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물결
이 시간에 서재에 들어오면 할 말이 없어도 무언가 말하고 싶어. 이를테면 오늘 정수기 필터를 갈았다든지, 내일이면 아이들 방학이 된다든지, 비 소식 듣고 비 구경하려고 언니와 엄마가 시골집에 갔다든지, 카뮈의 『작가수첩』을 읽고 있다든지, 문 닫은 구멍가게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왔다든지, 저녁이 가을처럼 시원했다든지, 교회 공사가 다 끝났다든지, 집 안에서 키우는 나무 하나가 시들시들 하다든지, 후배가 하는 미용실에 가서 커트를 했다든지, 하는 잔물결 같은 이야기들...
어떨 땐 말이야.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말할 때가 있어.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꼭 할 얘기가 없는데 하고 싶은 것. 필요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목적 없는 것, 불필요한 것 그런데도 편안한 것. 아니지, 그래서 편안하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느낌 없이 충만하다면 더할 나위 없지. 소소한 것에 대해 소소하게 이야기 나누는 기쁨... 여유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여유를 만들어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이 일이 여유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벌써 자정이 다 돼가네. 잠이 쏟아져. 그러니까.. 하아~ 하품은 한 번 하면 계속 나와. 들어가 잘게. 안녕.
호수
_문태준
당신의 호수에 무슨 끝이 있나요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한 바퀴 또 두 바퀴
호수에는 호숫가로 밀려 스러지는 연약한 잔물결
물위에서 어루만진 미로
이것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태준,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p.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