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기슭아, 지금은 새벽이고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어. 낮에 마신 커피가 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탓인가 싶어. 뒤척이고 뒤척이다 일어나 앉았어. 투르베르가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들어.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는 구절이 반복되어서인지 그 구절이 맴돌고 있어. 자꾸 들었더니 조금씩 내 안으로 들어와. 그리고는 아주 오래 전으로 나를 데려가.
나는 산으로 갔지. 그때 왜 갔느냐고 많은 사람이 물었어. 나는 그때마다 무어라고 대답했지만 오늘 누가 묻는다면 세상한테 져서 갔어, 라고 대답할거야. 어쩌면 세상한테 져서 갔어, 라는 말도 할 수 없어. 세상에서 지려면 세상과 싸워야 하는데 나는 싸우지도 않았으니까. 지금도 세상에 져서 세상에 살아. 내가 이기고 싶은 게 뭔지 말도 못하면서.
몸은 얼마나 작은지, 커피 한 잔에도 이렇게 깨어있으니. 이렇게 작은 몸속에 지나간 일은 얼마나 많이 있는 건지. 흘러가자, 흘러가라. 몸이 창고가 아니라 통로였으면 해. 막히지 않고 잘 흘러갔으면.
비가 오래 오네. 노래가 듣기 좋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_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노래 : https://youtu.be/EEPODasDSm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