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지도 모르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졸아본 적 있어? 나는 졸고 있어. 커피를 더 마시기에도, 잠을 자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야. 잠을 깨려고 자판을 두드려. 곧 저녁이 오고, 나는 저녁에 할 일이 있거든. 그리고 잠들 수 없는 밤은 너무 많은 것을 데려와 놀자고 해. 그게 놀자고 하는 걸까?

 

그저께 자다 일어났는데 갑자기 기억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거야. 어릴 때 다리를 건너고 싶은데 겁이 나서 다리 앞에서 번번이 돌아섰어. 학교가 다리 너머에 있어서 입학하면서 그 다리를 건넜어. 오빠가 오빠 친구와 나란히 걸으면 나는 몇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어. 오빠 가방만 쳐다보면서. 아버지가 양복을 입는 거야. 배에 복수가 찼는데도 양복이 맞네. 달성공원에 가자고 하시더니 양복을 입은 채 앉아 있다가 그냥 벗으시는 거야. 그런 기억들이 화산재처럼 나를 덮었어.

 

근데 기슭아, 그건 내 기억 속에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게 내 기억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앞서 가던 오빠가 자기 가방을 볼 수도 없는 거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증명해줄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게 꿈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엄마 등에 업혀 있는데 엄마가 머리에 이고 가던 달걀을 쏟아 다 깨버린 장면이 가끔 떠올랐어. 얘기했더니 엄마가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대. 내가 돌 지나기 전에. 오랫동안 난 그걸 꿈이라고 생각했어. 그게 꿈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을까.

 

모두 혼잣말이야. 기억도 꿈도 어쩌면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들도. 요즘 이야기할 때 그런 느낌이 들어. 혼잣말 같은. 친구는 친구 혼자 말하고, 나는 나대로 말하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어. 모르는 게 이것뿐이겠어. 그래도 졸음은 다 사라졌네.

 

햇볕은 좀 진해졌는데 아직 바람은 선선해. 여름이 오려면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올여름이 무척 더울 거라고 해. 예보가 틀렸으면 좋겠어.

 

 

 

나무를 모르는 나무

_황성희

 

 

바람이 몹시 분다.

이름도 모르는 벌판에서

나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무로 살았다.

 

저 멀리 벌판 끝으로

눈물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들이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반짝반짝 글썽인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무는 생각하는 법도 모르면서

제목도 모르는 책 앞에서 턱을 괸다.

 

위층 어딘가에서

웅얼웅얼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곧 익숙해질 거야.

살아서 잠드는 일에 대해

살아서 깨어나는 일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벌판의 낯선 태양과

살아서 마주치는 일에 대해.

 

바람이 몹시 분다.

바람이 뭔지도 모르면서

두려움 없이 바람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무로 살아온 것처럼.

 

눈동자들은 벌판의 끝으로 굴러가 있고

눈물의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만

반짝반짝 글썽인다.

 

-황성희, 앨리스네 집(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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