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페르노>가 펼치는 상황은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밝힌 주장 이상이며, 충분히 설득당할 만큼 매혹적이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의 차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있고, 급진과 온건의 틈마다 존재한다. 현재와 미래 가치 사이를 방황하다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어리석음에 비하면 소설 속 유전공학자인 조브리스트나 맬서스의 맹목에 바탕한 비관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여름, 댄 브라운이 돌아왔고, 다시 종교와 과학이 격렬하게 대립한다. 여기서 세계 다수는 의아하게도 종교의 편에 섰다. 급진적 과학은 더이상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 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으로 회귀시킨다. 나자마자 죽을지언정 마지막 욕구는 분출되어야 하며, 잉태의 인위적 제거는 죄악과 다름없다는 종교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기아,전쟁,질병에 도전하는 인간의 출산을 막아야 한다는 과학. 소설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굳이 묻지 않지만 그래도 감정이입을 위해 끌리는 쪽에 서보자.

 

단테의 지옥이 주는 비장미와 숭고미를 댄 브라운은 고스란히 가져온다. 그의 특기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로서의 액션이 아니라 기호학과 인류학, 중세 예술 도시를 누비며 만나는 예술적 경지에 오른 관광지와 예술작품에 대한 탄탄한 묘사와 흥미진진한 스릴에 있다. 두오모에서 피티 궁전,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우피치 미술관까지. 이탈리아에 가기 위한 서유럽 여행을 했던 내게 강렬하면서도 깊게 남은 낮과 밤. 고독과 역사가 스며든 도시. 피렌체를 단단히 훑었다고 생각한 건 커다란 착각이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바티칸, 단테, 미켈란젤로, 다 빈치, 브루넬레스키, 조르조 바사리. 한때 심취한 키워드의 집합. 당시 중세 이탈리아를 향한 격렬한 관심은 도서관 서가 몇 칸을 헤집는데서 끝나지 못하고 무작정 비행기를 타게 했다.

 

<다빈치 코드>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 관광객을 소리소문없이 폭발하게 한 것처럼(대다수가 안내도를 받아 '모나리자'만 자세히 관람하고 가는 걸 수도없이 목격함), <인페르노>는 단테, 지옥, 세계의 끝으로 가는 문을 낸다. 언젠가부터 단테는 지옥을 향한 끔찍한 환상, 후대 수많은 문학과 예술작품에 영감을 준 한 명의 위대한 예술가로 대상화 되었다. 환상으로 남은 베키오 다리. 첫눈에 반한 베아트리체를 향한 꽃다발. 줄을 잘못 서서 태어나 자란 곳에서 쫓겨나 죽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단테. 

 

 

새벽 공기 찬연한 어느 겨울날, 단테가 건넜다는 베키오 다리에서 숨을 멈춘다. 한참 시간을 들여 건넜다가 다시 건너온다. 특별할 게 없는 그저 강 위 다리일 뿐인데도 그토록 벅찼던 이유는 꿈같은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착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14세기 아르노 강 위에 세워진 이 다리는 베키오 궁과 피티 궁을 잇는 메디치 가문의 비밀통로로, 시뇨리아 광장, 두오모 성당까지 연결되는 구시가지와 성곽 밖 신시가지를 잇는 지금까지도 강력하게 통용되는 피렌체의 상징이다. 조토의 종탑과 핑크, 그린, 화이트가 고루 섞인 대리석의 두오모에 올라 진한 붉은빛 지붕의 작은 도시를 내려다보며 가슴이 뛰었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고풍스런 도시가 피렌체만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이 도시만큼 시공간적으로 완벽하게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곳도 드물 것이다. 소설에서, 단테의 도시 피렌체에서의 단테마스크와 신곡-지옥편이 전반부의 열쇠를 쥔다면, 후반부의 무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댄 브라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테를 빌려와 얘기하는 인류가 닥친 눈앞의 지옥이다. 막아내지 못하면 개체수 조절에 실패한 연못 속의 금붕어처럼 공멸의 길로 가는 길을 낼 그런 지옥. 

 

 

 

 

 

 

 

 

 

 

 

 

 

 

 

 

세계인구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는데 생산설비나 생산물은 산술급수로 늘어난다. 토지, 자원의 한정된 보급량은 이미 적신호인데다 거의 재앙 수준의 미래가 예상되고 있다. 나와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된지 오래다. 나 or 당신이 죽는 게 아니라 모두가 죽을 것이다. 인구증가는 지구가 당면한 가장 거대한 산이다. 소리없는 메아리가 단단한 벽에 부딪쳐 다시 되돌아오고 있는 상황을 눈앞에 두고만 볼 수는 없다. 눈앞의 박애정신이 전 인류를 멸종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재앙을 막아줄 중세의 흑사병이나 에이즈 이상의 강력한 무기가 요구된다. 가능하다면 절반의 희생으로 나머지 절반의 행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맬서스가 예견한 인구증가의 재앙은 유전, 토지, 경제 등 한정된 자원을 이유로 발생하는 국지전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측가능한 미래다. 조브리스트는 이 현상을 막기 위해 나름의 대책을 고찰, 발표한다. 강렬하면서도 논리적인 논문은 학계의 비난 속에서도 숨겨진 추종자들을 양성한다. 어느 날 세계보건기구(WHO)의 인구문제에 대한 안일한 대처를 지적하며 '해결'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신스키 박사를 찾아온 조브리스트는 피임법 강의와 피임도구 설파로 충분한 대처를 하고있다는 그녀의 말을 조롱하며 압박을 가해온다. 

 

세계와 조브리스트의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지옥의 반대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뛰어들거나 똥물에 거꾸로 처박힐 필요는 없다.

 

"만약 당신이 어떤 단추를 눌러서 지구 인구의 절반을 무작위로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지금 당장 그 단추를 누르지 않으면 인류가 앞으로 100년 내에 멸종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래요?" (1권, p.357)

 

 

 

 

보티첼리,『지옥의 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상징과 해석, 스릴의 연속이다. 결말을 얘기하지 않으면 예측되지 않는 편의 충격이긴 해도 해당 결말 외에 다른 결말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새롭거나 예상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단서가 결말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이상 읽어가는 도중이 읽고난 이후보다 중요하다. 인류의 진짜 지옥이 굳건히 지켜주리라 믿던 과학에 있는 게 함정, 반전. 대테러를 막기 위한 두뇌싸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댄 브라운은 낙관적 미래를 예견하지 않는다. 유괴범 추격이 실패하면 기껏 개인이 죽을 따름이지만 이 테러를 막지 않으면 인류 전체가 위험하다.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다. 소설은 정확하게 세 번의 공간이동을 한다. 시간이동은 아니다. 길게 잡아 사흘의 시간, 세 개의 도시, 도처에 널린 단서. 그게 바로 랭던 교수의 길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개체수가 지나치게 많아질 경우, 그것이 곧 그 종의 멸종으로 이어지는 건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에요. 숲 속의 어느 조그만 연못에 어떤 조류가 살고 있다고 가정할 때, 일정한 시점까지는 완벽한 영양소의 균형 속에서 개체수를 늘려갈 수 있겠죠. 하지만 증식이 무제한으로 계속되면 얼마 못 가 연못의 표면을 완전히 뒤덮게 되고, 결국 햇빛이 차단되어 물속에서 자라던 영양소의 성장이 중단될 거예요. 그 시점부터는 순식간에 개체수가 줄기 시작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고요."  (1권, p.349)

 

 

인페르노-푸르가토리오-파라디소.

 

원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과 희극을 모두 다뤘지만 비극편에 더 중점을 두고 서술한 것과는 별개로 희극편은 사라져버렸다. 있긴 있었는데 전해내려오지 않는 것은 세상에 많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가 '삼국사기'인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왜 사라졌는지도 중요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해당 텍스트가 아닌 같은 시대의 다른 텍스트가 말해준다. 단테를 떠올리면 <신곡>이, <신곡>을 떠올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시학>을 떠올리면 <그리스 비극>이 생각나는 일련의 연상을 통해 왜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먼저인지, 왜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마지막인지를 생각해봤다.

 

연민과 공포를 유발하는 비극과 비교했을 때 무지, 속죄, 배신의 쾌감에서 나오는 희극은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으로 볼 때 위험한 카타르시스에 해당하고, 이 팩트를 두고 '왜 희극편이 사라졌는가'를 소설적으로 증명한 이는 <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였다. 거기 나오는 사라진 희극편, 금서의 장마다 독을 묻혀 읽은 자들을 죽임으로서 책을 감추는 그것. 처음, 책의 시대적 의미를 접하면서 전율했었다. 이 시대 우리는 책을 한낱 고루한 놀이라고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일만큼 그 지위를 격하시켰는데, 중세에는 한 권의 책이 곧 우주이자 신이자 세계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적절할 만큼 나는 희고 매끈한 도화지였다. 모든 걸 흡수했고 다시 삼키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금 책의 가치가 곧 중세시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이탈리아 각 도시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여행지지만 인간의 배신, 음모, 영광, 패배와 같은 역사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대단한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이 늘 그곳을 무대로 하고, 이탈리아에서 종종 그의 소설 속 루트를 따라 여행상품을 계발하기도 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로부터 시작된 극의 형식은 처음에는 낭송이었다. 무대와 관객석을 분리하고 그저 시를 읽어주는 것. 시를 읽어주고 반응을 얻는 기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예술작품을 통한 감정이입과 내면화. 비극은 눈물을, 희극은 웃음을 유발함으로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 하필이면 지옥에서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향하는 신곡의 순서를 생각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떠올랐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안내에 비로소 천국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 절대자가 있었다. 절대자는 중세의 정신이었다. 절대자는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했다. 웃음은 눈물을 내려다보고, 눈물은 웃음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삐딱한 내가 생각하기를, 절대자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현대가 강력하게 증명해주고 있는데. 국민 전체의 의견은 깡그리 무시된 채 높은 권좌의 손가락 하나면 시작되는 전쟁, 법도 정의도 청춘도 희망도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의 낮은 공명심으로 유지된지 오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내가 높은 곳에 있지 못해서인가. 절대자는 역시 천국에 있는 것인가. 아님 높은 권좌가 세상에 필요한 것을 적절히 제공하지 못하는 탓일까.  

 

 

 

 

 

 

 

 

 

 

 

 

 

 

 

 

 

단테를 좀 더 잘 알기 위해 이 책들을 골랐다. 조금 돌아 <신곡>은 이후에나 다시(아니 처음으로) 시도. 다 빈치나 '모나리자'를 몰라도 <다빈치 코드>가 읽힌 것처럼 단테나 '신곡'을 몰라도 <인페르노>는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추리 스릴러로 읽힌다. 순전히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내 머리 속 공상 때문에 이 페이퍼를 썼다. 과학도, SF도 아닌 추리소설(에 가까운)을 두고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선택적 가치판단의 시험에 드는 건 우리가 점지된 비범한 능력자가 아니라 지구 어느 곳에서나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누군가에게 영향 받거나 휘둘리기 싫어하는 고약한 성미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각자)의 지구별 탄생이 우연과 무작위로만 가능했을까. 혼돈-인류의 도태와 멸종-을 막아내는 방향으로 인류가 진화해온 이유가 지구를 정화해야 한다는 조브리스트의 주장을 제거시킨다. 언젠가 죽을 것과 죽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다른 밀도의 위화감을 불러 일으킨다. 설령 두 날짜가 시분초까지 같더라도 말이다. 죽음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자의 두려움 끝에 인류멸망(지구종말)의 길이 기다린다는 설정을 더해 탄생한 미친(어떤 언론평에 의하면) 소리.

 

다시 생각해도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극명한 급진주의자가 될 거란 명쾌한 증명은 갖지 못하지만 적어도 소수의 손에 다수의 명이 오락가락하는 순간만은 없어야 한다. 가혹한 흐름이다. 나는 누군가의 선택과 결정에 흔들리는 순간이 제일 두렵다. 모든 것을 꿰뚫어(그렇다고 착각) 신중함 끝에 조심스럽거나 당돌하게 내리는 판단만이 내 것이다.

 

여름이고 세 소설이 나란히 베스트 3를 차지하기고 있기에, 정유정, 댄 브라운, 하루키를 줄지워 정공법으로 지나왔다. 사이사이 다른 책도 읽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도 엄청나게 봤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여왕의 교실]은 몰입도가 짱이고, [황금의 제국]은 아직은 뻔하지만 그래도 재밌다. 그러고보면 특정 분야, 신간차트를 빠짐없이 체크하고 읽(으려 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를 줄쳐 지워가며 읽는다는 독서가(배우)의 인터뷰를 보며 신기했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위치가 애매해서 괜히 피해가고 싶거나 독파해야 할 듯한 갈팡질팡 사이에서 괴로운데, 결국 못하는 이유가 자기계발서나 대중도서가 대다수로, 영 내키지가 않기 때문이다. 소문은 발이 없는 거라서 베스트셀러는 그저 '당신이 사면 나도 산다'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수준을 평가절하해서가 아니다. 제대로 집중하면 세 작품을 삼일천하에 끝낸다(그러지 않기는 불가능)는 장단점(?)이 있지만 어쨌든 어떤 책이 불티나듯 팔리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닌가. 그래도 이상하게 애국심 돋아서 아니면 멍청한 국수주의자라고 해도 좋고, 댄 브라운 보다는 정유정이, 하루키 보다는 조정래가 더 오래 상위순위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그냥 그렇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리뷰는 쓰고 싶은데 막 오락가락 머리속에서 춤추는 생각들 때문에 결국 이러다 말 것 같다. 어떤 얘기를 써도 뻔해질 것 같은 반면 한층 내밀한 얘기를 곧잘 쓸 수 있을 듯한 희미한 착각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 금요일. 요즘은 '또 금요일'이란 말을 자주 할 만큼 체감상 시간이 물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더이상 밤을 새지는 않는다.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밥맛이 너무 없고 덩달아 밥먹을 시간도 없어서 겨우 책을 삼킨다. 책은 희한하게 그렇잖아도 내려올 줄 모르는 나르시시즘과 자존감만 자꾸 드높이는 것 같다. 너그러워지는 게 아니라 고립되는 방식으로. 얼음성이나 아이스크림 동굴로 기어들어가고 싶다. 구멍가게를 이용해야 한다고 하지만 세일을 하기에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털었다. 이런저런 것들도. 안산 건 맥주 뿐이다. 온라인에선 안파니까. 애국주의자인 척 한 건 취소다.

 

뭐 딱히 좋은 거라고 책을 광속으로 사모은다는 소식. 이런 소식을 누가 궁금해나 한다고.

 

여름이 지옥이다. 닭들이 자꾸 죽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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