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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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읽는데 이야기가 쓸쓸했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침묵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별어곡(別於谷).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뜻의 간이역이 이 애잔하고 고독한 소설의 배경이다. 아주 작은 기차역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시점까지 내가 '낭만'이라고 믿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혼자 훌쩍 기차를 타고 날이 저물어 가길래 아무데서나 내렸는데 그곳이 하필 하루에 기차가 두세 대 정도 들어오는 작은 역이었던 거다. 산골 작은 마을에서는 즐길 거리가 전무하기 때문에 나는 마을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다 오늘밤 여기 묵어야 하나 막차를 타고 떠나야 하나를 고민하며 간이역 한 모퉁이 의자에 앉아있다. 여전히 목적지는 없고, 역시 혼자다. 그 때 나처럼 그 마을에 우연히 오게 된 낯선 이가 말을 건네온다. "혼자세요?" 그리고 내가 대답한다. "혼자가 편할 것 같았거든요. 여기에 오려고 한 건 아닌데 우연히 오게 됐어요." 그러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믿는 우연같은 인연이. 

시인을 꿈꾸는 동수는 간이역에 배치된 이들 중 가장 막내 역무원이다. 소설은 가을, 여름, 겨울, 봄 순으로 역행하며 동수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이 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 이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새롭고 크고 깨끗한 곳으로 옮겨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동수 또한 아무 것과도 아무 것에도 무언가를 건네주거나 건네받고 싶은 마음이 들 리 없다. 애정있게 다가오던 빨강머리 아가씨의 마지막 전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녀의 죽음을 대했을 때 그가 느낀 좌절과 절망은 단지 그의 것만이 아닌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가 된다. 쳇바퀴 같은 삶을 감내하는 간이역에도 비밀스런 규칙성이 있다. 그들을 이어주는 끈은 놀랍게도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비극의 상처를 품고 있는 이들이 한데 모인 장소가 하필이면 별어곡(別於谷)이었던 것이다.  

동수는 얼굴 모르는 아버지를 평생 그리워하며 산다. 상대적으로 젊은 20대 청년이지만 강원도 산골 마을까지 흘러들어오게 한 힘 또한 가슴 한켠에 박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또, 평생을 철도 공무원으로 살았던 동수의 선배 신태묵은 과거 어느 날 자신의 실수로 철도에 선 사람 목숨을 빼앗는다. 병원에 가서 숨어서 보았던 죽은 이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고 그 딸을 자신의 딸로 삼지만, 사랑이 깊고 행복에 겨웠던 만큼 그는 쉽사리 과거의 실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어린 시절 피난길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그의 아내사랑은 지극했지만 자신의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면서도 늘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이는 아내를 그는 견딜 수 없다. 마침내 손찌검하고 윽박지른다. 아내는 과거의 일을 알게 되면서 죄책감과 수치심에 자살을 선택하고 남겨진 그녀의 딸은,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한다. 그를 원망하며 도망친 의붓딸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위를 통해 보살펴온 그 역시 이젠 늙은 피해자다. 고독하고 상처입은 삶을 감내해내야 했던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이다. 

간이역에 날마다 순례 할머니가 찾아온다. 매일 어디론가 가겠다고 나와 오랫동안 앉아있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간다. 그 날 동수는 순례 할머니를 모셔다드리러 갔다가 할머니의 조카를 통해 삶을 듣게 된다. 그건 그냥 삶이 아니었다. 순례 할머니의 삶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자 그녀는 역사의 산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 위안부에 끌려간 피해자였다. 어쩌면 찢어지게 가난한 식구들 때문에 어머니 손에 팔아넘겨졌는지도 몰랐다. 취직을 시켜주고 먹고 자게 해주겠다는 말에 집을 나섰다. 스스로 나섰지만 그건 혼자의 선택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할머니는 그 예쁜 시절을 전부 희생당했다. 그건 희생 당했다는 표현으로는 설명 안되는 것이다. 삶을 송두리 채 저당잡히는 것, 늘 떠나고 싶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몸과 마음을 모두 짓밟은 일본의 더러운 욕망을 여기서 말로 다하는 것은 너무 분하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비로소 할머니는 지옥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때도 한없이 예쁜 청춘의 나이였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함께 있던 친구나 언니는 죽거나 죽어가거나 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살아있었기에 살았다. 사랑해주는 누군가를 만나 살림을 차리기도 했지만 자식 하나 없이 남겨진 채 먼 훗날 조카를 만난 것이다. 끔찍한 세월이 지난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었다. 모두 희생당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늘 어디론가 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별어곡(別於谷) 역에 온다.  

또 하나의 이름모를 여인은 어느 날 빵집을 열겠다며 마을에 흘러 들어왔다. 기차가 서는 역이라고는 하지만 내리고 타는 이가 다섯도 되지 않는, 누가 살고 죽는지 빤한 시골 동네에 서양식 빵집을 열겠다는 여자를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빵집에서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며 시를 쓰면서 그녀와 인연을 맺게 된 동수에게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사연은 동수가 알고 있는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야기다. 안경 쓴 말라깽이 빵집 여자는 자신의 어린시절 얘기를 한다. 장교 아버지를 따라 전방에 있는 마을에서 탈영한 아저씨를 만난 이야기를. 그가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부탁한 편지와 못 본 걸로 해달라는 말을. 온 부대가 산과 마을을 점령하여 이 잡듯 뒤지고 있었고 유일한 목격자였던 여자 아이는 겁에 질려 그의 행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을 떠뜨린다. 그는 잡혔고, 스스로 죽었다. 당시 그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는데 여자는 그 아들이 동수라고 확신한 것이다. 어머니를 묻고 돌아온 그에게 그녀가 읽어준 편지는 꿈결처럼 희미하게 남았지만 다음 날 그녀는 이미 마을을 떠나고 없다. 

여자 둘 남자 둘, 합이 넷. 우연이든 필연이든 각자의 사연을 들고 별어곡(別於谷)에 흘러든 이들의 사연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희미하고도 또렷한 생채기를 내며 끝맺는다. 그들의 삶이 앞으로 행복해질거라고도 불행해질거라고도 여전히 같을 거라고도 예상할 수 없다. 삶은 예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처를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를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스스로의 상처를 이 작은 간이역 마을 별어곡(別於谷)에 와서 토해내고 또 위안하고 또 견디고 있는 이들의 삶을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보여주며 인간의 고독과 애처로움을 말하고 있는 <이별하는 골짜기>는 특별하다. 순례 할머니가 겪은 한국전쟁의 상흔은 잊혀져가는 비극인 동시에 서글픈 역사라서 돌이키기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알게 된 것이 다행이다. 일본의 잔인한 만행이나 우리나라의 국가적 비극을 뒤로하고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잊어도 되는, 잊어야 하는, 용서해야 하는 뭐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더란 말이다. 동시에 이 소설은 별어곡(別於谷), 즉 사라져간 간이역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하루에 몇 번 기차가 서고 몇 명의 역무원이 근무하다 무인역이 되고 또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은 일제시대, 한국전쟁, 민주화를 거쳐오는 것 만큼이나 역사적이다.  

작가는 잊혀지는 것들을 되살리려 애썼다. 나름의 상처를 가진 주인공들을 한데 모이게 하면서 그들로부터 현대에선 찾기 드문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유도했다. 20대 청년 동수에게는 그리운 아버지가, 신태묵 아저씨에게는 빚을 진 양딸이, 순례 할머니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고향땅이, 빵집 여자에게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탈영군인의 아들이 인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평생 그 숙제를 풀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살아있는 한 반드시 끝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듯 자세히 하지만 무심하게 그려내면서 우리에게 묻는다. 삶이란 어떤 것이냐고. 이런 삶이 오히려 삶이라고. 동수는 나비를 본다. 동수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소설이지만 그의 시선이 곧 우리 시선이기도 해서 지극히 개인사가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는 개연성과 정당성을 획득한다. 나비는 무엇을 상징하는 거였을까. 상처가 짊어짐이라면 짊어진 아픔을 내려놓고 사뿐히 날아가고 싶었던 주인공들의 소원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팠으니까 보상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삶에는 통하지 않는다. 다소 상대적이기는 하나 모두가 나름의 아픔을 하나씩은 품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타고난 것도, 그런 일이 생긴 것도, 그래야 했던 것도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의외로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니 살아있는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태어난 이유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극으로 얼룩진 상처가 빛이 되길 바라지만 순례 할머니나 신태묵 아저씨에게 어떻게 그렇게 되실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듯,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당신들이 좀 더 희생해야 했던 것, 그런 것이 인생이 아닐까 하고 말할 수밖에. 애잔하고 서글프고 눅눅하고 아픈 이야기라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안에서 해결책을 구하거나 위로를 건네는 것이 나같이 미천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도 아닐 것이다. 타인의 아픔에도 조금 마음을 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라진다 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기억하라는 뜻으로도. 순례 할머니가 역사인 것처럼 별어곡(別於谷)의 사라짐 또한 역사일 것이다. 서울-부산 거리가 2시간 10분대로 좁혀지고 세상에 못갈 곳이 없는 것마냥 빠르고 편리한 세상인 듯 보이지만 그 사이에서 사라져 가는 안타까운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편리함에 눈멀어 정작 오래되고 소중한 가치들을 잃게 될까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그래서인지 속도는 빨라지고 가격은 치솟은 고속열차는 물론이고, 변해가는 것들에 쉽게 적응하는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점점 그리움이란 감정마저 소모되는 것 같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했고 그 대사는 엄청난 화제가 되었었다. 변해서 겁나는 건 비단 사랑 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사라져가는 간이역에 가봐야겠다. 인연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이역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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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31 2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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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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