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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ㅣ 시인수첩 시인선 39
박성현 지음 / 문학수첩 / 2020년 10월
평점 :
첫 시집을 내고 병을 얻은 시인이 있다.
어느,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지친 퇴근길. 한강 철교 위에서.
그가 병을 얻고 난 후 낸 시집을 읽고 있었다.
시집을 '촤르륵' 넘겨 시를 한두 편 읽어보다가
다시 시작으로 돌아와 시인의 말을 읽었다.
그러나 "아직, 해가 머물러 있다"(김종삼). 병은 혼자 아픈 것이지만
여전히 해는 내 곁에 머물러 있다. - p.5 시인의 말 중에서
'해가 있다'는 말에도 여전히 그의 병이 스며있는 것 같았다.
시인의 말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병과 그가 간신히 붙잡은 것과
그의 곁에 머물러있다는 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더라도
'시인의 말'이 끝난 지점부터 시작되는 약간의 여백이
있고 싶은 만큼 계속 머물러도 되는, 귀한 볕받이처럼 느껴졌다.
문득 그의 시를 처음 읽었던 때가 떠올랐다.
아마도 시의 제목처럼 뜨겁던 여름이었던가.
부엌에서 '어머니와 멸치칼국수가 함께 풀어진다'던,
그 가본 적도 없고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공간이 주는 끈적함이,
익숙하지도 않고 썩 좋아하는 온도도 습도도 아니지만
한참을 서서 그 대청과 부엌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시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일부러 벌려놓은 자간과 행간들의 의미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 모르는 자간이나 행간이
아는 척, 괜찮은 척 계산된 '사이'보다 편안한 때가 있다.
나는 그 '폭염' 때처럼 한참을 서서 그의 발길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더 아픈 자를 보면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 사람.
아주 가끔은 직접 '빙하'를 뽑기도 하지만,
부치지 못한 엽서와 편지들, 다 띄우지 못한 종이배 생각에 마음 바쁘고
저녁처럼 찾아온 저승사자에게 치고 싶은 농담도 많은 사람.
'날짜가 지난 신문'에서 영원을 찾는 사람.
해결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넘어와버린 현재에서, 남몰래 빚을 갚는 사람.
'시민'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던 순간 아니면,
내가 어느 세계의 시민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고통스러워진 사람.
어느날 갑자기, 무너진 땅에서, 하늘에서, 우주에서
다시 '생의 감각'을 찾아 하염없이 걷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걷고, 말하고, 우는 것 같았다.
시를 보는 내내 미간이 일그러졌다.
안쓰러움, 부끄러움, 답을 모르는 답답함이 뒤섞여 주름이 잡혔다.
빙하가 그렁그렁한 눈을 가진 이에게 시집을 선물 받았다.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시에 서린 눈물과 서늘한 바람들이 송구스러웠다.
아무래도, 눈치도 없이 하염없던 바람이 숱한 화자들을 살려냈나보다.
'녹슬어 가는 자전거에도 붙어 있다'던 그 바람이.
덧붙여. 그의 시집은 지금이다. 에일 듯한 바람이 불기 전. ‘곧 추워질거야. 그러니까 옷을 단단히 챙기고 지금을 살아.‘ 트렌치 코트 때를 놓치고 어색하지만 유용한 겨울 코트를 껴입으며 읽으면 가장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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