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한 순간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 유럽 5대 왕실에 숨겨진 피의 역사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파리에서 루브르보다 오르세가 사실상 더 인기있는 것처럼 런던에서 대영 박물관보다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들이 더 익숙한 것은 상대적으로 친숙한 화가의 작품이 많고 시대적으로도 가까워서다. 내셔널 갤러리와 트라팔가 광장의 해질녘 풍경과 비에 젖은 연하늘빛 세상을 좋아한 만큼 오래 그리워했지만 당시에는 몸통을 나란히 붙이고 있는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는 무관심했다. 포트레이트만 걸려있다는 게 그다지 발길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장료 무료는 밑져야 본전이니까 솔깃한 일인데도 우린 그때 런던 전역을 돌며 수줍은 관광객티를 내느라 거의 매일 물에 젖은 새털처럼 무겁고 기운이 빠져 있었다. 평소 배우던 것과는 다른 발음과 억양으로 흘러나오는 묵직한 영어는 훗날 원어민을 만났을 때 트라우마가 되었고, 좁다래서 차라리 귀여운 전철이나 빨간색이층버스에 탄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일 경우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자유는 어둠이 내린 타워브릿지 불빛 찰나에서나 가능했다. 그곳은 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업적 모르는 인물의 얼굴만 나열된 그곳을 좋아했을 리도 없지만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들이 사용되는 방식으로 역사를 대하니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하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 케이트 미들턴이었을라나.

 

유럽 왕실 곳곳에 불어닥친 강풍, 피와 광기의 역사, 혈연으로 뒤얽힌 사랑과 파멸의 대서사시. 촘촘하게 밀착된 연대기적 사건을 잔인한 왕에게 죽임 당하거나 버려진 가련한 왕비 중심으로 다섯 챕터의 긴밀한 연결을 통해 만난다. 

 

여왕들의 경쟁: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푸른 피를 지키기 위한 결혼: 합스부르크 가문과 마르가리타 테레사


광기의 군주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곱 황비: 이반 뇌제와 황비들


무식하고 야비한 왕에게 평생을 유폐당한 왕비: 조지 1세와 조피아 도로테아


잔혹함에 맞선 왕비의 생존법: 헨리 8세와 앤 불린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1603) 

 

 

메리 스튜어트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의 자리에 올라, 다섯 살 때 잉글랜드와의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한 궁책 끝에 프랑스 왕비가 된다. 후사를 생산 못한 메리가 권력구도로부터 밀려 조국으로 돌아올 때도 아직 스물이 되기 전이었으니 날 때부터 갈 때까지 지독히도 잔인한 운명에 가려진 그녀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최고의 불운은 예쁜 얼굴과 가녀린 몸매,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라이벌로 둔 것으로, 헨리 8세 여동생의 손녀인 메리는 사실상 서출인 엘리자베스에 비해 왕위계승서열이 앞섰다. 아버지에 의한 어머니의 가혹한 처형을 목격한 엘리자베스가 만개한 아름다움을 지닌 메리를 여자로서 질투하고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이 처연한 피의 현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에 의해 오랫동안 유폐당했다가 종교혁명을 억압하려는 대신들의 요구로 처형당한다. 실패한 세 번의 결혼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왕위에 올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제임스 1세다.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보이고자 한 그녀의 애처로운 노력은 무참하게 짓밟힌다.

 

 

메리 스튜어트를 담당했던 형리는 동요한 채로 도끼를 치켜들었다. 최초의 일격은 목이 아니라 뒤통수에 떨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왕의 모습에 더욱 당황한 그는 두번재 시도에서는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다. 목덜미에 맞기는 했지만 피가 뿜어 나왔을 뿐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세번째에야 겨우 잘라낼 수 있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목을 벤 뒤에는 늘 그랬듯 그 머리칼을 움켜쥐고 높이 치켜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형리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머리칼인 줄 알았는데 실은 메리가 자신의 백발을 숨기기 위해 썼던 가발이었다. 가발을 움켜쥐었으니 머리는 바닥에 쿵 떨어지고 말았다. 그냥 떨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pp.18-19)

 

 

데.굴.데.굴. 작두를 포청천한테서 빌려오든가 하지, 도끼로 몇 번을 치는 거야, 대체. 초반에 저런 장면을 만나 상상력 지나친 나는 웩웩거리다가 읽는 도중에 못견디고 또는 전혀 관련없게 츠바이크가 쓴 평전 <메리 스튜어트>를 주문했다. 유럽역사는 실타래마냥 한군데만 툭 건드려도 줄줄 풀려나온다. 유럽 왕실 역사에 정통하거나 초집중 못하면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뒤얽힌 인물과 가문의 결합이다. 혈연관계로 뭉친 근친결합이 대부분이며, 주로 권력을 나누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한 사람이 두 번 이상 결혼하는 게 다반사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누가 누구와, 어떻게, 왜 결혼했는지 정도의 사연은 별 것 아니게 되어버린다. 죽었구나, 왕비 바뀌었네, 나라 넘어갔네, 어떻게 됐지, 하다가 이런 절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대체 결혼은 무엇이고 또 권력은 무엇인가!

 

 

 

메리 1세 (Mary I, 1542-1587)

 

 

엘리자베스보다 메리가 빼어나게 예뻤다고? 어디가? 어떻게? 왜? 아무리 미에 대한 관점이 달라도 그 시대 남자들 보는 눈들 참 거기서 거기다. 목소리, 교태, 지혜 같은 것들과 결합된 여자는 또 훨씬 다르긴 해도. 기록도 하나 없이 달랑 초상화 몇 점으로 남은 왕비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왕실의 그녀들이 그랬다면 아래의 여성들에 대한 대우나 처사가 어쨌을지 뻔하게 그려진다. 그림으로 남은 왕비라 하면,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합이 낳은 근친의 증거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첫 번째 아내이다.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필리프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녀의 어린시절을 속속들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요란한 가문의 결합사에 비해 독자적으로는 업적이나 일화가 거의 없던 그녀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하다고 잘난 것도 아니고, 잘났다고 유명한 것만도 아니며, 자기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우연과 운명에 의해 이름이 좌우될 수 있다.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1656)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다섯 챕터의 왕과 왕비의 연대기가 교묘하게 얽히는 지점을 포착하면 짜릿하다. 순차적 구성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 위아래, 옆을 오가다 마주치는 형식이라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를 들여다보기 위해 헨리 8세와 앤 불린, 카트린 드 메디치와 프랑소와 2세를 등장시키고, 관련된 모든 가문과 국가, 귀족과 대공, 왕실 가계도와 역사를 훑어내려간다.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독일, 러시아까지 뻗치고 뻗친 혈족결합의 여파가 어마어마해서, 왕비가 되길 손꼽아 기다렸거나 타고난 왕족도 있겠지만 시장에서 말이 선택되듯 줄지어 섰다가 뽑혀 왕실로 끌려들어간 여자들도 많다. 한 나라의 왕을 사랑과 지혜로 보살피고, 다음 왕을 낳아야 하는 역할이 주어지는 자리라고 해도 시대와 남자의 손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생을 거듭 감상하는 일이 씁쓸하고 애처롭기만 하다.

 

한 명의 왕에게도 수 명의 왕비가 있고 그로인한 자녀들이 무수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결혼시키고 대를 잇고 그러다보면 반복학습 없는 이상 하루 이상 뇌에 남겨지지 않는, 휘발성 강한 가계도가 그려진다. 안팎의 예외없이 국가 간, 왕실 간, 가문 간 피다툼이 날마다 벌어지는데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불안과 광기, 혼란과 환멸의 시대. 왕은 하룻밤의 욕망을 감추는 법이 없다. 왕비는 질투와 시기에 눈멀어 점점 더 잔인한 피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살아서 궁전을 나가거나 더이상 평범한 미래를 꿈꿀 수가 없다. 유폐와 죽음만이 기다린다. 이전의 왕비를 공식적으로 없애야만 자리를 채우기 위한 다음의 절차가 타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니 궁정에는 늘 음모와 복수를 위한 살기가 유령처럼 맴돈다.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대하는 습관으로 피의 역사는 쉼없이 되물림된다.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일랴 레핀, 1885년

 

 

러시아의 이반 뇌제는 숙청과 암살의 저주와 혼란 아래 세 살 즈음 대공의 자리에 오른다. 언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건 허울 뿐인 대공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대귀족들의 철저하고 알량한 계산 덕분이었다. 암살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비로소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신부 콘테스트에서 뽑힌 로마노프 가문의 아나스타샤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사랑의 힘은 광기의 발현조차 깊고 상냥하게 눌렀다.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지혜와 사랑으로 황제를 잘 다스려나간 드물게 현명한 왕비였던 것 같다. 사랑받는 여자가 걱정할 것은 거의 없다는 서글픔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원인불명의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저 잠깐 숨겨졌을 뿐인 광기가 폭발하면서 러시아를 공포정치의 소굴로 밀어넣는다. 바로 그 공포정치의 이반 뇌제 시대가 열린 것. 그후 아나스탸샤의 로마노프 가문은 러시아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데 시작이 황비 아나스타샤였던 셈이다.

 

여느 왕이 그런 것처럼 아들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던 이반 역시 제대로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황비를 무려 여섯 번이나 갈아치웠는데 이때 폭군의 눈을 피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눈 간 큰 황비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면 한낱 들판의 꽃을 꺾듯 독약을 들이키게 하고 매를 때리거나 버렸다. 황제의 잔혹한 광기와 여성편력은 그들이 단지 아름다운 장난감에 불과했음을 시사한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사랑한 아나스타샤가 낳은 이반이 왕조를 이을 것은 당연했다. 며느리 엘레나가 배가 불러온단 이유로 궁정의 관례에 따르지 않은 옷을 입었음을 알고 노발대발 지팡이를 휘두르다 손주를 유산시킨다. 아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반은 소중한 자식마저 지팡이를 휘둘러 때려죽인다. 러시아 리얼리즘의 아버지 일랴 레핀은 삼백 년이 지난 후 이 순간을 생생히 재현하는 작품을 그린다. 벨라스케스는 당대의 마르가리타 테레사를 그렸지만 일랴 레핀의 그림은 역사를 제3자의 눈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화폭으로 옮긴 것이다. 그로부터 130년이 더 흘렀지만 그와 우리가 이반 뇌제를 보는 시각은 아마도 같을 것이다.

 

 

 

당첨!

놓칠 뻔한 <영국사>를 펼치는 날이 온다면 온전히 이 책 덕분이다. 책의 운명에 대해 떠올리는 날이다. 쉽고 수월한 것에서 복잡하고 깊은 내용으로 넘어가는 게 지극히 당연하니까 그 책을 먼저 만났다면 이 책을 만나지는 못했겠지. 이와 반대의 일은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면서 그런 것들이 참 많다. 선택, 책임, 마음, 행동, 인연, 운명. 내것인데도 내맘대로 되는 게 드문 경우의 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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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6-2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두를 포청천한테서 빌려오든가 하지, 도끼로 몇 번을 치는 거야, 대체-이 부분에서 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어요, 아이리시스님! 이런 유머감각에 반했습니다. 종종 어떤 책은 그림 속 복식사에 관해, 어떤 책은 정물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더 포괄적인 것을 담고 있군요!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메리 스튜어트를 읽은 적 있는데, 츠바이크는 그것이 누구든 자신이 그리는 인물의 숨결까지 쥐락펴락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식, 관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정이 드러났어요. 아이리시스님이 읽으실 츠바이크를 기대해 봅니다.



덧-푸른 피를 지키기 위함과 동시에 사각턱도 사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헤헤..

아이리시스 2013-06-30 17:06   좋아요 0 | URL
으흠, 역시 작두는 짱이죠. 제가 포청천을 엄청 좋아해요, 작두가 아니고. 너무 안타까워요. 가발이 잡히고 데굴데굴 굴러간 게 고스란히 상상이 돼서 이건 정말 못할 짓 같아요ㅠ.ㅠ

죽음을 앞에 두고 장난치면 안되는데 나중에 후회했답니다. 하지만 이제와서 고치는 것도 이상하고 나름 유머였는데 히히히. 미안해요, 메리! (제가 이제 메리한테 사과해야 하나요.. 미안, 메리할머니!!!) 다만 죽임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표면적 초상화 구경에서 더 깊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건 제가 왕실 역사에 무지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메리 스튜어트는 판본이 마리 앙투와네트보다 한참 안예뻐서(응?) 또 어디갔는지 안보인답니다.. 해가 쨍쨍하지도 않은데 하루종일 계곡물에 발담그고 수박 먹는 상상하면서 앉아있어요. 해수욕장이 인산인해인데 오늘 가볼걸, 하루가 다갔네요. 자고 밥먹고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6월의 마지막날을 이렇게 보내나 봅니다..

쟌님은 주말 오후를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내일은 더 뜨거워져서 만나요! 7월이니까요.

2013-07-02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