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민음사, 2015)을 보면 허크 혼자 모험을 하지 않아. 달아난 흑인 노예, 짐과 함께 여행해. 짐은 누군가의 재산이지. 허크는 짐을 신고하지 않은 죄책감에 시달려. 신고하려고 편지까지 쓰지만 결국 편지를 찢어. 그러면서 자기는 지옥에 갈 거라고 해. 짐은 이미 고락을 나눈 그의 친구인데, 친구를 신고하지 않은 죄책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민음사, 2012)에서 자베르 경감은 자살해. 어릴 때 『장발장』이라는 제목의 간추린 책을 봤는데, 그땐 자베르 경감이 집요하게 선량한 인간을 쫓은 걸 후회해서 목숨을 끊은 줄 알았어. 그런데 본 책을 보니 형사로서 죄인인 장발장을 보고도 잡지 않았던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죽은 거였어.
죄란 뭘까? 한 여인이 간음하면 어느 시대에는 돌에 맞아 죽고, 어느 시대에는 감옥에 보내지고, 어느 시대에는 배우자와 이혼만 하면 돼. 같은 행위에 대해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건 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서겠지.
예전에 어느 여배우가 섹스 비디오 때문에 외국으로 달아났어. 그땐 다 그 여배우를 손가락질했어. 그 비디오를 찍고 퍼뜨린 상대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지. 지금은 젊은 남녀가 성관계하는 게 손가락질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비디오를 찍어 사랑했던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사람에게 더 분노하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민음사, 2008)에서 오비에리카는 자신이 내다 버린 쌍둥이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던 걸까? 하고 생각해. 쌍둥이는 대지에 대한 모독이라고, 대지의 여신이 없애라고 명령했대. 저주가 두렵고, 그곳에 살아야 하니까 아이들을 버렸지. 하지만 그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던 거야. 오비에리카 같은 사람이 늘어나면 쌍둥이를 버리지 않겠지.
죄라고 규정한 틀 속에서 그게 왜 죄가 되냐고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자유가 확장되는 건 아닐까? 죄는 조이는 거잖아. 조이는 것에서 자유가 나올 수는 없지. 같은 사람인데 흑인이 왜 재산이 되어야 하냐고, 가난한 사람은 왜 작은 잘못으로 큰 벌을 받아야 하냐고, 같은 행위에 대해 왜 한 성별만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냐고, 어떻게 한 존재가 모독이 될 수 있는 거냐고, 자꾸 물어야 해. 그래야 남도 자기 자신도 덜 조이게 되지 않을까?
나를 조이는 건 뭘까? 나는 누구를 조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