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밑줄긋기를 하다보니 밑줄 그은 게 모두 세 번째 이야기다. 나머지 얘기를 배경으로 두고 나는 영혜의 언니를 보고 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말을 천천히 가라앉히며 책을 덮는다. 말할 수 없거나 말하기 싫은 것은 할 말이 있다는 말 같다. 나는 누구에게 할 말이 있는 걸까. 특히나 말이 없는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걸어본다.

p.161 당신은 나에게 과분해.
결혼 전에 그는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그런 게 감동을 줘.

p.166 막을 수는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p.169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p.175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약한 마음 먹지 마. 어차피 네가 지고 갈 수 없는 짐이야.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아. 이만큼 버티는 것도 잘하고 있는 거야.

p.190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도 날 이해 못해...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p.191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p.214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p.221 ...이건 말이야.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영혜에게 속삭인다. 덜컹, 도로가 파인 자리를 지나며 차체가 흔들린다. 그녀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영혜의 어깨를 붙든다.
...어쩌면 꿈인지 몰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