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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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내가 아직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 곧 다가올 20대가 가져다 줄 찬란한 자유를 동경하며 읽었던 <깊은 슬픔>의 세 주인공 은서와 완과 세를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 작가 스스로 청춘소설이라 칭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웬만해선 거부하기 힘든 반가운 선물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기사와 서평을 뱉어놓는 소위 ‘누구나 다 읽는’ 베스트셀러에 지레 거부감이 들만도 한데 마음과는 반대로 정신없이 읽어 내려간 지 사흘째,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한참을 앉아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상에 뛰어들던 바로 그 날부터 누구도 몰랐겠지만 청춘이라는 실체 없는 이름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끝없는 고민들이 이어졌다. 책을 읽은 후 따라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심한 방황과 여름날의 열병이 혼자서만 좋았다.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절망스러웠지만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은 과거가 되어버린 윤과 명서의 현재보다 있는 힘껏 사랑하고 아파하다 스스로 소멸한 단이와 미루의 빛나는 현재가 더 부럽기까지 했다. 거기에 비하면 현재 내 청춘은 얼마나 보잘 것 없이 흘러가는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비겁한 나지만 그들처럼 예쁜 청춘으로 기억되고 싶은 소망까지 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훗날 나의 찬란한 청춘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다.  

언젠가 계절이 겨울 뿐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했다. 저마다의 축축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거나 스스로를 가둬놓고 우울해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의 청춘은 온통 겨울 뿐인 것 같은데도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을 보면. 나의 청춘은 그들과 많이 다르다. ‘나’를 고민하며 캠퍼스와 거리를 배회하지 않았고, 세상과의 소통에 특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강의실이나 도서관은 학점과 토익에 열 올리는, 미래를 아주 잘 설계하고 있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나’들로만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의실 아니면 거리를 헤매야 할 만큼 갈 곳이 없지 않았고, 강의 첫날부터 크리스토프를 얘기하는 윤교수 같은 스승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을 정도의 자유는 언제나 주어졌었기 때문이다. 그걸 누리고 말고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시대가 아니라 청춘이라면 윤과 단이 그리고 명서와 미루의 절망과 허무, 얼마 정도의 희망이 단지 그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해 비틀거리고, 세상을 다 짊어진 것 마냥 우울을 가장하는 것은. 단지 과거에는 책과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다면 지금은 술로 모든 고민을 그저 제쳐두는 것 뿐. 지금의 청춘과 과거의 청춘, 딱 그만큼의 차이가 아닐까. 신경숙의 소설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동시에 지나친 감상주의로 치부하고 마는 것도 어쩌면 자신의 내면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후회스런 시간들에 대한 후유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한 몸처럼 지냈지만 대학에 가게 되면서 떨어진 윤과 단이. 외동딸이면서 엄마를 잃은 윤은 낯선 도시에서 늘 외롭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한다. 사람은 어디서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는 법일까. 윤교수의 강의에서 자신과 단이 같은 명서와 미루를 만나면서 질투, 시기가 뒤섞인 호기심을 품은 것이 인연의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이렇게 힘들었나 싶을 만큼 그들은 어렵게 서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함께하는 순간이 평생을 지탱하게 될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줄을 모른 채.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 자신보다 상대를 더 잘 알 것 같은 두 쌍의 커플. 사랑은 어렴풋하고 행복은 짧은 대신 이별은 아프고 길기만 하다. 윤을 향한 단이의 사랑은 옅게 그려졌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해서 단이의 죽음이 그저 에피소드일 수 없었다. 윤에게 단이는 자신의 전부이자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미루의 아픔은 또 어떤가. 언니를 향한 죄책감에 눌려 살아있는 내내 제대로 숨 한 번 쉬지 못했을 미루는 홀연히 사라진 끝에 끝내 세상과 이별을 고하지만 윤에게 있어 단이와 마찬가지로 명서에게 미루 또한 절대로 잊힐 수 없다. 남겨진 이는 사라진 이를 영원히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형벌이 주어지는 것일까. 이들의 청춘은 왜 이토록 아프기만 할까. 행복의 순간이 지나면 그 행복을 각인시키려는 듯 어느새 불행이 찾아온다. 둘의 농도가 같다면 어째서 행복의 순간보다 절망의 순간이 더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일까.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절망을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청춘의 찬란함이 반드시 절망에서만 오는 이유는.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내가 소설로 며칠 밤을 새워가며 아파하는 것이, 갖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매일 밤 기도하는 것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 날아오르기를 시도하는 것이 청춘이었으면 좋겠다. 삶을 차곡차곡 살아낼 수 있는 날들이 줄어드는 만큼 내 청춘 또한 빛바래져가겠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추억할거리가 아주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희망이 됐든 절망이 됐든 추억의 농도가 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윤은 오랫동안 단이의 편지에 답장하지 못하다가 단이의 죽음 후 6개월 만에 예전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 미루가 식단을 기록하던 노트가 치열한 삶에 대한 미루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처럼 단이에게는 윤이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미루의 상처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명서의 마음이 훨씬 더 아팠을 것이다. 면회 온 윤을 안으려다 거절당한 후 단이의 절망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네 사람의 찬란한 시절을 지켜봤던 윤교수는 그들의 청춘을 사진 찍듯 그려낼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을지도. 팔 년 만에 걸려온 명서의 전화, 용건 또한 윤교수였다. 윤교수는 그들 모두였다. 각각 반쪽을 잃고 남겨진 윤과 명서가 서로를 품지 못한 채 헤어져야 했던 날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함께 있으면서 상처를 아물게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고작 팔 년이면 희미해질 시간들인데도 불구하고. 한 때 죽음을 생각할 만큼 전부였는데도 시간이 흐르면 흐릿해지는 것이 슬펐다. 살아가는 것은 물 흐르는 것처럼 순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억울하다. 치열한 이 순간도, 전부라 믿는 이 시간들도 언젠가 허깨비처럼 사라질 거라는 사실이 두렵다. 그래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읽히는 것이다. 하지만 아픔을 조금이나마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되면 청춘을 좀 더 경쾌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선 누군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로 한다.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기로 한다. 때론 그저 견디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해보려고 한다. 인생에서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비단 청춘만 소중한 것이 아닐 테니 청춘이라 해서 과시할 것도 없다. 자신에게 소중하게 기억되는 순간이 바로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는 에밀리였다. 읽는 내내 애정을 쏟았는데 책을 덮은 후에도 고양이 에밀리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주인공들의 상처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에밀리. 다른 인물들은 아쉬운 대로 그저 가만히 묻어둘 수 있겠는데 에밀리는 어디선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하다못해 윤교수를 찾아가 왜 미루를 그대로 두었느냐고, 윤을 찾아가 단이를 왜 절망시켰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참겠는데, 에밀리를 보고 싶은 마음은 날이 지날수록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 아마 모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 시절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에밀리라서 그런가 보다. 소리를 듣지 못해서 온 세상을 자기 것으로만 채웠을 에밀리의 눈 속에 사랑스러웠던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가 모두 들어있을 것 같아서 그런가 보다. 에밀리에게 그들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미루의 언니가 사랑했던 그 사람과 단이의 억울한 사연을 사랑스러운 에밀리는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어깨에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을 하나 얹은 것처럼 몸이 무겁고 가슴이 아려온다. 늘 “내가 그쪽으로 갈까.”라는 말보다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더 많이 하며 지냈던 날들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무엇보다 “오늘을 잊지 말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가 함께 지냈던 며칠처럼 온전히 반짝이는 청춘을 지내고 싶다. 오래도록 잊혀질리 없겠지만 이제 그만 보내주려 한다. 결핍은 내 사전에 없다. 아련하고 예쁘게 기억되는 청춘을 보내고 싶지만 나는 다만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세상에만 살고 싶다. 그렇게만 마음을 주고받으며 이 혼란한 시간들을 걸어 나가고 싶다. 남자와 여자, 친구와 가족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만은 명확한 아날로그식 청춘의 사랑법을 닮고 싶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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