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댐

 

 

어제 아이들과 5.18에 관한 프로그램을 봤어. 아이들은 전두환이 왜 감옥에 있지 않은지, 감옥에 잠시 다녀왔다고 하니까 왜 벌써 나왔는지 물어. 건성건성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화면에 너무 끔찍한 장면이 나오질 않기를 바라고 있었어.

 

주말에 청도에 있는 시골집에 다녀왔어. 가는 길에 가창댐이 있어.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댐의 물이 가득했어. 맑기도 맑아. 작년에 이하석 시인의 시, ‘가창댐을 읽고서야 이 지역이 수몰 이전에 학살 터였다는 걸 알게 됐어. 알고 보면 살처분된 곳이고, 알고 보면 학살 터인 곳이 여기뿐이겠어.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가창댐이 학살 터라고 말하지 않았어. 아직은 그냥 맑고 맑은 물로 봤으면 좋겠어. 저 물이 무고한 만여 명의 피를 걸러 만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면 너무 빨리 어른이 될 것 같아.

 

나무에서 떨어진 호랑이의 피로 수수가 붉은 수수가 되고,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는 옛날이야기처럼 시간이 흐르면 죽음도 동화가 될 수 있을까. 호랑이가 더 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는 시간이 되어야 호랑이 이야기가 전래동화가 되듯 학살이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사라져야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학살 현장에 있었던 사람과 그 가족이 살아 있고, 세계 도처에 아직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 동화가 되기엔 너무 날카로워. 누구나 찔리게 돼. 아프게 돼. 그러나 우리 아이들도 알게 되겠지. 알아야 되겠지. 슬픔과 분노가 흙 속에 물속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걸, 그러면 안 된다는 걸, 그럴 수 없다는 걸.

 

나탈리 포르티에의 릴리의 눈물 이야기(어린이작가정신, 2006)가 생각나. 릴리는 분실물 보관소에서 일하고 있어. 보관소에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분실물이 있어. 눈물이 든 물병들이야. 릴리는 바닷가로 가서 달빛 아래 눈물을 바다에 흘려보내. 다음날 휴가를 온 사람들은 밤새 바닷물이 불어나 수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지. 눈물이 웃음을 가져다주었어.

 

눈물이 담긴 물병이 은폐된 혹은 숨죽인 고통 같아.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뭐 좋은 이야기라고, 다시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고 쉽게 말하지만 슬픔과 고통은 릴리의 분실물 보관소에 쌓인 눈물처럼 바다로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바다로 흘러가서 온 세상이 그 슬픔을 다 알고, 그 슬픔에 젖을 때 눈물이 기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하고 공감받는 것으로 슬픔에 빠지지 않고, 슬픔을 헤엄치고, 슬픔을 타고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가창댐*

_이하석

    

 

1

 

그 많은 이들 몰래 죽임 당했어도

애비로서의 죽음을

그 아들딸로서 거두는 한

모든 게 망각되어버리진 않는다.

사랑의 힘이라면 또 제각기

세차게 살아 남긴 게 있기 마련이다.

합동 제사 지내는 유족들의

한여름이여.

 

2

 

갇힌 물은

소용돌이친다.

폭우로 넘치면 큰물로

골짜기 소리쳐 빠져나간다.

애비로서의 죽음을 그 아들딸로서 거두는 한

저렇듯 퍼렇게 살아내야 하리라.

 

3

푸른 하늘 아래 용수 덮어쓰고

애비는 마구 실려와 이 골짝에서

총 맞아 죽었다.

그 캄캄하게 파묻히고,

다시 질척하게 수장해버린

역사의 수면에

수척하게 떠오르는 아들딸의 얼굴들이여,

애비로서의 죽음을 그 아들딸로서 거두는 한

늘 새로 되새김되는 기억들 휘젓는

바람이

제사상 흔든다.

 

4

 

애비로서의 죽음을 그 아들딸로서 거두는

그 모든 게 쌀과 밥 때문이라면,

그래, 이 댐의 물어 호미 씻어

죽음 가시고

삶도 예리하게 낫을 가시는,

언제나 새로 이 물 제 논에 끌어들이는 이는

모진 사랑의 힘 되지피는 게 분명하다.

 

 

*대구 달성군 가창골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을 비롯해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양민 들 수천 명이 집단적으로 학살됐다. 학살 터는 이후 가창댐으로 수몰됐다.

 

-이하석, 연애 (문학과지성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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