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눈이 내리면

 

 

 

창문을 열어놓고 있어. 차를 마시려고 내려놓았는데 마시면 조금 더울 것도 같아. 뉴턴 잡지에서 빛과 색에 대해 읽는데, 책 내용과 상관없이 불쑥, 눈 내리는 마당이 떠올라

 

내가 어렸기에 더 넓어 보였을까? 5, 6살쯤의 우리 집 마당에는 10여 마리 닭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한쪽 옆에는 들마루가 있었어. 가물가물한 기억을 톡 쏘아붙이는 건 수탉. 어른을 흉내 내며 닭을 쫓자 수탉이 되돌아와 내 허벅지를 쪼아 부풀게 했지. 그렇게 좁은 기억의 통로를 따라가다 갑자기 확 펼쳐지는 정경. 눈 내리는 마당. 대구는 눈이 잘 오지 않는 터라 눈 오는 마당은 특별해.

 

오빠와 나는 잽싸게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어. 낑낑거리며 마루 위로 눈덩이를 하나씩 올려붙였어. 마른 나뭇가지로 얼굴을 꾸미고... 만드는 동안 눈이 그쳤지만 우리의 눈사람은 거대하게 빛났지.

 

점심을 먹으러 방에 들어갔다 텔레비전을 봤어. 만화 영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 하기야 눈사람이 무슨 소리를 냈겠어. 만화가 끝나고 마당에 나왔을 때 우리의 찬란한 작품은 뜯어 먹은 솜사탕처럼 심하게 일그러졌지.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무너지다니! 그늘에 있는 눈을 가져와 다시 살려내려 했지만 새로 덧붙인 눈사람은 그전의 눈사람이 아니었어. 눈사람 만들기 놀이는 끝난 거지.

 

눈사람이 햇볕에 녹는다는 걸, 결국 사라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눈이 내리면 나는 다시 눈사람을 만들어. 놀이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해내는 일이 아닐까. 파도에 쓸려갈 줄 알면서도 해변에서 모래로 성을 쌓는 일이나 이번 판은 벼락부자지만 다음 판은 거지가 될 수 있는 보드게임 같은 것. 놀이가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야. 그런데도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삶이 놀이라고 한다면 너무 건방진 말일까. 삶이 아무리 치열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어도 언젠가 모래성처럼 쓸려가 버리지. 해가 나면 눈사람이 녹고, 파도가 치면 모래성이 무너지는 걸 받아들이듯 우리도 쌓고 무너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삶을 받아들이지. 눈사람이 아무리 녹아 사라져도 다시 눈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이 아무리 허물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기슭아, 불쑥 눈이 내리면 우리 같이 눈사람을 만들자. 그저 거기 눈이 있고,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면 만드는 거지. 녹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만드는 그 순간에 전념하면서 즐겁게 만들면 좋겠어. 강아지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눈이 오는 바로 그날만 할 수 있는 그 일을 하는 것처럼. 다음 날 눈이 그치고 햇볕이 더 강하게 내리쪼일지라도.

 

 

 

불쑥

_박소란 

 

 

불쑥, 이라는 말이 좋아

불쑥 오는 버스에 불쑥 올라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 일이 좋아

나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텐데 불쑥 우리는 사랑할 텐데

고단을 가득 태운 버스가 우리를 창밖으로 내팽개친대도

그리고 모른 체 달려간대도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이봐, 이걸 보라구, 여기 불쑥이란 게 있다구

아하, 그렇군! 걱정 없을 텐데 

 

이제부터 나는 불쑥이 될게,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일 텐데

어이 불쑥, 반색하며 불러줄 텐데 

 

그러면 대답할 텐데 응, 하고

불쑥이 대신

불쑥은 내가 될 텐데

나는 불쑥 뒤에 숨어 숨바꼭질처럼 살 텐데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불쑥 왔다 불쑥 갈 텐데 술래도 모르게 나는,

멀리 저 멀리 갈 수 있을 텐데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 2019),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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