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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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저는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행동일 겁니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도 조화로운 음색을 냅니다."라고 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정신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나는 바닥에 앉아 잠들 때까지 그대로 있고 싶었다. 그러면서 눈 위에 뭔가를 써보기로 했다. 여기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내 시에도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기를 바랐다. 나는 눈 속에서 힘겹게 걸음을 옮겼지만 사실은 거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크리스마스 이아기> - P24

게으름뱅이라고 오해받는 덕분에 획득한 부족한 존경심을 나는 즐긴다.<헬블링 이야기> - P29

특히 퇴근시간에 모자를 집어서 정수리에 살그머니 얹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차고 기쁘다. 그것은 매일의 일과가 종결되는,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순간이다. 내 삶은 지극히 작고 사소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항상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기이하고 놀랍다. 인류의 운명과 관련한 위대한 이상을 추종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 본성은 추종보다는 비판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일은 나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헬블링 이야기> - P37

내가 나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내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말입니까?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행동일 겁니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나에게 만족합니다. 그러면 나를 둘러싼 세상 전체도 조화로운 음색을 냅니다.<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 P74

이미 당신에게 밝혔듯이, 나는 전적으로 편한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그런 일을 상관하지 않는 삶을 원합니다.<한 시인이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 P75

진정한 시인은 먼지를 선호한다. 다들 잘 알다시피, 가장 위대한 시인이 소망하는 자리는 매혹적인 망각과 먼지 속이기 때문이다.<시인들> - P100

그렇게 흙과 대기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구슬프고도 불가피하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갇힌 가련한 죄수로구나, 이런 식으로 모든 인간은 결국 다들 마찬가지로 가련하게 갇힌 존재일 수밖에 없구나, 우리 모두의 앞에 놓인 것은 오직 한 가지 길, 흙 속의 구멍으로 들어가서 눕는 길뿐,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무덤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달리 방법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산책>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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