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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차백만 옮김 / 미래의창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사실상 반복보다 더한 강요는 없다. 강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단순의견을 반복적으로 피력할 때에도 같은 의견을 가지지 않은 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폭력과 억압으로 변한다. 목소리가 크다고, 다수라고, 옳은 건 아니라는 것. 히친스는 '반대파'가 언제나 소수이며, 개인의 올바른 의견이 다수의 그럴 듯한 의견보다 힘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경제, 사회, 종교, 국제 분야로까지 영역을 확장시키며 온갖 분야의 다른 사고방식을 훑으며 당당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질을 젊음이 가진 하나의 특권으로 인식시키려 한다. 그런 점에서 히친스의 주장은 다소 급진적이며 때로 폭력적이다. 히친스는 도킨스, 촘스키와 함께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 5위 안에 들면서 그의 급진적 사상 또한 관철시켰다. 철저한 무신론자이며 <자비를 팔다>에서 이 시대의 성녀 테레사 수녀를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한 인격비방이 아닌 사회복지와 종교적 차원에서의 그것이다. 이런 급진성은 더욱 뚜렷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불일치가 불러오는 독창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껄끄럽거나 위험하다.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밍밍하게 묻어가려는, 시대에 편입하지도 시대를 비판하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일침이기도 하다. 열여덟통의 편지는 '다른'입장, '다른'반대, '다른'의견을 통해 이 시대를 말하고 있다. 출간과 번역의 시차가 있지만 어색하지 않다.
"나는 나가지 않겠소. 당신들에겐 나를 석방할 힘이 없소. 나를 석방해서 당신들이 이득을 볼 권한은 더더구나 없소. 나는 다른 모든 이들이 석방됐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리고 모든 폭압적인 법이 폐지됐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이곳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거요."
그 순간, 과연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분명했네. (그리고 그전까지 전 세계 정부들은 이 인종차별주의 정권강탈자들이 노략질한 권력을 유지하고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온갖 터무니없는 외교적 타협안을 제안해왔다네.) (p.151)
27년간이나 자신을 가뒀던 권력자들의 방문을 받았을 때 그들로부터 내려온 자유를 거부하며 넬슨 만델라가 한 말이다. 이어지는 권력의 맛. 감시하고 탄압하고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선동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일. 시몬 베유는 정의는 원래 '승자의 진영에서 도망치기 마련'이라고 했고,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다수 좌파, 진보 진영이 언제나 소수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지도 모른다. 마틴 루터 킹 박사는 암살되기 전날 밤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를 떨치기 위해 에로스 즉 성적 본능에 골몰해 꽤 추잡한 혼외정사를 벌였고, 이는 생식기 달린 포유동물은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본능적 행위를 인정하면서 영웅적 인물의 인간화(세속화)를 보여준다.
카뮈는 조국 알제리가 부당한 식민체제에 맞서 전쟁을 벌이자 고민에 빠졌지. 즉, 반란군들이 무작위로 폭탄테러를 벌이는 과정에서 식민군 병사들이 죽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쉽게 자신의 늙은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야. 결국 카뮈는 만약 자신이 정의와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머니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네. (pp.160-161)
누구나 빠져들 수 있는 덫, 양날의 검, 개인인가 단체인가 등의 선택권에서 카뮈조차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예로 들며 선택과 저항, 반대의 주체성을 스스로 획득하기를 촉구한다. 양심과 도덕기준. 개인과 역사. 흐르고 변하는 일련의 시간들 앞에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히친스는 이렇게 고한다.
자네는 과거의 불행하고 불평등하며 비이성적인 상황에 도전했던 이들의 힘겨운 투쟁을 결코 잊어선 안 되네. 나아가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하네. 즉, 무리나 파벌이 제 아무리 뛰어난 사상을 지니고 있더라도 결코 그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선 안 되네. 자기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걸세. 자신 있게 '우리'를 내세우거나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는 이들을 결코 신뢰해선 안 되네. 만약 이런 목소리가 자네 생각에서도 발견된다면 자네 자신부터 의심하게. 다수로부터 오는 안정감과 소속감이 늘 연대와 동의어는 아닐세. 오히려 그건 합의와 압제, 그리고 동종의식이라고 할 수 있네. '다수'를 언급하거나 '민중'을 칭송할 때도 이런 무리는 결국 개인으로 구성된다는 걸 절대 잊지 말게. (pp.165-166)
최근 MBC <아마존의 눈물>의 주인공 야노마미족의 몰살은 브라질에 만연한 불법 금 채굴업자의 만행과 이를 묵인한 브라질 정부의 합동작전으로 행해졌다. 단 세 사람만이 학살이 자행된 시간 사냥을 나갔다 변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종족과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우리가 해줄 말은, 위로는, 더 보여줄 인간으로서의 도덕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에 대해 히친스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물론 원주민 학살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금이나 광산 채굴로 인해 멸종된 종족이 야노마미 원주민 뿐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TV로 만난, 그 정답고 해맑은 이들의 터전이 이제 없다는 사실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가슴 저리게 슬프다.
쿤데라의 <농담>에 나오는 주인공은 트로츠키에 관한 농담 한 번 잘못했다가 평생 그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저주에 휩싸인다. 어떤 시대는 어떤 말로도 해명하기 힘든 시간이 존재하는 법이다. 졸라가 타협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할 때, 오스카 와일드는 반대로 했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히친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손을 든다. 사르트르가 반항아는 내심 세상과 체제가 지금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반면, 혁명가는 진정으로 현재 상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길 원한다고 구분짓는다. 또한 촌철살인과 위트는 급진주의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손꼽힌다. 키신저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두고 '이보다 더한 코미디는 없다'며 가수를 그만 둔 톰 레러, 1992년 당시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이 대통령 경선에서 유약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정신지체인 흑인 리키 레이 렉터라는 사형수의 사형을 명한 일, 이 잔혹한 행위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침묵, 장시간의 지루함과 간헐적인 공포로 이루어진 전쟁을 급진주의자의 삶과 동일시한 것, 확신과 경험으로 실제 움직여야만 이뤄낼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미미할 수도 있는 반대파의 삶. 많은 사례들이 함께 한다.
시사와 논점이 분야/쟁점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박식함 덕에 250쪽 남짓한 이 책을 보름 가까이 붙잡고 있었다. 그래봐야 밑바닥 뚫린 독서력만 확인한 셈이지만, 시야와 관심사를 더 넓혀야 한다는 것과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라는 자신감 그리고 행동과 실천의 중요성을 촉구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세상과 시사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관심 가지는 정도는 얼만큼인가. 히친스가 기준이라면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신이 정의롭다는 걸 상기할 때마다 내 조국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워서 몸이 떨린다." (p.103)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의 원죄에 대해 한탄한 말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국제사회 아니 이 사회만 봐도 늘 의문에 의문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던 조지 오웰의 말을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