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

 

 

 

사람을 만나는 일은 즐겁고도 피로로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부슬부슬 부슬비 오는 저녁을 걸었어. 안경점도 가고, 가게도 가려고 나온 길이지만 일없이 나온 사람처럼 어슬렁어슬렁.

 

기슭아, 너와는 연락이 닿지 않고 이 편지도 한 방향이지. 그래서 우리는 아무 다툼이 없지.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건 이런 거지. 내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내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추지. 편안하지만 쓸쓸해. 어쩌면 난 쓸쓸하고 싶어 네게 말을 걸고 있는지 모르겠어.

    

쓸쓸한 비가 쓸쓸히 내릴 때 쓸쓸하다고 느낄 수 있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어떤 비가 내리는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바쁘게 걷는 날이 많았거든. 이유 없이 여유가 생기면 쓸쓸함에 젖어도 좋으련만 그 잠시의 쓸쓸함도 털어버리고 전화를 걸어. 

 

언니는 요즘 좀 아파. 이제 좀 나아졌대. 아플 땐 앞으로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일어나기 마련이야. 그렇지만 한 살 아이도 아흔 노인도 하루를 살 뿐이야. 하루를 건너뛰고 한 달을, 일 년을 살 수는 없잖아.

 

휴대폰 잠금 화면에 오늘이 첫날이고 마지막 날이야라는 구절을 적어 뒀어. 김진영 선생님이 아침의 피아노(한겨레출판, 2018)에서 한 말이야. 작은애가 보더니 엄마, 이게 무슨 말이에요?”하고 물어. “오늘 하루가 소중하다는 뜻이야라고 대답했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아. 소중하든 아니든 다른 날은 여기 없으니까 즐거워도 하루, 힘들어도 하루.

 

외로운 시곗바늘이 탁, 탁 걷고 있어. 바늘이 둘이라도 셋이라도 제 일에 골몰하는 것은 무어라도 외롭지. 누가 보든 안 보든 저렇게 동그랗게 걷고 있구나. 이렇게 조용해야 나는 겨우 그 발소리를 들을 수 있구나.

 

 

 

슬픔이 없는 십오 초

_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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