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엔 벚나무가 많아.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벚나무의 사계가 보여. 푸릇푸릇 돋는 연두 빛은 아기 속살 같아. 고등학교 때 운동장 가에 이름 모르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성글고 연한 빛이 여유로웠어. 책으로 말한다면 노자의 [도덕경]처럼 알 듯 말 듯 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조금 벗어나 있는 신선의 향이 난다고 할까. 꽃나무든 아니든 봄이 되면 차고 굳은 나무껍질을 뚫고 나오는 그 부드러운 시작에 괜스레 나도 잠시나마 마음이 너그러워져. 짙푸른 그늘을 일으키는 여름 나무나 새로운 풍경을 일으키는 가을의 나무도 시선을 끌지.
겨울나무는 길가에 서 있는 낮의 가로등처럼 눈에 띄지 않았어. 그런 나에게 겨울나무가 들어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였어. 곧 고3이 되고 해서 매일 도서관에 다닐 때였는데 하루는 점심을 먹고 도서관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고 나왔어. 그때 눈에 띤 건 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 가지와 가지, 가지의 가지...굵고 잔 모든 가지가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히 그려져 있었어. 다 벗어던지고 오롯이 드러낸 몸. 나무가 마치 무언가를 말하는 듯 느껴져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어.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듯, 죽은 듯이 그러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에게서 노숙한 지혜와 젊은 기개가 뒤섞인, 묘한 느낌을 받았어. 어쩌면 나는 그날 처음으로 겨울나무를 본 거야.
죽은 언니의 일기장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동시 '겨울나무'가 있었어.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오래 앓아 외로웠던 언니의 마음인 것 같아 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나곤 해. 언니는 아마 자신을 겨울나무 같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언니의 이런 마음을 알았더라면 내가 만난 겨울나무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 했을 텐데.
나무는 그저 한 그루 나무. 봄의 나무, 여름의 나무, 가을의 나무, 겨울의 나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나무가 그 계절을 견디고 즐기고 잎을 떨어뜨리고 뿌리를 뻗어가지. 한 그루 나무 안에 사계가 다 있어. 봄이 되면 봄 나무가, 가을이 되면 가을 나무가 되듯 겨울이 되면 겨울나무가 되는 거지.
사람도 모두 그 나름의 계절을 지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나의 계절을 지나고 있지. 우리가 때로 종류가 완전히 다른 나무라서 계절을 다르게 견딘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삶의 과정을 지나고 있을 뿐이야.
나무를 봐. 잔가지가 유난히 많은 나무는 여름에 무성한 잎을 피웠을 것이고 또 피워 내겠지?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고 나무는 겨울을 지나고 있어. 하늘에는 어떤 계절이 있을까.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겨울을 지나는 이들이 움츠리지 말고, 쓸쓸해하지도 말고, 내가 만난 겨울나무처럼 의연하고 당당하게 기꺼이 겨울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