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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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볼셰비키-멘셰비키는 물론 러시아혁명사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 아예 없기 때문에 러시아 작품은 늘 멀리했다. 학교 때 착실하게 다른 과 문학수업을 듣지도 못한 결과이다. 내가 애살이 있었다면 철학과 문학수업들을 욕심내거나 그때 이미 웬만한 인문학 고전에 도달해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남달리 게으르고 미친 것마냥 신경이 딴 데로 가 있어서 그러지 못한 게 후회로 남는다. 그래서 러시아 소설 한 권에 이런 힘든 과정을 겪는다. 푸슈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체호프,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 이후의 계보에나 낄 울리츠카야는 <소네치카>(1992)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세 편의 장편 중 2001년 러시아 부커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24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1990년 고르바초프의 냉전종식 정책으로 1991년 소련 해체. 1943년 태생인 그녀는 2차대전의 진행 중에 유년기를 보내면서 소비에트 체제하를 살았다.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의 고통이나 억압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강도높게 풍자되기도 하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소련 수용소 안 강제노동의 가혹함이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시대상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작가 울리츠카야의 작품에서 소비에트 체제 하의 가족이 살아가는 법이 등장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가정의 일상이나 행복 보다는 국가의 이념에 충성해야 하는 소비에트 시대에 자유와 도덕 불감증에 시달리며 자기들만의 이성적 논리와 감성적 도덕으로 이 사회를 살아나가는 이들의 눈물겹고 따뜻한 이야기이다.

 

반소비에트적 성향을 가진 아버지 파벨을 중심으로 아내 엘레나와 그녀의 어머니뻘 바실리사, 딸 타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표격인 청소부의 딸이자 타냐의 친구인 토마가 한집에 산다. 파벨과 엘레나의 만남, 파벨의 이념 혹은 신념, 톨스토이주의자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에 대한 엘레나의 회상, 바실리사의 이야기나 토마의 사연 등 한 지붕 아래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각자의 시각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훑는다. 멀티카메라기법의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회심리학적으로 인물을 고찰하는 생생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국가의 낙태금지법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 파벨인데, 자칫 생명경시로 이어질 법한 일인데도 불구, 파벨의 주장을 경청한다면 이내 생각이 바뀌다가 곧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노동자로 남편 없이 아이 셋을 키우다가 바로 그 임신 때문에 피흘리며 죽어간 토마의 엄마는, 국가의 부주의와 무책임을 대변하는 훌륭한 예다. 최소한의 비용과 책임으로 최대한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엄마를 잃음으로서 남은 아이 셋은 오갈곳 없는 고아신세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낙태금지법은 계급이 낮은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며 법을 고치기 위해 애쓴 파벨의 행동이 차츰 이해가 되었다. 엘레나는 남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결코 찬반론으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다. 낙태금지법에 인생이 저당잡히는 여자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누구나 윤리적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태를 권하거나 도우면 끌려가 고문 당하거나 죽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는 언제나 여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소설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윤리적 문제 중 다른 하나가 바로 자신의 딸이 아닌 타냐를 누구보다 예뻐하는 파벨의 부성이다. 타냐는 두 살 때 만난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안다. 친구 토마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게 한 것도 이런 아버지의 풍부한 사랑 덕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 악착같이 타냐의 가정에 순응하려는 토마를 보면 안쓰럽다. 어린시절의 가난했던 기억과 임신 중 죽은 엄마로 때문에 사랑과 출산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식물에만 애정과 관심을 쏟는 토마는 꿈보다는 현실안주형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소비에트 체제에 순응해야만 하는 힘없는 계급의 표본이다. 의식주를 획득하는 일은 타냐의 집에 머물러야만 해결할 수 있는 그녀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을 테니까. 수용과 잔류를 향한 악착같은 발버둥은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연구실에 들어오는 조교나 조수를 대상으로 반복되어 오던 간소프스키의 만행은 이 사회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심지어 타냐의 처녀성마저 위협하는 걸로 끝장판에 도달한다. 이후부터는 파벨과 엘레나, 타냐와 골드베르그 형제, 바실리사, 토마, 연주자 세르게이의 삶을 향해 질주하는 독서가 시작된다. 죽지 않으면 살아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까지. 가족의 진혼곡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자의 흔적과 산 자의 추억으로 가족의 연대는 계속된다.

 

억압과 불통으로 시대를 이어가던 소비에트 체제의 한 가족을 통해 울라츠카야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새로 정립시키려 한다. 핏줄로 얽히지 않아도, 아픈 가족을 돌보면서도 끝내 지키려 했던 가치.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애. 사랑과 보호를 통해 세상 어디보다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 잃지 말아야 할, 잊혀지지 않아야 할 가치를 굳건하게 품을 수 있도록 돕는 곳. 생명윤리와 낙태찬반론, 유전학에 대한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묘사는 놀랄 만큼 정연하다. 실험동물들을 죄책감 없이 죽이며 거기서 원하는 것을 얻는 연구과정에서 충격받은 타냐가 학위와 연구 활동을 그만두고 방황하는 장면에는 공감한다. 우성유전과 열성유전에 관한 이론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면역이 약해진 타나가 임신 중 감염으로 목숨을 잃은 후 파벨은 타냐의 딸 줴냐를 키운다. 파벨이 죽자 엘레나만 남는다. 줴냐가 아이를 낳는다. 세상은 묻지마 범죄가 성행하는 흉악한 도시가 된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는다. 모든 것이 운에 달린 사회는 불안하다. 자유와 도덕은 모든 시대 모든 세대에 통용되는 가치이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넓고 복잡한 소설이 아니라 좁고 깊은 소설인 듯하다. 가족 개개인의 삶을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그중에는 파벨의 내면투시나 엘레나의 꿈 속 세상 같은 이상적인 세계관도 보인다. 이들은 소비에트 시대를 벗어나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영유하는 자유로운 가족으로 탈바꿈해나간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가야 할 가치는 여전히 죽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억압과 불통으로 인해 자유와 도덕이 부재하는 사회에서 가족이 가져야 할 의미에 대해 이토록 열정적으로 그려내는 작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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