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꿈을 꾼다

    

 

 

꿈을 꾸었어. 나인지 내가 아닌 다른 아이인지 모르겠어. 나라고 하자. 꿈에선 지켜보는 내가 있어서 꿈속에 나오는 내가 간혹 내가 아니게 느껴지기도 하거든. 꿈속은 진짜가 아닌데도 나는 자꾸 꿈속의 사람이 나인지 내가 아닌지 헤아리고 있구나. 어차피 진짜 나도 아닌데.

 

어쨌든 나는 고래 등에 엎드려 있었어. 고래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물속에 잠겼다가 물 밖으로 나왔다가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어. 하늘은 맑고, 물결은 빛났어. 꿈속의 나는 특별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어. 목적지에 못 갈까 봐 걱정하지도 않았고, 물속에 잠길까 봐 무섭지도 않았어.

 

그러나 작은 머릿속에서 돌돌 말려 있던 뇌의 굴곡이 확 펼쳐진 양 하늘에 사람들 얼굴이 걸렸어.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들이었어. 모두 외국인이었지. 그들이 나를 보고 있었어. 실은 내가 그들을 보고 있었는지도. 꿈속에서 생각했어. 나는 저들에게 가고 있는 걸까, 갈 수 있을까, 하고. 바다 다음에는 바다가 있고, 그 바다의 다음에는 또 바다가 있는데 정말 어디로 가고 있기는 한 걸까.

 

그냥 꿈이야. 고래를 타고 바다를 유영하는 꿈, 무심한 바다와 무심한 내가 무심히 흐르는 꿈. 끝없이 물속과 물 밖을 오가는 것이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는 것 같기도 하고, 생과 사를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생각이 그냥 흐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쁜 습성 같기도 하고.

 

고래 꿈은 처음 꾸었어. 꿈꿨는데 기억 못 할 수도 있지만. 달력 속의 오늘이 단칸방처럼, 아파트의 창문처럼 놓여 있어. 사실은 자를 수 없는 바다 같은 날들을 쪼개 놓은 것인지도 몰라. 고래는 너무 좁아 살 수 없어서 오늘로부터 멀리에 있는 걸까. 달력에 그어진 선들을 쓱쓱 지우고 나면 거기에 그려질까. 나와 고래가 물속을 물 밖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흘러가고 있는 모습이.

 

 

 

고래의 꿈

_송찬호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길 듣는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뻘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쏜살같이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꿈이 하나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 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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