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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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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내 서재 속 고전>에서 스스로를 에세이스트라고 여기고 에세이의 가치를 부각시키려한다. 한국에서는 잡문 정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으나 그가 보기에 에세이는 라는 존재가 부각되는 장르다. “1945년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30만 여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납득을 하면서도 그저 그렇게 넘어가 버린다. 죽은 이들의 억울함이나 아픔을 논문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의 효용을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출처:[시사인]

  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작가의 이름을 자꾸 되새겨도 자꾸 잊어버린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계속 생각했다. 그녀가 이 600여 쪽에 달하는 작품을 집필하고자 했을 때에 과연 저 국경 너머 어딘가 나같은 독자가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는 그녀의 이름을 생전 처음 들었고, 노벨문학상 작품을 완독하는 데 번번이 실패한 트라우마가 있으며, 동시에 소련과 러시아, 스탈린에서 푸틴에 이르는 모든 역사와 철학과 문학에 상당히 무지하고 무심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되었고, 한편으로 이 책이 나의 첫 노벨문학상 작품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라딘에서 분명 에세이로 추천을 받았는데 그녀는 기자출신의 유명한 소설가였고, 이 책은 인터뷰를 모아놓은 목소리 소설로 불리곤 했다. 속기록인가, 에세이인가, 에세이라는 옷을 입은 리포트인가 아니면 팩션인가의 경계에서 이 작품은 당당히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어쩌면 이 책의 장르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것일지 모른다. 다만 그녀는 논문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야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이상의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글을 썼으며 경향신문은 이 책을 이렇게 소개했다.

 

문학이 언제 위대해 질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책

 

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가 아닌 사랑, 질투, 유년기, 노년기에 대해 그리고 음악, , 헤어스타일에 대해, 사라진 삶의 수천 가지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것이 재앙을 익숙한 틀 속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서문 중에서

  난 대선 김어준과 나꼼수는 분명 정치에 대한 눈을 처음 뜨이게 해 준 플랫폼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수많은 정치, 시사 팟캐스트를 듣고 기사를 읽으며 흥미로운 수사들을 접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정치가 나의 생활 스트레스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정치가 내 일상에 어떻게 침투하는지, 내 한 표의 가치를 그렇게 이해하고 배워갔다. 그냥 모두가 알아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는 분명 정치와 사회제도 안에서만 '자유롭게' 살아간다.

 

행복해졌다고요? 그런가요? 햄과 바나나가 판매되고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똥 무더기에서 뒹굴거리며 외국 음식을 먹고 있다고요. 조국 대신 거대한 슈퍼마켓이 들어섰지요. 이런 게 자유라면, 난 이런 자유는 필요 없어요. 젠장! - p.29

 

(자유시장의 시대가 열렸지만) 우리를 대우해주는 곳은 없었어요. 페레스트로이카는 우리가 이뤄낸 거였어요. 우리가 우리 손으로 공산주의를 묻었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도 필요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어요. 어린 딸이 배가 고프다는데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 p.532

  1917년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에서 시작된 소비에트 시대 그리고 1991년 이후의 자본주의 (또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를 꽤 새롭게살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러나 저자가 인터뷰를 통해 들여다 본 러시아는 혁명과 혁명을 무너뜨리는 변혁의 시대를 겪어온 그들이 새롭게 맞이한 시대가 전혀 새롭지 않고 자유에 대한 정의가 모두 같지 않으며 오히려 누군가는 속박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유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컨드 핸드 타임’(중고품 시대)을 살아가고 있었다.

 

  과정에서 저자는 다양한 세대들의 억울함이나 슬픔, 현실의 부조리와 역사의 책임을 강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최대한 원대하고 웅장하고 극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 집과 부엌, 가족과 친구, 술이나 음악과 책에 관해 묻고 독자는 보다 익숙한 소재에 대해 몰입하면서 그 이면의 웅장하고 원대하고 극적인 것들을 자유롭게 상상한다. 그런데 그 상상이 억울함과 슬픔, 현실의 부조리와 역사의 책임을 불러 일으킨다. 감히 평하자면 나는 그 점이 가장 좋았다. 신기하게도 일상을 깊게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수록 시대와 정치와 사상의 상징이 몇 겹으로 중첩돼 나타났다. 시민의 목소리가, 증언이 소설이, 문학이 되는 순간이었다.

 

  국 책끝까지 다 읽지도 못했지만, 가능한 한 여러 번 다시 봐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다 읽어도 다 읽은 게 아닌 책이 될 것 같다. 이로써 노벨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두 번째 트라우마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은 성과를 굳이 꼽자면 일상의 언어가 역사적 증언이 되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수많은 증언들을 지금 우리 세대를 살아가는 모든 생존자들의 목소리로 바꾸어 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누군가 우리의 세컨드 핸드 타임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남는다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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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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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즈 루어만의 현란한 영화 덕분에 <개츠비 열풍>이 정점을 찍었다. 페이퍼 백의 판매량은 미국 전체 판매량에서 2위까지 올랐고 전 세계적으로 25백만 부가 팔렸으며 42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P.22 

 의 내용이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저자의 학창시절처럼 <위대한 개츠비>는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친 적이 없었으니까. ‘열풍정점의 시공간 속에 있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작가인 스콧 피츠제럴드에 대해서는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조차 없으니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책에 대한 이토록 진지한 찬사를 읽어 내려가는 건 당장은 무리였다. 책을 덮었다. 언젠가 다시 펴리라......

 

  족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케이블에서 영화를 한 편 보게 되었다. 이미 세 번쯤은 본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그런데 세 번을 볼 때까지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한 캐릭터가 갑자기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톰 히들스턴이 연기한 스콧 피츠제럴드. 매일 밤 시간여행을 떠나는 남자 주인공 길 펜더(오웬 윌슨 분)가 파리의 파티에서 만난 많은 예술가 가운데 이제서야 피츠제럴드(톰 히들스턴 분)의 허세스러움과 젤다의 예민한 성격, 이 부부의 삶의 태도. 헤밍웨이와의 우정과 전쟁까지... 마치 처음 본 장면처럼 새롭게 색이 입혀졌다. 모린 코리건의 책을 덮기 전까지 읽은 내용만큼만, 딱 아는 만큼 보였다. 모린 코리건의 피츠제럴드 예찬을 다시 펼 수밖에 없었다.

 

  

  책을 다시 읽기 위해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위대한 개츠비>보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조금 더 주효할 것 같다. 모린 코리건은 여느 평론가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개츠비>를 작품 그 자체의 구조론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생애와 그가 살아간 시대를 통틀어 모든 요소들을 작품에 대입하고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의 오해를 풀어나가면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를 그의 글로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 개츠비>의 이야기와 피츠제럴드의 실제 삶만을 보면 '사치''허세'로 점철될 이미지들에 피츠제럴드의 정치, 사회관과 딸에게 보낸 메시지들을 더하면 그는 확실히 입체적으로 흥미로운 작가였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부자의 모습들을 세밀하게 그려낸 만큼 계급에 대한 인식도 꽤나 분명하게 갖고 있었던 시민이었다.

 

내가 내린 위대한 책의 정의란 이렇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무궁무진한 작품. -P.26

  름대로 서평을 계속 쓰고 있고 평론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떤 한 작가의 작품을 뜨겁게, 일관되게, 읽을수록 더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건 비범한 집착으로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웠다. 평론가이자 학자로서, 독자이자 지지자로서 이 작품을 쉰 번 넘게 읽은 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나갔을 지 생각해보면 더더욱 더 부럽다.시간에 쫓겨 때로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의무적으로 읽고 아무렇게나 써서 '남겼다'는 이유로 '날려'버린 책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황석영/작가 : 국어교사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하는데 끝나고 나니까 선생님들이 <삼포 가는 길>로 시험문제를 낼테니 한번 풀어 보세요.” 그래서 10문제를 냈는데 제가 4문제를 겨우 맞혔습니다. 그러니까 점수로 따지면 100점 만점에 40점이죠.]

 

[손석희/앵커 : 과락이네요.]

 

[황석영/작가 : 낙제점수죠. 제가 통탄을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문학에 대한 질문과 해답이 왜 정답이 꼭 하나만 있냐. 이제 문학교육의 경우에도 대개 외국의 사례나 그 문학교육의 의의를 보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것을 갖고 통째로 그걸 감수성이라고 받아들이도록 하고 창의성을 키워내는 식으로 접근 하는데 우리는 문학을 사지선다형으로 교육을 하는 게  문제가 있다고 봐요.

 

 한민국 3대 구라황석영 작가가 얼마전 JTBC 뉴스룸에 나와 손석희 앵커와 나눈 인터뷰이다. 자신의 작품과 관련된 수능 문제를 풀어보고 자신도 답을 맞추지 못했다는 문학가들은 황석영 작가 말고도 많다. 문학 교육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문학의 속성에 비추어 가장 훌륭한 문학 교육은 차라리 안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술이 입시에 편입되면서 필독도서의 난이도는 훨씬 높아진다. ‘아무나읽을 수 없는 것들을 다루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는 작가와 작품과 줄거리는 많지만 늘 어른이 되어 그것을 다시읽는다. 물론, ‘다시읽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리나라의 정규교육과정을 충실하게 밟아온 주입식교육의 수혜자로서 내게는,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때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읽은 문학이 너무나 많다. 저 멀리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공영방송에서 서평을 기고하고 있는 저자 모린 코리건도 이런 제도적인 상황은 피해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위대한 개츠비>다시읽었고, ‘계속읽게 되었으며 고등학교 때 읽고 한 번도 그 가치를 되새겨 본 바 없는 <위대한 개츠비>가장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다. 솔직히 그녀의 책을 읽고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나만의 위대한 개츠비를 찾고 싶어졌을 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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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3 15: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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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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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살아보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 한껏 게으르게, 온전히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한 체류 여행
김남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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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울 북극발 한파가 호되게 밀려왔다 밀려가고 이내 내달려오기를 반복했다. 여행에서 공간의 이동이나 시차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의 순리를 거슬러보는 경험이 아닐까 싶다. 추울 때는 따뜻한 나라로, 더울 때는 시원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의도치 않게 겨울엔 유럽의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여름에 괌의 찌는 듯한 더위에 지쳤던 기억밖에 없다. 그나마, 한 겨울 제주나 해남에 가서 몸을 녹였던 것이 피한避寒의 기억이라면 기억일까.

 

  여행은 때로 일상과의 단절을 강박처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여행에서도 일상의 고민과 잡감이 떠나지 않을 때가 많다. 한정되어 있는 시간은 그 불안을 증폭시키곤 한다. 그래서 한 나라에 적어도 한 달 정도 머물며 살아가는 그녀의 여행법은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를 가리키고 있다. 물론 그렇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가장 먼저 책 표지와 디자인, 구성이 눈에 띄었다. 얼른 출판사 이름을 확인해 볼 만큼 글과 사진의 배치, 색감이 참 단정하고 예뻤다. 오랜만에 예쁜 책을 만나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간 몇 권의 여행 에세이들을 읽으며 자기 관념에 빠진 글들과 메시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사진 배치가 불편했던 적이 더러 있었는데 그에 비해 이 책은 여러모로 친절하고 호흡이 좋은 구성이다.

 

  여행에세이를 읽을 때 그 나라, 그 도시의 대표적인 명소와 특징, 문화를 이해하고 대리만족 하는 데 온 힘을 쏟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여행 이야기를 쓴 사람에 더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기억에 오래 남는 여행 에세이는 대체로 자연스러운 자기노출이 잘 되어 있는 글이 아니었나 싶다.

 

  서른 너머에 여행을 시작해 이제 사십대에 접어든 작가, 김남희.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데 어느 정도 이력이 난 그녀는 여전히 소심하고 경계하고 몸도 여기저기 골병이 든 곳이 많다. 나는그 조심스러움이 참 좋았다. 무모한 용기를 이야기 하는 여행책은 꼭 성공한 사람들이 쓴 나처럼 해봐요식 자기계발서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많은 모습들 중에서도 외로움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혼자하는 여행이 마냥 신나기보다 따뜻한 열대의 땅에서 더욱 한기를 느끼는 것 같은 외로움과 쓸쓸함이 글로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 그녀의 다른 책이 <외로움이 외로움에게>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

 

  그녀의 여행기에서 사람, 종교, 사회, 정치, 책과 영화, 예술, 음식, 자연, 동물과 식물들이 하나하나 살아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참 조근조근 끈기있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행지에서 모국어로 된 책을 읽으며 의미를 나누는 것이나, 내가 나고 자란 땅에서 쉬 발견하지 못한,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하고 말지도 모를 ‘동이민족의 유전자', 뜨거운 심장과 젊은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도 좋았다.

 

  많은 여행 경험속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낯선 곳이든, 익숙한 곳이든 쉽게 달뜨거나 섣불리 화를 내지 않는, 잔잔한 목소리 덕분에 한 책에 담긴 4개 도시의 이야기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느껴졌다. 남희라는 이름의 자모의 음성에서 오는 느낌처럼 가만가만, 작고, 예쁘고 부드러우며 약간의 위트 잃지 않은 편안한 글들이었다.

 

 이방인의 난폭한 발걸음에 아직 뭉개지지 않은 새벽의 풍경에 인사를 건넨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소란스러운 흔적을 이 도시에 남겨두고 떠났던 걸까. 여행자로서 최소한의 윤리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기인데......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에 머물고 싶다고 했던 저자. 각 나라와 도시에 대한 애정만큼 직업 여행가로서 관광객과 '여행소비자'들에게 갖는 안타까움과 책임감들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지난 나의 여행들을 되돌아보는 데에도 손색이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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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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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연준과 장석주. 두 저자 가운데 눈에 익은 이름을 먼저 찾았다. <철학자의 사물들>을 통해 알고 있던 장석주의 글부터 읽고 난 후 다시 박연준의 글로 돌아왔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놀랐다. 두 작가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몰랐고 장석주의 글에 등장하는 동반자 ‘P’를 무심코 넘겼기 때문이다. 이 책이 왜 이런 구성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책의 반을 읽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가능하다면 이렇게 읽기를 추천한다. 장석주 그리고 박연준.

 

1. 그 남자가 걸어본다

 

그리하여 공항은 출발의 흥분과 설렘, 도착의 안도뿐만 아니라 공간들의 배치를 통해 사치와 쾌락과 기다림의 무기력을 뒤섞는다 

 사물들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던 시인의 여행은 공항이라는 공간이 갖는 속성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장석주는 <걸어본다> 연작의 기획의도대로 임무를 최대한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듯이 정말 열심히 걷는다. 발이 -정확하게는 발바닥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는 말과 함께 걷기란 몸이 아닌, 자아가 움직이는 것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말이다. 그가 이 걷기에 관하여, 특히 느리게 걷기에 관하여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글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라 

 시드니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아니 어느 곳이라도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많은 곳을,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떠나봤지만 장석주의 시드니처럼 내게도 그 순간, 그 빛과 어둠, 물과 바람이 그런 감동을 주었었는지 백 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렇지가 않다. 늘 내 어떤 감각들보다 발이 빠르게 앞서갔던 것만 같다.

 

아름다움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 

 욕망을 좇는 여행을 수없이 해 봤다. ‘가성비를 따지는 것부터가 실은 욕망의 시작이기도 했다. 웅장하고 반짝이는 랜드마크와 좋은 숙소, 유명한 음식점, 꽉 짜인 일정대로 쉬지 않고 움직이겠다는 욕망을 실현하는 길. 릴케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이라고 하며 아름다운 것을 보며 내내 침울해 했다고 한다. 나는 바쁜 여정 가운데 간혹 아름다운 것을 만나면 항상 불안했다. 이 아름다운 것이 내게 영원히 남을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픔보다 불안을 먼저 불러일으키곤 했다. 어느덧, 나는 여행이 욕망과 불안의 씨앗이 될까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섣불리 짐을 싸지 못했다.

 

실은 어디가 되었든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바로 그 장소가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아니면 다른 어떤 세상에서라도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라. (존뮤어) - 다비드 르 브르통 <느리게 걷는 즐거움> 중에서 

 그러나 내게는 언제나 처음인 오늘, 그리고 끝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일 나의 삶이 학습과 성찰의 연속이듯 여행도 그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성급하게 욕망하지 않는 것, 아름다운 것을 즐겁게 슬퍼할 줄 아는 것. 나태함과 심심함의 길 위에 의연하게 짐을 싸고 온 힘을 다해 걷고 춤추려고 하는 것.

 

 추신.  이 책의 또 다른 수확은 #{시드니, 여행, 걷기, 시간, 우주, 자연, 철학}에 대한 소중한 책들을 함께 추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주의 위치가 탁월하고 너무도 친절해서 얼른 이 책을 접고 그 책들을 읽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장석주의 걸어본다는 사실 시드니가 아니어도 무방했다. 그는 어디에서도 걸어봄으로 인해 이와 같은 이야기 보따리를 수도 없이 풀어냈으리라. 그의 발바닥은 시드니를 걸었지만 그의 자아는 사실 그 모든 의 숲들을 걷다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그 여자가 걸어본다.

 

 장석주의 걷기와 사색에 관한 이야기는 꽤 훌륭했지만 그의 시드니 퍼즐을 완성하는 데에는 몇 개의 빈 곳이 있었다. 그런데 박연준의 퍼즐 조각이 그곳을 가만히 채워 넣었다. 신기하게도 빈 공간에 꼭 들어맞는다.

 

 장석주의 걸음은 거칠고 다소 불친절했다. ‘직진 본능으로 앞서 나갈 것만 같은 걸음이다. 박연준의 그것은 조금 달랐다. 한 걸음을 내딛는 보폭이 좁고 가볍다. 따뜻하고 때로 명랑하다. 어린아이가 자유로운 공간에 놓인다면 꼭 그런 걸음을 걸을 것만 같다.

 

심심함은 옛날을 눈앞에 불러내기도 하고, 잊고 지냈던 어떤 능력을 되살려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뭔가를 만들어내게 한다. 결국 심심하다는 것은 쓸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심심함이야말로 인생을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감정이다 

 그녀는 생애 첫 시드니에 대해 드디어 여행자다운 설렘과 기대를 보여준다. 친숙하고 친절하다. 나는 장석주가 탄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박연준의 글을 읽고서야 그들이 탄 비행기에 함께 타고 날아가는 상상을 해 보았다.

 

3. 그 남자와 그 여자가 걸어본다.

 

풍경의 본질은 시각적 골조가 아닌 분위기다 

 그들은 정말 시드니에서 그들 자아와 제대로 인사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유롭고 넉넉해서 심심하기까지 한 시간 속에서 잊었던 것들을 부활시키고 한국의 일상에서는 하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 한다. 본질적으로 함께였지만 함께라는 점을 활용해서 그들 스스로 최대한 혼자였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장석주의 차가움과 고집스러움 때문에 박연준의 따뜻하고 명랑한 자유로움이 돋보이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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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 그리움을 안고 떠난 손미나의 페루 이야기
손미나 지음 / 예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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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페인 너는 자유다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이로써 손미나의 스페인, 파리, 페루 이야기를 모두 소장하게 되었다. 손미나의 책을 읽고, 그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시즌 1, 2를 모두 애청하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녀의 글과 말이 정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늘 조용하고 예쁜 음악같다. 다 읽고나면, 다 듣고나면 지도상의 어떤 경계를 넘어선 곳에 도착한 것 같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전작인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를 읽으면서 나는 그녀의 주변에 어쩜 그렇게 정답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것일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처음엔 그녀에게만 찾아드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점차 그녀에게 다소 차가운 파리지앵마저 녹이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꽤 근거 있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밝은 성품, 따뜻한 마음씨를 갖고 있는 그녀가 스페인과 파리에서 동양인으로서 우여곡절을 겪는 그 과정마저도 조금 낭만적으로 느꼈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스페인과 파리는 언젠가 가볼 수도 있는 곳이었고 만약 가게 된다면 그녀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곳으로 그곳을 기억하고 돌아오고 싶다는 어떤 과제마저 생긴 터였다.

 

  그런데... 이번은... 페루는, 조금 달랐다.

 

  손미나 역시 이제 공영방송의 아나운서딱지를 좀 떼고 여행 작가, 소설가, 대안 언론지의 편집장, 인생 학교 교장에, 본인의 이름을 건 회사의 대표까지... ‘수퍼 우먼을 넘어서 원더 우먼의 이름을 붙여도 될 만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해내고 마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을 그녀가 얼마의 난이도로 헤쳐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즐기고 있는가는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번만은... 페루 여행은, 좀 다른 느낌이었다. 시작부터 지금 이 여행이 결코 지난 다른 여행만큼 쉽지는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여행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지레 평생 죽을 때까지 이곳을 내 의지대로 가보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스타일이자 동시에 삶의 태도이기도 한 가치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전작들에 비해 사진은 훨씬 선명하고 다양해 졌고 페루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가 더욱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게다가 공유하고 싶은 지점들을 영상으로 촬영하여 QR코드로 인쇄해 두었기 때문에 사실은 다큐멘터리 한 편을 전사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다채로워진 여행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프롤로그를 이야기하고 싶다. 앞의 두 번의 여행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그녀가 왜 이 여행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여행작가의 타이틀이 제법 자연스러워진 이 순간에도 그녀는 구미가 당겨 떠나는 여행자가 아니다. 심연에서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여행의 필요성과 여행지를 선택한다.

 

 표지는 비슷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묻고 답한 것이 매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을 하게 된 훨씬 더 개인적인 이유까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번 여행의 주된 계기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었기 때문일까 페루에는우연’ ‘세렌디피티’ ‘기도’ ‘영적인 교감과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제목에 영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녀가 진행했던 팟캐스트 제목인 ‘손미나의 여행사전(약칭, ...)’처럼 여행에서 손미나만이 정의할 수 있는 그런 의미와 표현들로 가득채워진 것만큼은 그녀의 모든 책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점이다.

 

  여행을 한 번이라도 떠나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으며 이 구절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인생 학교의 교장으로 있는 알랭 드 보통<공항에서 일주일을>의 구절을 빌렸다.

 

이상적인 여행사가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어디를 가고 싶으냐고 묻기보다는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냐고 물어 볼 텐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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