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왜 자신이 재가자라고 생각합니까? 비록 그대가 출가수행자로 나선다 해도, 내가 출가자다 하는 생각이 그대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계속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든, 가정을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든, 그대의 마음은 그대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에고가 생각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육체와 이 세상을 만들어 내고, 그대로 하여금 자신이 재가자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대가 출가를 한다 해도 재가라는 생각이 출가라는 생각으로, 가정이라는 환경이 숲 속이라는 환경으로 바뀔 뿐입니다. 마음의 장애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고, 그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습니다.......유일한 장애물은 마음인데, 집에 있든 숲 속에 있든 그대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만약 숲 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집에서라고 왜 못하겠습니까?......그대는 바로 지금 노력할 수 있습니다. -17쪽
진실로 그대가 비참해 하거나 불행을 느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무한한 존재라는 그대의 참된 성품에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다음, 그대가 하나의 유한한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런 저런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고 전제하고 수행한다면, 그 수행이 그대로 하여금 그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80쪽
문: 에고를 가지고 시작하는 탐구를 통해 어떻게 에고 자신이 실재하지 않음을 밝혀낼 수 있습니까? 답: 아상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뛰어들면, 에고의 현상적인 존재는 초월됩니다. . . '나'다 또는 '내가 있다'하는 관념은 언어 상으로는 아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마음의 다른 상들과 같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간에 본질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마음의 다른 상들과는 달리 아상은 마음의 각 상들과, 똑같이 그리고 본질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아상 없이는 다른 어떤 상도 존재할 수 없지만, 아상은 다른 어떤 마음의 상에도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존속할 수 있습니다. ......... 아상의 근원을 탐색하는 것은 단순히 에고의 여러 형태들 중 어느 한 가지만의 뿌리는 찾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다'는 것이 일어나는 근원 그 자체를 찾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아상의 형태를 갖는 에고의 근원을 찾아내어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에고를 다 초월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118-120쪽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깨달음은 공부인들 간에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 자체가 장애물입니다. 이 장애물로부터도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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