. 무서움과 두려움. 형체없는 모든 것이 미세하게 감지된다. 단연 무채색의 소설. 모든 것들에 심드렁해진 한 사람을 전율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누구인가. 한시가 아깝던 파리 유학시절에조차 허름한 아파트에서 그녀와 나누던 사랑 외에는 그 무엇도 그의 심연에 파문을 던지지 못한다. 이웃집 노파의 숨겨진 비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중심을 세우고 다시 붓을 들 수 있게 된 그에게서 돌림하듯 특징없는 마을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듣는 시간.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진짜 욕망을 본다. 별이 붉고 달이 울었다. 모든 게 그의 환상에 불과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빈방을 떠올리면 한적한 터 금방 허물어질 듯한 집 한 칸이 생각난다. 안락하고 따뜻해서 기어이 매몰되고야 말 그런 집. 마을로부터 30분 떨어진 풍성한 초록의 숲 속에서 세상과 등을 맞댄 채 개울을 틔우고 물고기와 박을 기르며 사는 남자를 보았다. 이십 오 년 전의 연인을 그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제는 하얗게 센 머리색의 남자를 보았을 때, 어서 그 남자를 저 세상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운명에게 말을 걸었다. 많은 날들을 나는 아파했다. 그의 한평생이 저릿하고, 처연하고, 애잔했다. 


아무 것 아닌 찰나. 무(無)의 세계로 흩어지는 공허. 확언하되, 이 막연함도 곧 지나갈 것이다.




















신작이 아니었다. 1991년 作. 많은 말을 하기에 너무 짧고 정적이고 부질없다. 고집스럽고 청아한, 실존했던 한 음악가의 삶을 묵직하게 그린다.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이해할 리 없는 어떤 생애.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에 얹힌 진부함이라니. 세상의 모든 저녁도, 세상의 모든 사랑도, 세상의 모든 이별도, 세상의 모든 황홀도 절망도 같은 형태로 두 번 다시는 오지 않는다. 하물며 아침이라니. 미세하게 달라지는 우주에 균열을 내보고 싶은 자의 목소리. 제 길을 꿋꿋이 걷는 예술가의 찬란한 이름. 감촉과 내음이 따사로워서 잔잔한 호숫가 옆 푸릇한 들판으로 달려나가고 싶다.


17세기 프랑스 출신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 그는 음악으로 세속적 욕망을 이루고자 찾아온 제자 마랭 마레와는 상반되게, 아내를 잃고 두 딸을 홀로 키우며 영광을 선사해줄 왕실의 부름도 거절한 채 오로지 자신의 음악세계를 지키는 단호함을 보여준다. 소설적 흥미가 툭 불거진 상황설정이나 진한 감동에 있다면 이 소설은 정반대에 위치한다. 내면이 발하는 은은한 빛을 따라 걷는 자는 마침내 황홀경에 도달한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격렬하게 대립하지만 작가는 몸을 낮춰 말한다. 삶이 대체로 그러하며 순간의 선택이 생을 이루게 한다고.






편혜영은 처음이다. 나는 습작을 때때로 지겨워했다. 그때 나는 반드시 무엇이 되고 싶었다. 이 소설집을 읽게 된 건 오로지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던 밤들 때문이다. 


영어단어에도 진행형을 쓸 수 없는 동사라는 게 있지. '소유하다(have, possess, owe), 원하다,바라다(want, wish)' 같은 단어. 


현재진행형과 친하지 않은 나는 밤의 현재진행형 앞에 긴장한다. 지나간 것과 지나가는 것, 분노하는 것과 분노하고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있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지금 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밤이 원치않는 비밀을 엿보는 중이라고. 애틋하고도 그윽한 시선이 가장 나답지 않은 순간마저 나를 또렷하게 한다고.





기어이 어떠한 조건을 붙이고서야 읽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장편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나는 단편을 그 자체로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단편 밖에 읽지 않았던 때도 그랬고, 습작에 써먹기 위해 줄기차게 읽어야만 할 때도 그랬다. 베끼고 싶은 문장을 종종 발견하지만 읽는 게 서늘해지거나 흥미롭다는 느낌이 없다. 좋다고 느낀 찰나가 가끔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단면들을 요리조리 쪼개보는 과정을 싫어한다. 부분과 단절을 어려워한다. 흐름이 없어 싫고, 묻혀버려서 싫다. 처음과 끝을 동시에 소유하고 싶고, 오랫동안 여러 번 만나 다정해진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낀다. 흥미로이 여기지 못함에도 여덟 개의 어둡고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삶을 직시하고 있어 때론 고마웠다. 밤(夜). 자체로 황홀하고 그 질감마저 투명한 것. 시시콜콜한 밤들이 지나간다. 시공간의 단절이 도무지 있을 줄 모르는, 여기는, 지상이다. 황학주 시인의 말처럼, 나는 가고 당신은 오는 것을 잊는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는. 세상 무엇으로도 채우기 힘든, 지상의 어떤 순간과도 바꾸기 어려운, 마침내 괜찮은 계절이 왔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여름의 끝에 간신히 매달린 이 소설이 물었다. 단단하지만 허물어지는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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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7 17: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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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7 2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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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3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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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9 0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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