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자유 그리고 홀로서기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청아출판사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은 어렵다. 사람마다 다른 사랑을 꿈꾼다. 연애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까? 일반적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어떤 것이 사랑이고 어떤 것이 집착인지 라즈니쉬의 제자들은 묻는다. 그는 일단 사랑하라고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대신 깨어있기 위해 애쓰라고 말한다.

깨어있는 것은 그의 말대로라면 주시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물을, 모든 것을 주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라즈니쉬가 말하는 명상이다. 주시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묵과 홀로있음을 동반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자신을, 존재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의 말로는 결국 집착과 쓸모없는 문제들을 일으키는 것이다. 존재란 조건없음이다. 그러나 누가 조건없음에 당당하겠는가? 라즈니쉬는 홀로있을 수 있는 자라고 대답한다. 홀로있음에 즐겁다면 그는 존재에 다가간 것이다.

나는 혼잣말을 잘 한다.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가 않다. 쉬임없이 중얼댄다. 이것은 홀로있음이 아니다. 내부에 다른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은 홀로있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주시할 수만 있을 때 존재를 느낄 수 있다.

홀로있을 수 있는 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공자가 안회를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不遷怒)' 제자라고 했는데, 아마도 안회는 이미 홀로서기를 한 사람이리라. 홀로있음이 두려운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관계를 맺고 문제를 일으켜 옮기며, 기꺼이 자유를 희생시킨다. 필요없는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사람들이 어렵게 얻은 자유를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에게 바칠 수 있게 하는 것은 '소외'될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고요히 있는 것이 또한 두려워 문제를 일으킨다. 문제나 염려가 관계를 결속시킨다고 여기는 것일까? 결혼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결혼을 하면 사람들은 왜 아이를 갖지 않느냐고 묻는다. 마치 그 모든 것이 무슨 문제나 되는 것처럼.

예수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요한15:11) 한다고 하였다. 관계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홀로있음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홀로서기 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랑(관계)할 수 있으며, 그 관계는 서로를 자유롭게 한다. 사랑이나 자유나 홀로서기와 같은 단어는 선망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가 문제 삼는 문제들을 사라지게 하는 존재의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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