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에 있고, 그는 여기에 없어. 여기에 없는 그가 내 귓가에 노래를 불러. 달콤해. 여기에 없는 그는 나를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그곳은 그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저 멀리 햇살의 언덕이기도 하고, 가끔은 어두운 유년의 숲 같기도 해. 연애를 할 땐 물리적인 거리와 상관없이 가장 긴 시간 동안 가장 가까운 통화를 하게 돼. 비록 만나지 못할 때도 서로의 세계에 친밀히 가 닿는 거지.

 

영화 매트릭스봤어? 공중전화 박스에 여자가 있고, 어떤 차가 그 박스를 들이박는데 전화기를 들고 있던 그 여자는 이미 그곳에 없어. 그 여자는 진짜 현실세계로 이동한 거야. 그 영화를 보며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끈으로 전화기를 설정한 것에 깊이 공감했어.

 

요즘은 거의 모두 휴대폰을 가지고 있잖아. 그래서 공중전화 박스가 사라지고 있어. 예전엔 아파트 단지 안에도 공중전화가 있었거든. 재작년인가? 구청에서 공중전화를 철거했어. 도서관 앞 공중전화도 아파트 안 공중전화도 다 없어졌어. 공중전화 박스는 우주와 교신하는 장소 같이 느껴져서 괜스레 박스에 들어가 낯익은 거리를 낯설게 바라보기도 했었는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술을 마시면 동전을 가득 바꿔서 전화기를 찾았어. 그리운 사람들은 죄다 전화기 속에 있었거든. 즐겁게 통화하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루는 너무 취해서 평소 연락하지 않던 이에게 전화를 걸었지. ,,. 여보세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전화가 끊겨.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할 말이 가득 찼는데...다시 번호를 누르지만...우주의 미아가 된 듯이 박스 안에 서 있으면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문을 두드려. , 나는 그제야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지. 미안해. 그런 일이 있고나선 취해서 전화하지 않으려고 해. 창피했거든.

 

전화번호가 바뀌면 그 번호를 따라 나오던 세계와도 끊어져 버려.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직장생활을 끝내고 대구에 와서 한참 되었을 때, 마종기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거기에서 편지를 발견했어. 직장 다닐 때 옆 사무실에서 일하던 아이가 내게 준 거였어. 내게 시집을 주면서 쓴 편지인데 그대로 꽂아둔 거였지. 거기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어. 아주 오래된 번호. 바뀌지 않았을까? 전화를 하고,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 아이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어. 그 발걸음은 대구에까지 와 닿았어. 주말에 나를 만나러 왔거든. 너무 오래되고 멀어서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세계가 전화번호를 타고 온 거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내 기분이나 상황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어. 그래서 답답할 땐 다른 지역에 있거나 소식이 뜸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하곤 해. 미국에 있든 베트남에 있든 서울에 있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이들은 내 고민과 거리가 있고, 그 거리가 여유를 줘. 그렇게 나는 매트릭스의 주인공처럼 전화기 너머, 그들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거지. 너는 지금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있니?

 

    

 

전화

_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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