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유튜브로 문장의 소리’(554)를 들었어. 육호수 시인이 침묵과 고요를 이야기 했어. 침묵을 고요로 가져가는 일이 힘들다고, 침묵 속에서는 카오스 세계를 만나야 한다는. 그걸 들으니까 오래전 가을이 생각났어.

 

호스피스 병동이었어. 거기 둘째 아주버님이 계셨어. 나에게 화두 참선을 알려주신 분이야. 눈빛이 또렷하고, 목소리가 힘찼던 그분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앉아 있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아주버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렀어. 아이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많이 변한 거지. 고통 때문이었을까? 진통제 때문이었을까? 각종 선으로 묶인 채 멍한 눈으로 이따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지.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병원에 갔어. 슬픔 때문인지, 병원 밥이 입에 맞지 않아서인지 병간호하시는 형님이 식사를 제대로 못 해서 점심에 맞춰 반찬 몇 가지를 싸서 가곤 했어. 어느 날은 돌아누워서 신음만 내던 옆 침대의 할아버지가 안 보였어. 그분이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결국 돌아가야 할 어떤 곳으로 가셨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지. 아무도 그분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어.

 

윙윙거리는 텔레비전 화면을 향해 시선을 꽂았다 간호사가 오면 이런저런 호소를 해. 그리고 다시 조용해지는 병실. 무언가 말할 것이 가득 찼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이따금 나오는 말들은 제멋대로 허공을 떠돌다 사라지고. 무거운 침묵이 병실에 깔려 있었어.

 

병실 밖에는 가을이 와 있었어. 가을날 잎 지는 걸 본 적 있어? 잎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때가 돼서 떨어져. 가을엔 바람 한 점 없어도 떨어지지만, 여름엔 태풍이 불어 나무가 뿌리까지 뽑혀도 푸른 잎들이 그대로 나무에 붙어 있거든. 잎 지는 일도 아무렇게나 되는 게 아니야. 때가 되어 떨어지는 잎에서는 고요를 느낄 수 있어.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고요하게 생을 마칠 수 있을까? 나무를 보며, 나뭇잎을 보며 아주버님이 고통과 혼란에서 벗어나시길 기도했어.

 

그때 침묵과 고요는 다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어. 침묵 속에는 말이 있는 것 같아. 말하지 않은 말이, 혹은 말 이전의 말이, 어쨌든 말이 있어서 침묵은 언어와 짝이라고 생각해. 고요는 언어와 무관하게 느껴져. 햇살과 구름과 나무와 흙은 고요하지, 침묵하지는 않잖아.

 

에크하르트 톨레는 고요함의 지혜(김영사, 2004)에서 존재의 심연에 있는 우리의 자아는 고요함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했어. 그 고요함이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우리의 실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어. 우리도 나무처럼 자연의 일부니까 자연이 가지고 있는 고요함을 지니고 있는 건 당연하잖아. 그런데 무언가 두렵고 불안한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우리 자신을 링거와 기계 선들로 묶어둔 건 아닌지, 살아갈 수 없는데 살아있으라고 강요한 건 아닌지...... 죽음 앞에서라도 고요를 느낄 수 있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건 아닌지......

 

 

 

호스피스 병동에서

_변선희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여위어가는

파리한 잎 위로 가는 비 떨어져도

메마른 그물맥 속에 맺히지 않는 말

 

떨며 지샌 아침에도 짙은 안개 감싸고

거대한 나무에 잎 하나 지는 일

얼마나 침묵하여야 고요가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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